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처럼 잊혀질 것 같아 투표하러 오신 대통령님 불렀어요"

박태인 2018. 6. 1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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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투표장에서 문 대통령 만난 발달장애인 김대범씨
"제 이름처럼 대범한 장애인 정책 부탁드렸다"
靑, 지방선거 후 장애인 참정권 보완계획 마련키로
김대범씨가 8일 사전투표장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만나 발달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 피플퍼스트]

"유령처럼 잊혀질 것 같아서요, 대통령님께 '저 좀 봐달라'고 소리쳤어요."

지난 8일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 종로구 삼청동 사전투표소를 찾은 문재인 대통령을 등 뒤에서 부른 청년이 있었다.

"대통령님 저 좀 한 번만, 조금만 봐주세요"라는 말에 문 대통령은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김대범(26·지적장애 2급)씨와 문 대통령의 30초 만남이 성사됐다.

11일 중앙일보와 만난 김씨는 "발달 장애인이 유령처럼 잊혀지는 게 두려워 현장을 떠나시는 대통령님을 불렀다"고 말했다. 당시 문 대통령은 김씨 반대편에서 휠체어에 앉아 참정권 시위를 벌이는 장애인들과 대화를 나눈 뒤 전용 차량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김씨는 "대통령님이 45도 각도로 돌아오셔서 '학생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말씀하셨다"며 당시 순간을 또렷이 기억했다. 이날 김씨는 문 대통령을 만나 자신을 소개한 뒤 "다음 총선에서는 저희 발달장애인이 알기 쉬운 그림으로 된 선거 공보물과 투표용지를 보기 위해 공직선거법을 개정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김대범씨가 11일 중앙일보와 만나 문재인 대통령과의 만남에 대해 웃으며 설명하고 있다. 박태인 기자

문 대통령이 "알겠습니다"고 하자 김씨는 "제 이름이 김대범입니다. 제 이름처럼 대통령님께서 대범한 장애인 정책을 추진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문 대통령은 미소를 지었다.

실제 대통령과의 만남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김씨는 이런 짧은 만남을 상상하며 이 문장을 머릿속에서 일곱번이나 되뇌었다.

8일 김씨와 함께 문 대통령을 만난 김성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사무국장은 "청와대 정책실에서 지방선거 이후 장애인 참정권과 관련한 면담을 하자고 했다"며 "청와대에 전달할 보완 입법안을 마련 중에 있다"고 했다. 대통령을 부른 김씨의 용기가 실제 발달 장애인 참정권 개선을 위한 단초를 마련한 것이다.

김씨는 2016년 출범한 발달장애인 권익 옹호단체 한국피플퍼스트의 활동가다. 그는 2015년 한국피플퍼스트 출범이 추진되던 초기부터 단체에 합류했다. 발달장애는 정신이나 신체 발달이 나이만큼 따라주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지적장애, 자폐성 장애 등이 대표적인 발달 장애로 분류되며 이들은 대체로 '언어 이해'에 어려움을 겪는다.

피플퍼스트 게시판에 6.13 지방선거에 맞춰 문재인 대통령에게 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요청하자는 계획이 적혀있다. 문 대통령의 8일 사전 투표로 이 계획은 8일로 변경됐다. 박태인 기자

김씨는 "사람들이 발달 장애인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시선도 두지 않는다"며 "발달 장애인들은 글자 중심으로 된 선거 공보물과 투표용지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했다. 손이 떨리는 장애인들에겐 기표 용지가 너무 좁아 무효표가 속출하기도 한다.

2016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에 등록된 발달 장애인은 21만8000여 명이며 이 중 19세 유권자는 16만5000여 명이다. 전체 유권자 중 0.4%가 발달 장애인이다. 수십표 차이로 승패가 갈리는 지방선거나 총선에서는 유령처럼 무시할 수 없는 유의미한 유권자들이다.

현재 유럽과 대만 등 일부 국가에서는 발달 장애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정당 로고나 후보자의 사진이 들어간 투표용지와 선거 공보물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2016년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달장애인의 참정권 보장을 위해 법안을 발의했지만 2년째 해당 상임위원회의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있다.

김씨와 함께 한국피플퍼스트에서 활동가로 일하고 있는 김정훈(28·지적장애 3급)씨는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유령이라 부르기도 한다"며 "선거가 있을 때마다 발달 장애인을 위한 정책이 없고, 나라에 우리는 유령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피플퍼스트 활동가들이 가오나시(얼굴없는 유령) 분장을 하고 발달장애인 참정권 확대를 위한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사진 피플퍼스트]

한국피플퍼스트의 활동가들은 8일 문 대통령을 만난 뒤 종로의 다른 사전투표장에서 가오나시(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얼굴 없는 유령) 분장을 하고 사전 투표를 했다. 발달 장애인을 유령처럼 생각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담은 퍼포먼스였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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