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병의 상징' 원진레이온 사건을 알리다

2018. 6. 5.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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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30년, 한겨레 보도-2]
1988년 이황화탄소 중독 산재피해자 첫 보도와 수백명의 피해자들

[한겨레]

원진레이온 방사과 작업장은 이황화탄소를 가장 많이 분출시키는 곳이었다. 노동부는 이황화탄소가 기준치를 웃돌았는데도 원진레이온에 무재해 기록증을 발급해주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8년 7월 16일, 한겨레신문사 편집국에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의 ‘환경운동연합’ 전신인 ‘공해문제연구소’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구리노동상담소에서 제보가 왔는데, 산업재해로 퇴직한 노동자가 특이한 증상을 호소한다고 해요. 젊은 나이인데 말을 더듬고 중풍에 걸린 듯이 제대로 걷지 못한답니다.”

전화 통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안종주 의학 담당 기자의 머릿속에 스치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이거 이황화탄소 중독이구나!”

안종주는 서울대 보건대학원에 다니며 산업보건학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이황화탄소 직업병’에 대해 배웠다. 전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보통 문제가 아님을 직감했다. 바로 구로의원에 전화해 산업의학사전을 뒤져보라고 했다. 증상이 일치했다.

구리노동상담소가 이야기한 노동자는 44살의 강희수였다. 그는 인견사(실의 일종)를 만드는 원진레이온이라는 회사를 다녔다고 했다. 1988년 당시 원진레이온은 종업원 1500여 명, 연간 매출액 455억 원의 중견기업이었다. 강씨는 비슷한 병에 걸린 뒤에 원진레이온에서 강제퇴직당한 사람이 자신 말고도 더 있다고 말했다. 이황화탄소에 노출되는 작업 공정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500여 명에 달했다.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온몸이 마비된 서용선씨가 큰아들의 도움으로 겨우 휠체어에 올라 앉아 있다. 김선규 기자

1988년 7월 17일,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312-14번지, 안종주가 강희수와 함께 정근복의 집에 들어섰다. 정씨와 그의 아내는 사진 촬영을 거절했다.

“내 병과 관련해 민형사상 어떤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써주고 회사로부터 600만 원을 받기로 했으니, 취재에 응할 수 없다.”

정씨는 며칠 뒤에 돈을 받기로 되어 있노라고 말했다. 안종주는 30여 분간 정씨와 아내를 설득했다.

“진실을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600만원이 아니라 6000만원을 받아도 시원찮을 문제입니다.”

안종주는 뒤이어 경기도 남양주군 지금리에 사는 서용선을 찾아갔다. 그는 두 다리와 한쪽 팔을 전혀 쓰지 못했다. 말도 못 했고, 제 힘으로 앉지도 못했다. 파출부 일을 나간 엄마를 대신해 초등학생인 아들이 아버지의 입에 라면을 넣어줬는데, 그조차 삼키지 못하고 계속 바닥에 흘렸다. 말도 못하는 사람을 취재할 수 없는 노릇이라, 안종주는 사진만 찍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안종주는 강희수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안전교육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아뇨.” “이황화탄소가 어떤 물질인지 아십니까? 그 물질에 대해 위험교육을 받은 적이 있나요?“ “입사 20년 동안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럼 어떤 교육을 받았나요?” “일년에 한 번 불조심 교육을 받았습니다.”

1988년 8월, 경기도 남양주군 원진레이온 정문 앞에서 열린 산재노동자들의 규탄 시위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강희수, 정근복, 서용선 등은 인견사를 만드는 원진레이온 공장에서 강제퇴직 당한 노동자였다. 십수 년간 일하면서 공장에서 발생한 신경 독성 물질인 이황화탄소에 중독되었다. 이황화탄소는 호흡기나 피부 접촉을 통해 인체에 유입되면 정신 이상, 뇌경색, 다발성 신경염, 신부전증 등을 일으킨다. 중증마비에 걸린 이들을 회사는 보상 없이 내쫓았다. 감독 당국도 눈감았다.

안종주는 며칠간의 취재 끝에 1986년 이후 원진레이온에서 비슷한 증상을 앓다가 강제퇴직당한 노동자가 12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988년 7월 22일 사회면에 이 사실이 보도되었다.

1988년 7월22일치 한겨레신문에 실린 관련 기사. 원진레이온 문제와 관련한 첫 보도였다.

당시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인견사를 생산하는 원진레이온 공장에서 신경독성 물질인 이황화탄소 중독환자가 잇따라 발생, 말과 몸 움직임이 부자유스러운 중증마비상태에 이르러 회사로부터 강제퇴직당한 사람이 86년 이래 12명이나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중독은 주로 이황화탄소 용액으로 녹인 펄프에서 인조견사를 뽑아내는 방사과에서 발생했는데 퇴직자 중 서용선(46), 한병화(52)씨 등은 팔다리가 완전히 마비되고 말을 못하며 대소변도 못가리는 심한 장애에 빠져 있으며 정근복(49), 정명섭(46)씨 등도 정상적인 사회활동이 어려운 상태다.”

한겨레 기사가 실린 뒤, 노동부가 뒤늦게 진상 조사에 나서고 경영진을 형사처벌했다. 당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진상조사반을 꾸려 조사에 나섰다. 이때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는 원진레이온 산업재해 피해자들은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직후에 버스를 대절해 봉하마을을 찾기도 했다.

원진레이온 산재 피해자들의 집회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처음에는 12명이었던 원진레이온 피해자는 몇 년 뒤에는 수백명으로 늘어났다. 1994년 9월,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판명된 사람이 무려 359명에 이르렀다. 특수건강검진을 받고 있거나 검진 신청을 한 사람만도 400여 명이었다. 그리고 다시 몇 년이 흐른 뒤에 원진레이온 피해자는 최종 1000명 가까이 되는 엄청난 규모로 증가했다.

하지만 직업병이 집단발병한 그 자체로 끝이 아니었다. 1991년 직업병으로 인정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잇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빠가 병에 몇번 시달리다 병 때문에 죽기 때문에 떳떳하다. 아빠가 원진레이온에 다니다가 병이 났다. 그래 마음적으로 원진하고 싸우고, 노동부하고 싸우고 싸워라. 그러면 90세까지 휴업급료 타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1977년 원진레이온에 입사해 8년 동안 일하다가 이황화탄소에 중독된 권경용씨가 1991년 스스로 세상과의 인연을 끊으며 자식들에게 남긴 유서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원진레이온은 1993년 회사를 폐업했다. 1994년에는 이황화탄소를 뿜어내는 방사 기계를 중국에 수출했다. 애초 이 기계는 1961년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다시 한국에서 중국으로, 일종의 공해 수출인 셈이었다.

6년여에 걸쳐 노동계와 보건의료계의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정부를 상대로 산재 보상금을 받기 위한 싸움을 벌였다. 1993년 11월, 비영리 공익법인인 원진재단이 설립된 데 이어 전문치료기관인 녹색병원이 설립되었다.

직업병의 위험에 방치된 노동자의 권리를 환기시킨 한겨레의 특종 보도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직업병의 위험성을 깨닫게 되었다. 직업병을 떠올리면 광산 노동자의 진폐증을 떠올리던 것에서 한걸음 나아가, 직업병이 도시 노동자의 일상 곳곳에도 침투해있음을 알아차렸다. 노동계가 추천한 전문가가 참여하는 직업병판정위원회 설립, 직업병 인정기준 변경 등의 제도 변화도 이끌어냈다.

2013년에도 그렇게 한 사람이 동료들 곁을 떠났다. 우울증과 불면증이 심해서 잠을 못 잔다고 평소에 토로했던 이였다. (▶’문송면의 죽음, 그뒤 25년-원진레이온의 자살행렬은 끝나지 않았다)

2013년 6월29일치 한겨레에서는 문송면과 원진레이온의 죽음 25년 뒤를 맞아, 1988년 원진레이온 보도의 의미를 되새겼다. 한겨레 자료사진

2018년은 한겨레 창간 30주년이기도 하지만, 원진레이온 산재 사건이 처음으로 알려진 지 3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원진레이온 사건에 앞서 1988년 7월2일에는 열다섯살 소년이 짧은 삶을 마감했다. 15살 문송면은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현장실습’ 명목으로 온도계 제조 공장에서 일했다. 시너로 물건을 닦고, 온도계에 수은을 주입하는 것이 그가 맡은 업무였다. 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문송면은 몸이 쑤시고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했다. 이듬해 3월에는 병원에 입원했다. 급성 수은 중독이었다.

3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또 다른 문송면, 또 다른 원진레이온 산재피해자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한다. 2017년 11월 제주도에서 문송면과 똑같이 ’현장실습’을 나갔다가 안타까운 사고로 목숨을 잃은 18살 이민호군, 휴대전화 부품 공장에서 일하다가 메탄올에 노출되어 실명한 20대 노동자들, 300명이 넘는 산재피해자들이 직업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문제…

3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원진레이온과 문송면이라는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까닭이다.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시민건강연구소 소장)는 5월31일치 <한겨레>칼럼에 ’문송면을 불러내야 하는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칼럼 바로보기)

“딱 30년 전 이맘때는 문송면과 그의 병이 ‘사회화’되던 시기다. 회사와 노동부가 산재 인정을 거부하는 사이 노동자, 의료인, <한겨레>를 비롯한 언론이 사건을 알렸고 사회운동을 조직했다. 노동부는 사회문제가 되고 여론이 나빠진 후에 뒤늦게 산재로 인정했지만 이미 늦었다. 보름도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으니 돌이킬 수 없었다. 그 죽음을 기억하자고 얼마 전 ‘문송면·원진노동자 산재사망 30주기 추모조직위원회’가 발족했다. …문송면과 원진노동자의 죽음이 모양만 바꿔 되풀이되고 지속되는 탓이니, 지금도 스러지고 상하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문송면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자의 의무는 일하는 사람의 건강을 어떻게 보호할지, 위험을 어떻게 통제할지 묻는 것이다.”

16일 오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린 '문송면·원진노동자 산재사망 30주기 추모조직위원회 발족 기자회견'에서 박민호 원진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 대표가 발언을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한겨레 창간 30돌을 맞아, 한국사회를 바꾸는 데 기여한 특종이나 기획 기사의 뒷이야기를 <창간 30년, 한겨레 보도>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이 글은 디지털 역사관인 '한겨레 아카이브'에 소개된 내용의 일부입니다. 한겨레의 살아 숨쉬는 역사가 궁금하시다면, 한겨레 아카이브 페이지(www.hani.co.kr/arti/archives)를 찾아주세요. 한겨레 30년사 편찬팀 achiv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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