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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휴가가 그립다면, 우주기지 안의 소행성 같은 섬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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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특별한 휴가가 그립다면, 우주기지 안의 소행성 같은 섬들에서

2018년 7월 섬학교는 <고흥 나로도, 애도, 사양도>

*강의 마감됐습니다^^


우주기지가 있는 섬 나로도는 한때 이 나라에서 가장 번성한 어항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일제가 조선의 수산물 수탈 기지로 삼았던 까닭입니다. 그래서 일제 때는 조선 서남해에서 잡힌 거의 모든 수산물이 나로도를 통해 일본으로 갔다고 합니다. 나로도는 조선시대 국영 말목장이었던 까닭에 나라섬, 나라도라고도 합니다. 연륙된 내나로도와 외나로도가 나란히 있습니다.


외나로도 축정항 앞바다에 있는 애도와 사양도는 섬 속의 섬입니다. 쑥이 많아 쑥섬이라고도 하는 애도는 면적 0.32㎢ 불과한 작은 섬이지만 섬의 정상에는 하늘정원이 있습니다. 전라남도 1호 민간정원인데 그야말로 공중정원입니다. 정원에서는 연중 300여 종류의 꽃들이 피고지기를 거듭합니다. 그야말로 천상의 화원이지요. 섬의 중앙 당산숲에는 동백나무, 육박나무, 후박나무 등 상록수 아름드리 고목들로 된 400년 된 원시림도 있습니다.

▲옛스런 어촌 풍경에 마음이 고즈넉해지는 섬, 애도Ⓒ섬학교

이웃의 작은 섬인 사양도 역시 한때 전국에서 첫째가는 부촌이었습니다. 1978년 전국 어가소득 1위로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었지요. 이제 섬들은 화려했던 영화를 뒤로 하고 한가로운 어촌이 됐습니다.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 제73강은 7월 7(토)-8(일)일, 1박2일 일정으로 전남 고흥, 우주기지가 있는 섬 나로도와 휴식처럼 작은 섬, 애도와 사양도로 떠납니다. 휴가철을 피해 한가한 섬에서 짧은 휴가를 보내실 분들을 초대합니다.

▲애도의 공중정원에 만개한 꽃들Ⓒ쑥섬

교장선생님으로부터 2018년 7월의 답사지 <고흥 나로도, 애도, 사양도>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우주로 가는 기지가 된 ‘나라섬’, 나로도

외나로도 축정항은 들고나는 어선들로 늘 분주하다. 여수와 거문도 사이를 오가는 여객선들도 축정항을 기항지로 들고 난다. 나로도에는 나로우주센터가 있는데 나로우주센터는 한국이 자체 기술로 인공위성을 발사하기 위해 건설된 한국 최초의 우주발사체 발사기지다. 작은 어선들이 들고나는 한가로운 어촌마을 부근에 최첨단의 우주선 기지가 있다는 것은 왠지 어색해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잘 어울리는 풍경이기도 하다. 바다 속이나 우주나 인간에게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로도는 여행자들의 여수를 한껏 자극하는 섬이다.

나로도는 나라도라고도 불린다. 나라섬이라 한 것은 나로도가 조선시대 국영 말목장이었기 때문이라 전한다. 나라섬이라 하다가 한자화 과정에서 나로도가 됐다는 것이다. 나로도는 하나가 아니다. 내나로도, 외나로도가 바짝 붙어 있어서 두 섬을 통칭해 나로도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부른다. 바다로 나가는 관문인 나로도항(축정항)은 바깥 섬인 외나로도 항에 있는데 일제 강점기에는 수산물 수탈의 전초기지였다.

일제 때 이미 시멘트 포장도로가 생기고 생선 운반에 쓸 얼음을 만드는 제빙공장이 들어섰고 상수도는 물론 전기까지 들어올 정도로 융성했었다. 조선의 서남해 바다에서 잡힌 거의 모든 수산물이 축정항을 통해 일본으로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1923년에 나로도어업조합이 설립됐고 삼치파시가 섰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의 돈이 다 몰린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위세를 떨쳤다. 하지만 나로도 또한 어업기술의 발달에 따른 대량 남획으로 어장이 고갈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지금도 외나로도 축정항은 삼치잡이 철이면 부산하기 이를 데 없다.

애도로 가는 배는 이 축정항에서 출항한다. 외나로도는 연륙이 된 내나로도와 다리가 놓이면서 진즉에 뭍으로 편입됐다. 사양도 역시 최근 내나로도와 다리가 놓여 육지가 됐다. 이제 이 부근의 온전한 섬은 애도뿐이다.. 애도는 축정항에서 불과 500미터. 사양도마저 내륙으로 편입되자 애도만 외롭게 섬으로 남았다. 하지만 섬으로 남은 덕에 애도는 더 귀한 섬이 되었다. 애도와 사양도가 파도와 바람을 막아주는 덕에 나로도만 안의 축정항은 최고의 어항이 될 수 있었다.

▲묵정밭을 일구어 천상의 화원을 만든 기적 같은 섬Ⓒ쑥섬

하늘정원이 있는 쑥섬

애도(艾島)는 면적 0.32㎢에 주민 25명 남짓이 살아가는 아주 작은 섬이다. 70년대 말까지만 해도 70가구에 300명이나 살았지만 어업이 쇠퇴하면서 애도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젊은 사람들은 내륙으로 떠나고 이제는 노인들만 남았다. 어업이 성황을 이루던 시절 애도는 인근에서 가장 부유한 섬이었다. 애도 사람들은 대다수가 안강망(아구 입처럼 생긴 그물) 어업을 했었는데 인근 어장에서 안강망 그물에 조기·갈치·민어·병어·삼치·새우 등이 사철 잡혀 돈을 가마니에 담고 다닐 정도였다. 그래서 돈섬이라고 불렸다. 당시에는 안강망 어업을 하는 중선배가 40척이나 있었다. 중선배는 선원이 7-8명 정도 타는 큰 어선이다. 그 배로 애도 사람들은 연평도까지 가서 조기를 잡아오기도 했다. 바다에서 번 돈으로 육지에 논을 사서 소작을 줄 정도였다. 그래서 육지 사람들도 제법 부자가 아니면 애도로 딸을 시집보낼 생각을 못할 정도로 대단한 위세를 떨치던 섬이다.

섬은 본래 봉호도(蓬湖島)라 부르다 주민들의 건의로 2010년 7월에 애도로 명칭이 바뀌었다. 봉호도나 애도나 쑥과 관련된 지명이다. 애도에는 쑥이 많이 나서 다른 지역 사람들이 바구니를 몇 개씩 들고 줄지어 쑥을 캐러왔을 정도였다 한다. 그래서 쑥섬이었고 지금도 쑥섬이다. 애도는 섬 전체가 바다에 솟은 하나의 산이라 할 만한데 마을은 산 아래 작은 평지에 들어서 있다. 산비탈과 산 정상까지 개간하여 밭을 만들고 그 밭에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었다. 지금도 섬은 작지만 500여 종의 나무와 30여 종이나 되는 야생화가 자라고 있다. 애도 당산숲에는 동백나무, 육박나무, 후박나무 등 상록수 아름드리 고목들로 울창한 원시림이 있다. 이 숲은 400년의 숨결을 간직한 난대 원시림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제17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누리상을 수상했다, 예전에는 당숲에서 당할머니를 주신으로 모시고 당제를 지냈었다. 지금도 당집에는 봉호신주와 당할머님 신주 두 위패가 모셔져 있지만 더 이상 당제는 지내지 않고 있다.

애도는 반전의 매력이 있는 섬이다. 정면에서 볼 때는 별 볼 것 없이 평범해 보이지만 당산을 지나 섬의 산정에 가까워지면 놀라운 절경이 숨어있다. 거기 다도해의 섬과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산 정상의 널찍한 밭에는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심어져 있는데 이 꽃밭은 전라남도 1호 민간정원이다. 그야말로 공중정원, 하늘정원이라 할 만하다. 정원에서는 연중 300여 종류의 꽃들이 피고지기를 거듭한다. 꽃피는 철엔 그야말로 천상의 화원이다.

버려져 있던 묵정밭에 꽃을 피우게 한 것은 한 사람의 집념이다. 주인공은 고흥 백양중학교 국어교사인 김상현 선생이다. 김 선생의 어머니는 정신연령이 8-12세인 지적장애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공장 일을 하며 김 선생 4남매를 키워내셨다. 김 선생의 외조부모님 고향이 애도였다. 외조부모는 외손자에게 자신의 딸을 잘 돌봐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유언을 지키기 위해 김 선생은 대학과 군 생활을 제외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고흥 땅을 떠나지 않고 지켰고 마침내 애도로 들어와 섬 주민들과 함께 정원을 가꾸었다. 쇠락해 가는 외조부모님 고향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기 위해서였다. 애도와 하늘정원에는 입장료를 받는 이가 따로 없지만 ‘양심 돈통’이 놓여있다. 입장료 5천원을 양심껏 넣으면 된다. 그 덕에 김 선생은 지난해 마을발전기금으로 5백만원을 기부할 수 있었다. 김 선생이 지은 갈매기 모양의 까페는 마을 부녀회에 운영권을 주었다. 정원의 꽃들만큼이나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청년들과 함께 찾아간 사양도. 그저 떠나온 것만으로 행복한 섬Ⓒ섬학교

전국 어가 소득 1위였던 사양도

애도와 형제섬인 사양도는 한때 전국 어촌 중에서 최고로 부유한 섬마을이었다. 1978년 전국 어가소득 1위로 대통령상을 받았을 정도다. 그래서 사양도는 경제동향보고 지정마을이기도 했었다. 인근의 나로도나 애도처럼 어업으로 호황을 누리던 섬이다. 최근 섬의 시대를 끝내고 내륙으로 편입된 사양도. 내륙의 시대가 사양도에 득이 될지 독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리가 놓여졌지만 나로도를 드나드는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아직도 여객선은 애도를 거처 사양도까지 오고간다. 나그네는 선창마을에서 내렸다. 산비탈에 자리잡은 마을 아래로 해안도로가 큰마을까지 이어져 있다. 선창마을 해안에는 조개껍질들이 패총처럼 쌓여있다. 대부분이 굴껍질들이다. 쓸모없이 버려지는 저 굴껍질들이 예전에는 건물의 벽에 바르는 횟가루 재료였다.

섬을 중심으로 바닷물이 사방으로 흐른다 해서 사양도(泗洋島)란 이름을 얻었다지만 이름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다.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 <해동지도(海東地圖)> 등에는 현재의 ‘泗洋島’가 아닌 ‘四梁島(사량도)’로 표기되어 있다. 과거에는 뇌섬(雷島) 혹은 노섬(櫓島)이라 했는데, 우뢰(우레)가 떨어져 뇌도라 했고, 노섬이란 근처의 ‘각시여’에서 노가 밀려 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 유래 또한 불분명하다. 차라리 남해의 노도처럼 사양도의 산에 노를 만들 수 있는 나무가 많아 노섬이라 했다면 오히려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이 땅의 민중사가 그렇듯이 섬이나 섬살이에 대한 기록은 남겨진 것이 거의 없으니 이름의 유래 하나 찾기도 쉽지가 않다. 더구나 한글 이름을 한자로 바꾸면서 전혀 엉뚱한 이름을 갖게 된 경우도 허다하니 글자의 뜻만으로 이름의 유래를 찾는 것은 부정확하기 일쑤다.

▲소라방등만큼이나 아름다운 소라화분. 사양도 이 멋진 섬의 마음Ⓒ섬학교

사양도는 애도보다는 큰 편이지만 면적 0.915㎢, 해안선 둘레 4km의 아담한 섬이다. 110가구 180여 명의 주민들이 선창마을과 큰마을(사양마을) 두 곳에 모여 산다. 고려말부터 조선 중기까지 공도정책으로 비워져 있던 많은 섬들에 다시 사람들의 입도가 허락된 것은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다. 사양도 또한 조선 선조 때 영암에 거주한 김덕상이 입도하였고 이후 장성에서 고씨와 고흥 동강에서 신씨가 가솔들을 이끌고 입도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고 전한다. 섬 중앙의 봉화산은 해발 207m로, 작은 섬에 있는 산 치곤 제법 높다. ‘봉화산’에는 용 발자국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산 중턱에는 또 삼복더위에도 시원한 굴이 있는데 옛날에 스님이 살았었다 해서 ‘중굴’이라 부른다.

선창마을과 큰마을 두 마을 사이에 폐교와 보건소가 있다. 규모는 큰마을이 더 크지만 과거 두 마을의 세력은 막상막하였을 것이다. 보통 학교나 관공서는 기세가 더 센 마을로 가기 마련이다. 그 두 마을의 세력이 비등할 때는 가운데쯤에 위치한다. 작은 마을인 선창마을이 옛날 안강망어업을 할 때는 위세가 대단했던 것이다. 그 증거물이 저 학교다. 실제로 선창마을이 바로 전국 어가소득 1위를 차지했던 마을이다. 1978년에 호당 1,153만원의 소득을 올렸다니 대단한 고소득이 아닌가. 1978년 11월 10일 선창마을이 대통령상을 수상할 때 새마을지도자 김종우(金宗雨, 당시 37세)씨와 부녀지도자 곽형임(郭亨任)씨는 훈장을 받았다. 학교 건물은 1970년에 준공됐었는데 위아래로 두 동이다. 외관은 멀쩡한데 내부는 폐허가 되었고 학교와 관사의 지붕은 칡넝쿨이 점령했다. 풀만 무성한 운동장, 아이들이 떠나간 섬은 적막하다.

▲한때 화려했던 섬의 영화를 보여주는 품격 있는 제각Ⓒ사양도

많이 쇠락했으나 지금도 사양도에는 20여 척의 새우잡이배가 마을의 경제를 지탱한다. 또 몇 척은 삼치잡이를 하면서 은성했던 섬의 역사를 이어간다. 길에서 만난 할머니는 큰 마을에 ‘박공집’들이 많았었다고 한다. 박공이란 기와집 지붕을 이르는 섬의 언어이니 부잣집들이 많았단 말씀이다. 한옥 기와지붕은 우진각, 팔짝, 맞배지붕 등이 있는데 박공집은 맞배지붕 집이다. 해안도로가에도 제법 규모가 있는 박공집이 한 채 있다. 대문간의 사랑채는 규모가 작은 2층한옥이다. 지붕의 기와는 들어내서 이제 더 이상 기와집이 아니지만 골격은 그대로 한옥. 아름드리 기둥이며 대들보, 서까래 등은 여전히 튼실해 보인다. “집주인의 할배가 아주 큰 부자였다”고 할머니는 알려주신다.

할머니는 내나로도 신금리서 스무살 때 시집 와 평생을 사양도에서 살았다. 어찌 큰 섬에서 더 작은 섬으로 시집을 오셨을까. 처음에는 얼마나 갑갑했을까.
“모르고 왔제. 부모가 가랑게 간거제. 지금 같이 빤듯하면 어찌 온당가.”
부모가 혼처를 정해주니 작은 섬인 줄도 모르고 시집을 오셨다. 그때는 다들 그런 시절을 살았다.
“젊어서는 싸워도 못 건너 갔어.”
부부싸움을 해도 피할 데가 없던 섬. 섬에 한번 들어오면 부대끼고 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남편이 자상하고 부지런했다. 둘이서 어선을 했다.
“아자씨랑 고깃배 해서 돈 많이 벌었소.”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낳아 기르고 대처로 내보내 독립시켰다. 그렇게 많이 번 돈도 자식들 다 나눠줬다.
“쌓아놓으면 뭣 한다우.”
고생해서 번 돈이지만 자식들 살림밑천으로 아낌없이 갈라주었으니 흡족하다.
“무지무지 야문 새끼들이었어.”
자식들이 자리잡고 든든하게 살아주니 고맙다. 섬은 어미의 품처럼 넉넉하다.

2018년 7월 7(토)-8(일)일, 섬학교 제73강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7월 7일(토)>

07:30 서울 출발(07시 2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교통체증과 중간탑승자 불편을 고려하여 출발시각 엄수합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73강 여는 모임
-고흥읍 도착. 읍내에서 점심식사
-나로도 출항(대절)
-애도 걷기
-애도 출항
-사양도 걷기
-저녁식사 겸 뒤풀이(생선회와 섬밥상)
-자유시간 및 취침(외나로도 <노을과 바다> 펜션. 다인실)

<7월 8일(일)>


07:00 기상. 아침 산책
-아침식사(고등어조림)
-우주기지 탐방
-나로해수욕장
-점심식사(토속적인 섬밥상)
-어시장 장보기
14:30 서울 향발. 제73강 마무리모임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으로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7월의 섬학교 걷기 지도Ⓒ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풀숲에선 필히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가급적 줄이기)^^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섬학교'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3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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