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하늘 정원을 품은 섬, 다도해·우주기지는 눈부신 조연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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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윤 시인의 새로 쓰는 '섬 택리지'
<19> 고흥 애도·사양도
외나로도에 사양도까지 육지와 연결
홀로 섬으로 남은 애도의 산 정상엔
300여종 꽃 어우러진 ‘천상의 화원’
<19> 고흥 애도·사양도
외나로도에 사양도까지 육지와 연결
홀로 섬으로 남은 애도의 산 정상엔
300여종 꽃 어우러진 ‘천상의 화원’

우주기지에서 하늘 정원의 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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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안강망 어업을 하는 중선배가 40척이나 있었다. 중선배는 선원이 7~8명 정도 타는 큰 어선이다. 그 배로 애도 사람들은 연평도까지 가서 조기를 잡아오기도 했다. 바다에서 번 돈으로 육지에 논을 사서 소작을 줄 정도였다. 그래서 육지 사람들도 제법 부자가 아니면 애도로 딸을 시집보낼 생각을 못할 정도로 대단한 위세를 떨치던 섬이다.
섬은 본래 봉호도(蓬湖島)라 부르다 주민들의 건의로 2010년 7월에 애도로 명칭이 바뀌었다. 봉호도나 애도나 쑥과 관련된 지명이다. 애도에는 쑥이 많이 나서 다른 지역 사람들이 바구니를 몇 개씩 들고 줄지어 쑥을 캐러왔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쑥섬이었고 지금도 쑥섬이다. 애도는 섬 전체가 바다에 솟은 하나의 산이라 할 만한데 마을은 산 아래 작은 평지에 들어서 있다. 산비탈과 산 정상까지 개간해 밭을 만들고 그 밭에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다. 지금도 섬은 작지만 500여 종의 나무와 30여 종이나 되는 야생화가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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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 매력이 가득한 섬 애도
애도는 반전의 매력이 있는 섬이다. 정면에서 볼 때는 별 볼 것 없이 평범해 보이지만 당산을 지나 섬의 산정에 가까워지면 놀라운 절경이 숨어 있다. 거기 다도해의 섬과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산 정상의 널찍한 밭에는 다양한 종류의 꽃이 심어져 있는데 이 꽃밭은 전라남도 1호 민간 정원이다. 그야말로 공중정원, 하늘 정원이라 할 만하다. 정원에서는 연중 300여 종류의 꽃이 피고 지기를 거듭한다. 꽃피는 철엔 그야말로 천상의 화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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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어가 소득 1위였던 사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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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놓였지만 나로도를 드나드는 주민의 편의를 위해 아직도 여객선은 애도를 거쳐 사양도까지 오간다. 나그네는 선창마을에서 내렸다. 산비탈에 자리 잡은 마을 아래로 해안도로가 큰마을까지 이어져 있다. 선창마을 해안에는 조개껍데기가 패총처럼 쌓여 있다. 대부분이 굴껍데기다. 쓸모없이 버려지는 저 굴껍데기들이 예전에는 건물 벽에 바르는 횟가루 재료였다.
섬을 중심으로 바닷물이 사방으로 흐른다 해서 사양도(泗洋島)란 이름을 얻었다지만 이름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다.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 해동지도(海東地圖) 등에는 현재의 ‘泗洋島’가 아니라 ‘四梁島(사량도)’로 표기돼 있다. 과거에는 뇌섬(雷島) 혹은 노섬(櫓島)이라 했는데, 우레가 떨어져 뇌도라 했고, 노섬이란 근처의 ‘각시여’에서 노가 밀려 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 유래 또한 불분명하다. 차라리 남해의 노도처럼 사양도의 산에 노를 만들 수 있는 나무가 많아 노섬이라 했다면 오히려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이 땅의 민중사가 그렇듯이 섬이나 섬 살이에 대한 기록은 남겨진 것이 거의 없으니 이름의 유래 하나 찾기도 쉽지가 않다. 더구나 한글 이름을 한자로 바꾸면서 전혀 엉뚱한 이름을 갖게 된 경우도 허다하니 글자의 뜻만으로 이름의 유래를 찾는 것은 부정확하기 일쑤다.
쇠락했지만 정겹고 넉넉한 섬
사양도는 애도보다는 큰 편이지만 면적 0.915㎢, 해안선 둘레 4㎞의 아담한 섬이다. 110가구 180여 명의 주민이 선창마을과 큰 마을(사양마을) 두 곳에 모여 산다. 고려 말부터 조선 중기까지 공도정책으로 비어 있던 많은 섬에 다시 사람들의 입도가 허락된 것은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다.



![[여행의 향기] 하늘 정원을 품은 섬, 다도해·우주기지는 눈부신 조연이 되고…](https://img.hankyung.com/photo/201806/AA.16899745.1.jpg)
“모르고 왔제. 부모가 가랑게 간거제. 지금같이 빤듯하면 어찌 온당가.”
부모가 혼처를 정해주니 작은 섬인 줄도 모르고 시집을 오셨다. 그때는 다들 그런 시절을 살았다.
“젊어서는 싸워도 못 건너 갔어.”
부부 싸움을 해도 피할 데가 없던 섬. 섬에 한 번 들어오면 부대끼고 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남편이 자상하고 부지런했다. 둘이서 어선을 했다.
“아자씨랑 고깃배 해서 돈 많이 벌었소.”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낳아 기르고 대처로 내보내 독립시켰다. 그렇게 많이 번 돈도 자식들 다 나눠줬다.
“쌓아 놓으면 뭣한다우.”
고생해서 번 돈이지만 자식들 살림 밑천으로 아낌없이 갈라줬으니 흡족하다.
“무지 무지 야문 새끼들이었어.”
자식들이 자리 잡고 든든하게 살아주니 고맙다. 섬은 어미의 품처럼 넉넉하다.
![[여행의 향기] 하늘 정원을 품은 섬, 다도해·우주기지는 눈부신 조연이 되고…](https://img.hankyung.com/photo/201806/AA.14223153.1.jpg)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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