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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 뇌와 면역계 사이에 우리가 몰랐던 `제2의 혈관`이 있었다

원호섭 기자
입력 : 
2018-06-05 04:01:04
수정 : 
2018-06-05 11: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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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 핵심역할 수행 `림프관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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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5년 외과의사 지망생들을 위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요제프 2세는 '요제피늄(Josephinum) 아카데미'를 만들었다. 근대 의학의 산실로도 불리는 이곳은 현재 의학박물관으로 남아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의학용 밀랍인형을 보유하고 있다. 요제프 2세는 15~18세기 사이 만들어진 의학 관련 도서는 물론 1200여 개에 달하는 인간 해부 모델을 수집해 아카데미에 기증했다. 200여 년 전 의학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은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의사들은 인간의 정맥과 동맥을 포함한 혈관을 비롯해 신체 장기, 뼈 등이 상세하게 묘사돼 있는 밀랍인형을 만들어 보관했다. 200여 년 전 만들어진 밀랍인형의 뇌에는 특이한 '관'이 존재한다. 모세혈관 밑에 존재하는 '림프관'이다. 과거 의사들은 인간의 뇌에도 림프관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후 200여 년이 넘도록 뇌에서 림프관이 발견되지 않았다. 과학자·의사들은 200여 년 전 만들어진 밀랍인형의 뇌에 있는 림프관을 무시했고, 의학 교과서에는 "뇌에는 림프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기술됐다.

2015년 미국 버지니아의대와 핀란드 헬싱키의대 연구진이 쥐의 뇌를 관찰하던 중 두개골 밑 뇌수막에서 지금까지 관찰된 적이 없었던 미세한 관을 발견했다. 림프관이었다. 연구는 학술지 '네이처'와 '실험의학저널'에 동시에 게재됐다. 연구를 이끈 킵니스 버지니아의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 연구 결과를 받았을 때 딱 한마디를 했다. 교과서를 바꿔야겠군."

새롭게 주목받는 제2의 혈관 '림프관' 림프관은 고대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를 비롯해 중세 과학자들 역시 존재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혈액을 직접 나르는 혈관에 가려져 현미경이 개발된 뒤에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최근 림프관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면서 중요성이 점차 부각되고 있다.

심장에서 나온 혈액은 대동맥을 지나 모세혈관으로 내달린다. 모세혈관은 신체 각 장기와 연결되어 있다. 혈액으로 가득 찬 모세혈관은 신체 곳곳에 영양분을 비롯한 산소 등을 전달해 우리 몸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때 혈액 중 일부가 물질 교환을 하는 과정에서 새어 나간다. 주변 세포 사이로 흘러 들어간 이 액체를 '세포간질액'이라고 부른다. 세포간질액은 세포에 영양소를 공급하고 세포가 만들어낸 부산물을 수거한다. 임무가 끝난 세포간질액은 다시 혈관으로 돌아간다.

문제는 처음 혈관을 빠져나왔던 혈액 전부가 회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아 있는 세포간질액을 림프관이 해결한다. 세포 사이사이에 뻗어 있는 가느다란 림프관은 혈관이 미처 흡수하지 못한 액체, 즉 노폐물과 바이러스, 백혈구 등으로 이뤄진 물질을 흡수한다. 이 액체가 바로 림프액이다.

고규영 기초과학연구원(IBS) 혈관연구단장은 "체내 장기 및 조직의 모세혈관에서 빠져나온 조직액을 수거해 다시 혈관 내로 되돌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 림프관"이라고 설명했다. 과거에는 림프관이 면역세포나 노폐물 등을 전달하는 수동적인 '관'으로만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고규영 단장과 타티아나 페트로바 스위스 로잔대 교수 공동 연구진은 최근 국제학술지 '실험의학저널'에 최신 림프계 연구를 총망라한 '리뷰 논문'을 발표했다.

뇌에는 림프관이 없을까. 2015년 뇌 속 림프관 첫 발견 뇌에는 림프계가 없다고 믿었던 만큼, 뇌 세포에 존재하는 노폐물이 배출되는 또 다른 메커니즘이 존재해야 했다. 2012년 미국 로체스터대의대 연구진은 쥐의 뇌에서 림프관 역할을 하는 '글림프 시스템'을 발견했다고 학술지 '사이언스 중개의학'에 발표했다.

림프관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글림프 시스템은 깨어 있는 동안 발생하는 뇌 안의 각종 노폐물을 포함한 뇌척수액을 뇌정맥으로 보내고 이를 전신 혈액순환으로 보낸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갖기 위해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뇌에 있는 림프관이 밝혀진 것은 2015년이었다. 2015년 7월 버지니아대 연구진은 학술지 '네이처'에 쥐 뇌 경막에 존재하는 림프관을 찾았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뇌 중추신경계에 존재하는 면역세포를 찾아냈고, 어떻게 이 면역세포들이 뇌에서 활동하는지를 추적했다. 그 결과 정맥 옆에 림프관이 존재했으며 이를 따라 뇌척수액과 면역세포가 운반되는 것을 확인했다. 뇌의 림프관은 목에 있는 림프관과 연결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글림프 시스템이 먼저 작동하고, 이후 림프관으로 물질이 이동한다고 설명했다.

이후 미국립보건원(NIH)과 버지니아대 공동 연구진은 2017년 학술지 '이라이프'에 자기공명영상장치(MRI)를 이용해 인간과 원숭이의 뇌에 존재하는 림프관을 찾았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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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프관, 알츠하이머 치매·녹내장 등에 영향 뇌에 존재하는 림프관이 중요한 이유는 알츠하이머 치매를 일으키는 물질인 '베타아밀로이드'가 배출되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고규영 단장은 "파킨슨병이나 알츠하이머 치매와 같은 퇴행성 신경질환 환자 수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뇌 림프관을 통한 축척된 베타아밀로이드를 효율적으로 배출시키는 방법 개발은 새로운 치료법으로 큰 기대를 걸고 있다"며 "뇌종양, 뇌손상, 뇌진탕 등이 뇌 림프관 순환장애와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눈에 존재하는 림프관은 녹내장 질환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눈에 존재하는 '실렘관(Schlemm's Canal)'은 각막을 둘러싸고 있으면서 '방수'를 배출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2014년 KAIST와 헬싱키의대 등의 연구에 따르면 실렘관은 기능적으로 림프관과 유사한 것으로 조사됐다. 실렘관의 기능이 망가지면 방수 배출이 지연되고 안압이 상승해 결국 녹내장이 유발된다.

특히 녹내장 환자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원발성 개방각 녹내장'은 실렘관의 기능에 이상이 발생했을 때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IBS 혈관연구단이 2017년 학술지 '임상연구 저널'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실렘관의 기능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신호전달체계를 조절하면 안압이 내려가 녹내장 발병을 차단할 수 있다. 현재 연구진은 논문 내용을 토대로 임상시험 가능 여부를 연구하고 있다.

우리 몸의 소화기관인 '소장'은 영양분을 흡수한다. 이때 소장 내부에 있는 '융모'가 큰 역할을 한다. 융모에는 영양소를 분해하는 효소가 묻어 있다. 영양소가 소장에 들어오면 융모에 달라붙은 뒤 포도당과 아미노산 등 생명 유지에 필요한 영양분으로 분해된다.

소장에 있는 림프관은 면역세포와 노폐물을 운반하는 기능 외에 식이지방을 흡수하고 이동시키는 중요한 기능까지 갖고 있다. '암죽관'이라 불리는 소장의 림프관은 융모에 있는 물질을 흡수해 전체 혈액순환계로 전달한다. 2015년 학술지 '네이처 리뷰 약물 전달'에 게재된 호주 모나시대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먹는 약물 또한 암죽관을 통해서 체내로 전달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장의 림프관인 암죽관은 이처럼 인간이 정상적인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체내 영양분을 흡수하는 전달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암 전이 과정 막을 수 있는 해법도 림프관에서 찾아 면역체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림프절은 최근 암 전이 과정 연구에서 특히 주목하고 있는 기관이다.

인류는 오랜 기간 숙적인 암과 싸워 왔지만 암세포를 무력하게 만드는 뾰족한 방법을 개발하지 못했다. 최근 면역세포를 자극해 암세포를 공격하게 만드는 등 면역 치료법이 주목받고 있지만 림프 전이 이후 암의 경우 내성이 생겨 치료 효과가 떨어지기도 한다. 암 전이를 막고자 림프를 제거할 경우 생기는 부작용도 무시할 수 없다. 유방암 말기 치료와 전이 방지를 위해 불가피하게 림프를 절제하면 암 주변 림프관과 림프절에서 심각한 2차 림프 부종과 후유증이 동반되기도 한다.

림프절을 통한 암 전이를 연구하는 IBS 혈관 연구단 이충근 연구원은 "림프절은 다른 장기로부터 선천성 면역세포와 항원을 수송하면서 면역 반응을 조절하는 역동적인 기관"이라며 "암세포가 림프절을 통해 전이될 경우 림프절 내 면역체계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뤄진다면 암 전이 과정에 대한 보다 자세한 메커니즘을 파악해 효과적인 치료법 마련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림프관은 해부학적으로 기저막이 없어 림프절로 암 전이가 폐나 간 같은 장기로의 혈액을 통한 전이보다 더 앞선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비한 상태"라며 "일반적으로 말기 암 환자의 경우 종양 전이로 인해 사망에 이르기 때문에 림프관을 통한 전이에 관한 연구가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피부는 상처로 인한 병원균의 침입을 포함해 외부 환경으로부터 우리 몸을 지키는 첫 번째 방어 기관이다. 피부 윗부분인 '상피층'에는 혈관이 없지만 보다 깊숙한 곳에 있는 '진피층'에는 혈관과 림프관이 풍부하다.

진피층에 있는 림프관은 병원체와 면역세포를 '림프절'로 보내는 통로 역할을 한다. 그물망처럼 퍼져 있는 림프관이 합류하는 지점에는 림프절이라는 콩 모양의 소기관이 있다. 온 몸에 500여 개가 존재하는데 크기는 1~20㎜로 위치에 따라 다르다. 주로 목이나 겨드랑이, 넓적다리 윗부분 등에 집중돼 있다. 림프절은 혈관으로부터 T림프구와 B림프구와 같은 면역세포를 공급받는다.

이 면역세포는 림프절에 대기하고 있다가 병원체들이 림프액에 붙잡혀 끌려오면 파괴한다. 센 녀석들이 침입할 경우 림프절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그 결과 림프절이 있는 귀 밑이나 겨드랑이 등이 퉁퉁 붓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피부에 있는 림프관은 우리 몸의 문지기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림프관은 전통적으로 세포가 흐르는 수동적인 '도관'으로 여겨졌지만 림프관의 기능과 새로운 구조, 기원의 발견 등이 더해지면서 관점에 중대한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

고규영 단장은 전에는 "새로운 연구를 통해 림프관은 더 이상 수동적 하수도가 아닌 능동적으로 신체를 조절하는 중요한 통로기관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그는 "림프관은 우리 몸을 조절하고 각종 장기마다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림프관에 대한 연구가 쌓일수록 인류가 알지 못했던 질병 발병 과정 및 새로운 치료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원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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