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스피커 뒤에 숨어 있는 디지털 불평등과 성차별

최용성 2018. 6. 11.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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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 Talk-111] 새로운 격차의 등장으로 평범한 사람들은 또 한 번 강 건너 저편으로 밀려난다. 과거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는데, 시나브로 엄청난 장애물이 돼 갈 길을 막는다. '디지털 격차(Digital divide)'가 그렇다. 1996년 10월 앨 고어 미국 부통령은 녹스빌 연설에서 "2000년까지 미국 전역에 초고속 정보통신망을 깔아 어느 누구도 디지털 격차로 차별받지 않도록 하겠다"며 '정보 슈퍼하이웨이 구상'을 주장했다.

하지만 현실은, 돈이 넘쳐나는 부자가 인터넷 가격비교를 통해 카리브해 크루즈 여행을 헐값에 다녀왔다고 자랑하고, 빈민가 흑인 소년은 차도 없고 인터넷 이용도 쉽지 않은 탓에 도시 외곽에 있는 대형마트보다 더 비싼 가격의 생필품을 동네 소매점에서 산다. 돈이 아쉽지 않은 사람이 돈을 절약하고 단돈 몇 센트가 아쉬운 사람은 오히려 더 많은 돈을 쓴다. 이 차이를 부지런한 부자와 게으른 빈민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디지털 격차가 빈부를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격차란 컴퓨터와 같은 정보 기기를 갖고 있느냐, 그리고 그 기기를 능숙하게 조작할 수 있느냐와 같은 활용 능력에 따라 발생하는 불평등 문제를 말한다. 문제는 단지 컴퓨터가 없고, 그래서 사용할 줄 모른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일단 벌어진 디지털 격차는 지속적인 빈곤과 불평등을 야기하기 때문에 심각하다. 격차를 부르는 기기는 기술 발달과 더불어 혁신적으로 등장하면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처음엔 컴퓨터였다가 다음엔 인터넷이 됐고, 또 스마트폰으로 모습을 바꿨다.

기기는 일을, 생활을 더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만들었지만 왠지 사람들은 더 바빠지고 여유는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당신이 느끼는 디지털 격차는 어떠한가. 컴퓨터와 인터넷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스마트폰도 최신 제품이라 안심할 수 있을까. 마음 놓을 수 없다. 앞으로는 개발자가 아니어도 기본적인 코딩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지금 영어를 잘해야 하는 것처럼.

판매되고 있는 주요 AI 스피커 제품들

모든 혁신은 빠르게 증가하는 효율성과 편의성만큼이나 깊고 어두운 차별과 불평등의 문제를 만들어낸다. 디지털 혁신도 다르지 않다. 컴퓨터와 인터넷, 스마트폰은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또 다른 불평등을 키웠다. 스마트폰 이후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정보 기기로 평가받고 있는 인공지능(AI) 스피커는 어떨까. 한국이 글로벌 보급률 3위(정말 그 정도인가?)라는 이 새로운 기기는 미국의 공룡 정보기술(IT) 기업인 아마존이 2014년 처음 선보인 이후 일반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사람 목소리를 알아듣고 원하는 답을 해주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매력 포인트인 것 같다. 노래를 들려달라고 하면 노래를 틀어주고 날씨가 어떠냐고 물으면 날씨 예보를 해준다. 주요 뉴스, 알람 설정은 기본이다. 택시 호출도 가능하다. 여기에 앙증맞은 캐릭터까지, 확실히 눈길을 끌 만하다. 실제로 AI 스피커 시장은 급성장하고 있는 것 같다. 구글이 이 시장에 뛰어들어 선두주자인 아마존을 제쳤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AI 스피커 만족도는 그렇게 높지 않다. 엉뚱한 대답은 예사고 "준비가 안돼 있다"는 답변도 적지 않다. 답답할 때가 많다. 아직은 그저 신기한 장난감 수준이다. 묻지도 않았는데 저 혼자 지껄여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하기도 한다(한밤중에 혼자서 웅얼거리는 AI 스피커를 본 적이 있는데, 섬뜩했다).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도 처음엔 이랬을 것이다. 그러나 앞선 기기들처럼 AI 스피커도 곧 일상화할 수 있을 것이다. AI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고, 음성인식 기술도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를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장난감처럼 보이는 이 스피커는 가까운 미래에 컴퓨터, 스마트폰에 이은 유력한 정보 기기가 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이런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기기라면 디지털 격차 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컴퓨터나 스마트폰과 달리 조작에 대한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뭔가 작업을 하고 싶을 때 말만 하면 되니까.

그런데 이게 또 다른 차별과 불평등의 골을 키우게 될 수 있을 거 같다. 가령 이런 문제들이다. 왜 AI 스피커 목소리는 (따로 설정하지 않으면)죄다 여성형 목소리인가(목소리뿐인가. 호출어로 쓰이는 이름도 여성형이 많다). AI 스피커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도와주는 비서 역할을 하는 기기다. 명령을 하면 공손하게 반응을 한다. 어떠한 불합리한 명령에도 절대 토를 달지 않는다. 그런 기기 목소리를 우리는 여성형으로 기본 설정해 놓았다. 사용하다 보면 "못 알아들었다"는 답변도 많은데, 그럴 때마다 AI 스피커를 향해 "이런 바보!"라고 함부로 말하는 것을 아이들은 지켜본다(욕까지는 아니더라도 반말로 명령하는 장면은 흔할 것이다). 기계라는 객체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이런 상황은 남성과 여성에 대한 그릇된 고정관념을 심어줄 수 있다. '여성은 늘 도와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편견 말이다. 뭔가 달라져야 할 것 같은데, 그러기에 너무 늦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런 고정관념에 너무 많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AI 스피커에 앞서 자동응답 전화에서, 엘리베이터에서, 그리고 자동차 내비게이션에서 이미 비슷한 경험을 한참 동안 하지 않았나.

[최용성 매경닷컴 DM전략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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