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기 3대 동원 '첩보영화'처럼..김정은 '세기의 비행'

입력 2018. 6. 10. 17:26 수정 2018. 6. 11.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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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전 평양서 북·중 항공기 3대 차례로 이륙
김 위원장 탄 '중국 항공기' 편명 바꿔가며 이동
북 최고지도자 장거리 항공 이동 '53년 만의 파격'

[한겨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일행이 10일 오후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도착해 싱가포르 외무장관 등의 영접을 받고 있다. 싱가포르 공보부 제공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0일 오후 2시35분(한국시각 3시35분)께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평양과 싱가포르를 잇는 하늘길에서는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수송작전이 펼쳐졌다. 1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펼칠 ‘세기의 담판’에 걸맞은 ‘극적인 여정’이었다. 1965년 김일성 주석의 인도네시아 반둥회의 10돌 기념행사 참석 이후 53년 만에 이뤄진 북한 최고지도자의 ‘원정’은 출발부터 치열한 외교전을 예고했다.

이날 평양에선 시차를 두고 석 대의 항공기가 활주로를 떠났다. 고려항공 항공기가 맨 먼저 이륙했고, 뒤이어 중국국제항공 보잉747기와 김 위원장의 전용기 ‘참매 1호’가 1시간 간격을 두고 하늘로 솟구쳤다. 이들 항공기가 모두 싱가포르 항로를 비행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김 위원장이 어디에 탔을까를 두고 다양한 추측이 오갔다.

가장 먼저 정체가 확인된 것은 첫번째로 평양을 떠난 항공기였다. 오후 1시30분께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도착한 이 항공기는 고려항공 수송기(일류신-76)로 확인됐다. 김 위원장이 지난달 7~8일 시진핑 중국 주석과 두번째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중국 랴오닝성 다롄을 방문했을 때 전용차를 실어날랐던 수송기였다. 이번에도 트럼프 대통령과 담판에 나서는 김 위원장의 전용차와 각종 물품을 운송한 것으로 보인다.

이어 2시35분께 김 위원장이 탄 항공기가 창이공항에 내려앉았다. 평양에서 두번째로 출발한 중국국제항공 보잉747기였다. 김 위원장이 전용기인 ‘참매 1호’를 타지 않았음이 마침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소련 시절 제작된 ‘일류신-62M’을 개조한 ‘참매 1호’는 제원상 비행거리가 1만㎞에 달해 4700㎞ 거리인 싱가포르까지 재급유를 받지 않고도 비행할 수 있으나, 노후화와 장거리 운항 경험이 적다는 점에서 안전상의 우려를 고려한 선택으로 보인다.

중국국제항공 보잉747기는 이날 하늘에서 펼쳐진 ‘첩보영화’의 주인공이었다. 베이징을 떠나 평양을 거쳐 싱가포르로 가는 동안 편명과 행선지를 바꿔가며 연막을 피웠다. 오전 4시18분(현지시각) 베이징을 출발해 평양으로 들어간 이 비행기는 베이징으로 돌아가는 도중 편명을 CA122에서 CA61로 바꾸고, 목적지도 싱가포르로 변경했다. 이후 남하하면서 기수를 서쪽으로 돌려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항공기에 김 위원장이 탔는지 여부는 곧바로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예상하지 못한 대형 항공기가 싱가포르 항로에 투입됐다는 점에서 중국이 김 위원장을 위해 특별편을 제공하거나 임대해준 게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됐다. 중국국제항공의 평양~베이징 왕복편은 월·수·금요일에만 운영된다. 이 항공기가 중국 고위급들이 이용하는 전용기일 가능성도 그런 관측에 무게를 더했다. 이 항공기는 5월 중순 에티오피아, 모잠비크, 나미비아 등을 다녀왔다. 중국 공산당 서열 3위인 리잔수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의 아프리카 순방 일정과 겹친다.

김 위원장이 중국국제항공 보잉747기를 타고 싱가포르로 가는 동안 중국은 삼엄한 호위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으로선 북-미 정상회담에 참석하는 김 위원장의 안전을 위해 전투기 편대를 동원해 밀착경호전을 펼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북핵 협상 과정을 지켜보는 한 외교관은 “중국이 김 위원장에게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우호관계를 과시하려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 그래픽을 누르면 확대됩니다.

평양을 세번째로 출발한 ‘참매 1호’에 김 위원장이 타고 있을 가능성도 한동안 제기됐다. ‘참매 1호’는 P-885라는 등록기호를 달고 싱가포르 쪽으로 비행했다. 낮 12시께는 중국 허난성 상공을 통과했고, 오후에는 캄보디아 해역으로 접근하는 게 포착됐다. 마지막으로 오후 3시45분께 창이공항에 도착한 이 비행기에선 김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내렸다고 싱가포르 현지 언론이 전했다. 김 위원장이 만일의 경우를 고려해 중국 비행기로 이동하기는 했지만, 김 부부장의 여정은 ‘참매 1호’의 운항 능력을 입증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석 대의 항공기가 싱가포르 항로에 나타나면서 치열하게 펼쳐졌던 하늘길 수송작전은 오후 2시35분께 김 위원장이 중국국제항공 보잉747기에서 내리면서 일단락됐다. 한 외교관은 “김 위원장의 싱가포르행 자체가 세기적 사건임을 보여주는 풍경”이라고 평했다. 인민복을 입고 안경을 쓴 김 위원장은 비행기에서 내린 뒤 활짝 웃으며 비비안 발라크리슈난 싱가포르 외무장관과 악수했다.

김 위원장이 회담을 위해 평양에서 4700㎞ 떨어진 싱가포르까지 날아간 것 자체가 대담한 파격이다. 싱가포르가 중립지대를 표방하고 북한과 외교적 관계가 나쁘지 않다고 해도, 김 위원장의 선택은 전통적 우방국인 중국, 러시아를 빼고는 좀처럼 국외 방문길에 오르지 않았던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뚜렷한 차이를 보여준다. 김정일 위원장은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약속했던 서울 방문도 끝내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김 위원장의 이번 싱가포르행을 1965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의 비동맹 국가 회의(반둥회의) 10돌 기념행사에 참석한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활발했던 외교 행적에 견주는 전문가들이 많다. 김일성 주석은 수십 차례에 걸쳐 중국을 공식·비공식으로 방문했고, 1984년에는 46일간 소련과 동유럽 8개국 순방에 나서기도 했다. 다만 반둥회의가 미국과 소련이 배제된 비동맹 국가들의 모임이었다는 점에서 70년 동안 ‘적대관계’였던 미국과의 담판을 위해 싱가포르를 찾은 김 위원장의 행보는 차원이 다른 ‘김정은식 외교’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유강문 선임기자, 베이징/김외현 특파원 moon@hani.co.kr

[화보] 북-미 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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