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가야' 실체 발견됐다지만..어원조차 불확실, 갈길 먼 '가야사'

이현우 2018. 6. 8.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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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6세기 중엽 가야 연맹의 맹주국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아라가야'의 실체가 확인되면서 베일 속에 싸여있던 가야 역사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계기가 될지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연구소 측은 이번 발굴로 그동안 문헌 속에서만 볼 수 있었던 아라가야 왕성(王城)의 실체가 확인 된 것으로 보고, 왕궁 유적 발굴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아라가야는 그동안 후한서, 삼국사기 등 문헌 속에서만 확인할 수 있었던 가야연맹 내의 국가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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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어원조차 7개 학설 난립
연맹? 단일 왕국? 체제도 불분명
멸망원인도 불확실... 광개토대왕 정벌 탓?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면 가야리에서 발견된 아라가야 왕성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사진=문화재청)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과거 6세기 중엽 가야 연맹의 맹주국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아라가야'의 실체가 확인되면서 베일 속에 싸여있던 가야 역사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계기가 될지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국 고대사에 등장하는 국가들 중에서도 유독 주목받지 못하던 가야에 대한 연구도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7일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가야리 289번지에서 발굴조사를 통해 5~6세기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토성 흔적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높이 8.5미터(m), 상부 폭이 최대 40미터에 이르는 토성은 정교한 축조기법으로 축성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함께 방어시설인 목책과 그릇받침, 토기 등도 함께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연구소 측은 이번 발굴로 그동안 문헌 속에서만 볼 수 있었던 아라가야 왕성(王城)의 실체가 확인 된 것으로 보고, 왕궁 유적 발굴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보통 '6가야 연맹'이란 표현을 잘 쓰지만, 일체감을 지닌 연맹국가였는지, 개별 성읍국가들의 동맹체였는지, 하나의 왕국이었는지 가야의 정확한 체제는 알려져있지 않다.(자료=두산백과)

아라가야는 그동안 후한서, 삼국사기 등 문헌 속에서만 확인할 수 있었던 가야연맹 내의 국가 중 하나다. 약 500여년간 함안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국가로 알려졌으며 6세기 중엽부터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로 백제와 신라, 왜국의 사신들과 교류하며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던 국가로 알려져있다. 백제와 신라 사이에 낀 상태로 점차 위축되던 가야연맹들을 규합, 548년에는 백제를 견제코자 고구려를 끌어들여 독산성전투를 유발시키기도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559년에 신라에 항복, 복속된 나라로 알려져있다.

사실 아라가야 뿐만 아니라 우리가 흔히 '6가야 연맹'이라고 칭하는 전체 가야 구성국들의 역사는 미스터리 투성이다. 일단 가야라는 이름 자체의 어원도 어디서 왔는지 크게 7가지 학설이 충돌하고 있다. ▲예전 벼슬아치나 임금들이 쓰던 모자인 관책(冠?)인 '가나(駕那)'에서 왔다는 설, ▲개간한 평야를 뜻하는 '가라(Kala)'에서 왔다는 설, ▲신국(神國)을 뜻하는 '간나라'가 변했다는 설, ▲해변에 위치했다는 의미의 '갓나라(邊國)'에서 왔다는 설, ▲낙동강을 뜻하는 '가람'의 변형이라는 설, ▲'겨레'가 음운변화로 가야가 됐다는 설, ▲성읍이란 의미의 '구루(溝婁)'에서 왔다는 설 등이다.

1978년 경상북도 고령군 일대 대가야의 왕릉급 무덤인 지산동 고분군 32호 무덤에서 출토된 가야의 철갑옷 유물 모습.(사진=국립중앙박물관)

6가야도 연맹이었는지 하나의 왕국이었는지 연합왕국이었는지 체제도 불분명하며, 영역 또한 현재처럼 경상남도 서부 일대에 국한됐는지, 전라도 남해안까지 진출했었는지 의견만 분분한 상태다. 각 가야 구성국 사이에 끼어있던 소국들도 언제 명멸하게 됐는지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삼국사기에는 삼국시대 초기인 3세기경에 가야지역 일대에 있던 이른바 '포상팔국(浦上八國)'이 가야를 침범하니 가야에서 신라에 도움을 요청, 이 팔국 병사들을 물리쳤다는 내용이 있다. 이런 정황들을 보면 삼국시대 초기부터 가야와 낙동강 하구지역에 놓여있던 여러 소국, 신라 간에 활발한 교류와 전쟁, 외교가 펼쳐졌던 것으로 추정은 되지만 여전히 실체가 제대로 확인되진 못하고 있다.

가야의 약화와 멸망 원인도 불분명하다. 기존에는 느슨한 연맹체제의 한계로 중앙집권형 고대왕국 체제를 마련한 백제와 신라에 밀려 차례로 멸망한 것처럼 기술됐다. 그러나 최근에는 서기 400년 전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한반도 남부 정벌 때 대대적으로 토벌돼 금관가야가 크게 쇠퇴하면서 세력의 거의 궤멸됐다가 이후 대가야와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이 유지되다가 신라에 흡수된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향후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과 유물 발굴에 따라 학설들은 계속 바뀔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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