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제2의 촛불되나.."인내는 끝났다" 쏟아지는 여성들

방윤영 기자 입력 2018.06.10.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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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대' 수만명 女시위대 대학로 점령.."여자라서 겪었던 불안과 분노, 폭발"
9일 오후 서울 혜화역 일대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집회'에 참가한 여성들이 붉은색 옷이나 소품을 갖추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집회 참가 인원은 2만여명 이상으로 여성들만의 집회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사진=방윤영 기자


불법촬영(소위 몰카) 편파수사를 규탄하는 여성들 수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전례를 찾기 힘든 여자들만의 대규모 시위는 지난달에 이어 두 번째인데 규모가 더 커졌다.

전문가들은 오랫동안 쌓여온 성차별과 성폭력에 대한 분노가 홍대 몰카 사건이란 방아쇠를 만나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으로 본다. 쉽게 가라앉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9일 오후 3시부터 서울 혜화역 일대는 불법촬영 편파수사를 규탄하는 여성 참가자들로 가득했다. 이들은 주최 측이 정한 복장인 빨간색에 맞춰 옷과 소품을 갖추고 참가했다. 빨간색은 여성들의 분노를 보여주자는 의미에서 정한 색이다.

이날 집회는 1만명 이상이 몰렸던 지난달 시위 규모를 뛰어넘었다. 애초 집회 장소로 신고한 혜화역 2번 출구에서부터 방송통신대학교를 넘어 이화사거리까지 약 1㎞ 구간을 가득 메웠다.

집회 참가 인원은 오후 6시 기준 주최 추산 2만2000여명(경찰 추산 1만5000여명)에 달한다. 여성들만 참가한 시위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이들은 대학로에 다시 모인 이유가 지난달 1차 집회에서의 요구가 반영되지 않아서라고 주장했다. 집회는 홍대 누드모델 몰카 사건에서 시작됐다. 경찰이 피의자를 사건 발생 12일 만에 붙잡자 피해자가 여성이 아닌 남성이어서 빠른 수사가 이뤄졌다며 편파수사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여성 피해자가 대부분인 몰카 범죄를 엄중히 수사하고 처벌하라고 촉구했다.

주최 측 관계자는 이날 "1차 집회 때 우리는 불법촬영 편파 수사에 대한 경찰과 정부의 대책을 요구했지만 어떤 대책도 나오지 않았다"며 "우리는 여전히 국가로부터 정당한 보호를 받지 못할 거란 불안감에 떨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이 아무리 '합리적 설명'을 해도 먹히지 않은 셈이다. 홍대 몰카 사건의 '남성 피해자와 여성 가해자'라는 이례적 구도가 관심을 끌었지만, 수사는 이와 무관하게 이뤄졌으며 범행이 미대 교실 내로 한정되는 특수성 때문에 범인(여성)을 빨리 잡은 것이라고 줄곧 해명해도 분노를 풀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분노가 더 커졌다며 참가자들은 삭발식까지 진행했다. 이날 오후 5시20분쯤 여성 6명이 나섰고 이중 3명은 완전히 삭발했다. 나머지는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귀밑 짧은 단발로 잘랐다.

여느 삭발식과 달리 눈물 대신 환호성이 나왔다. 자른 긴 머리를 위로 들어 보이자 이를 지켜본 참가자들은 "멋있다", "시원하다"고 외쳤다.

삭발식에 참여한 한 여성은 "처음 삭발을 결정했을 때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그 두려움이 어디서 오는지 생각해봤다"며 "내가 이 두려움을 극복한 것처럼 모든 여성들이 길을 걷거나 화장실을 갈 때에도 두려움이 없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홍대 몰카 사건은 계기가 됐을 뿐 여자라서 느꼈던 불안과 공포, 억울함 등이 이참에 터져 나왔다고 진단한다.

한성훈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사회학 박사)는 "한국은 기본적으로 남성 위주 사회고 문화적으로나 제도적으로 남녀 차별 요소들이 여전히 많다"며 "그동안 쌓여 있던 분노가 홍대 사건으로 분출된 것"이라고 말했다.

장미혜 한국여성정책연구소 실장은 "올해 초 미투 운동이 가시적인 효과 없이 여론만 들끓다가 지지부진해졌다"며 "실질적인 성과를 만들려는 여성들의 의지가 집회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분노가 뿌리 깊은 만큼 이를 해소하는데도 제도적인 변화 등을 포함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장 실장은 "여성들의 행동은 뚜렷한 해결책이 나올 때까지 쉽게 사그러지지 않을 것"이라며 "이번 6.13 지방선거에서 지금의 여성 이슈를 담아 공약으로 내세운 후보들도 나타나는 등 정치권에서 관심의 정도가 달라진 것은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한 교수는 "근본적으로 여성들이 지도자급에 많이 진출해야 한다"며 "제도권에서 여성 권익을 위해 일하는 여성이 많아져야 조금씩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방윤영 기자 byy@m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