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없다" 절망..임산부조차 손목 긋는 가자지구

황수연 2018. 6. 3.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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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해공 막힌 채 일상 무너져, 생존투쟁 나서는 청년들
또 다시 시계제로.."싸움 멈추는 것만이 싸움 끝내"


[이슈추적]“살아도 죽은 것” 11년째 ‘생지옥’ 가자지구의 눈물

가자지구 자빌리아 난민촌에 사는 26살의 아흐메드 아부 타윌은 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했지만, 직업이 없다. 둘 있는 누나들의 사정도 같다. 8명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아버지는 공무원인데 월급을 절반만 받는다. 정부 재정 상황 탓이다. 목ㆍ금요일마다 열리는 시위에 참여하는 타윌은 “시위는 삶을 바꿀 최선의 기회”라고 말한다.

“전기가 끊기지 않는 집을 꿈꿨다.”
얼마 전 시위에서 목숨을 잃은 아흐메드 마디(23)의 어린 조카 이야기다. 마디는 조카가 배구팀과 함께 가자지구 밖으로 여행하는 게 가장 큰 꿈인 평범한 청소년이었다고 기억한다. “‘사람다운 삶(decent life)’을 보장해 줄 일자리와 집을 바란다. 기본 권리가 이뤄지는 게 꿈이 되는 것이 가자지구의 현실”이라는 마디도 조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시위에 참여했다 목숨을 잃은 아흐메드 마디(23)의 조카 후세인 마디(15)가 죽기 하루 전 모습. [사진 MME 캡처]
타윌과 마디는 가자지구에서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총을 든 이스라엘군에 사실상 맨몸으로 맞서는 팔레스타인인 중에는 이처럼 ‘살아도 죽은 것 같은’ 삶을 견디지 못해 뛰쳐나온 청년층이 많다는 게 영미권 주요 외신의 분석이다.
아드난 아부 하스나 유엔 팔레스타인난민기구(UNRWA) 대변인도 “가자지구에 내일은 없다. 가자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은 정치뿐 아니라 삶과 꿈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이 기름을 붓긴 했지만 “테러조직 하마스가 조직하고 조정하며 감독한 행위”라고 규정짓는 이스라엘 정부의 말과 다르게 자발적 생존투쟁의 성격이 짙다는 것이다.
가자지구 거리 벽면에 그려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모습. [EPA=연합뉴스]


“일자리도, 돈도, 희망도 없다”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 감옥을 지키는 간수는 이스라엘.”
가자지구 지도. [중앙일보]
노르웨이 난민위원회(NCR)는 가자지구를 이렇게 표현한다. 길이 40㎞, 폭 10㎞ 작은 띠 모양의 가자지구에는 200만명이 11년째 사실상 고립돼 있기 때문이다. 2007년 하마스가 실권을 잡은 뒤로 이스라엘이 인적, 물적 교류를 통제하는 봉쇄정책을 시작하면서다. 동쪽과 북쪽은 이스라엘이 설치한 8m 높이의 장벽이 가로막고, 남쪽은 이집트 국경과 맞닿아 있다. 지중해와 접한 서쪽도 이스라엘군이 조업을 금하며 출로가 막힌 상태다. 최근 라마단을 맞아 이집트가 출입문을 전면 개방했지만, 이스라엘 쪽으로는 철저한 출입 통제가 이뤄지고 있다.
이스라엘과 맞닿아 있는 국경 근처에서 가자지구 주민들이 시위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가자지구의 일상은 무너진 지 오래다. 중동 매체 미들이스트아이(MEE)는 “일자리도, 리더도, 희망도 없다: 왜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은 항복을 거부하나’란 제목의 기사에서 전기나 일자리 없이 “사람들의 삶 절반은 포위됐다”고 진단했다. 유엔은 봉쇄조치가 완화되지 않으면 2020년 이전에 “사람이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NCR에 따르면 가자인 84%는 구호 물품에 의존한다. 지하수 98%는 오염돼 식수가 부족하고, 하루 2~4시간 이상 전기를 쓸 수 없다. NCR은 “매일 최대 22시간 동안의 단전을 겪는다”고 전한다. 어린이들은 영양실조로 발육 부진을 겪고, 30만명은 잦은 전쟁으로 인해 심리적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다.
가자지구 난민촌 이발소에서 전기가 끊겨 촛불을 켠 채 머리를 자르는 모습. [EPA=연합뉴스]
의료시설이 취약해 가자지구 밖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허가가 나지 않아 결국 치료 시기를 놓치고 사망하는 경우도 많다. 이스라엘은 엑스레이 같은 진단용 장비조차 군사용으로 사용될 수 있다며 수입을 막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1800달러대로 최빈국 북한과 별반 다르지 않다. 42%는 실업 상태다. 15~29세 청년층의 실업률은 62%까지 치솟는다. 시위에 참여하는 사베르 알 게림(22)은 뉴욕타임스(NYT)에 “나는 테러리스트도, 자유의 전사도 아니다”라며 “가족의 빚이 숨통을 막고 있다. 삶이나 죽음이나 똑같다”고 말한다.

가디언은 “자유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도, 상황이 바뀔 것이란 어떤 신호도 없다”고 했다. NYT는 “구호의 희망 없이 10년 넘게 이어진 절망과 박탈감은 수천 명의 젊은 가자인들이 시위에 뛰어들게 만들었다”고 전했다.
시위에 나섰다 부상을 입은 청년들이 목발을 짚고 걸어가고 있다.[EPA=연합뉴스]
무슬림에서 죄악으로 여기는 자살도 전례없이 늘고 있다. 2016년에는 자살자가 전년의 3배에 달했다. 최근엔 20대 청년이 임신한 아내를 두고 생활고를 비관하며 분신자살했다. 7개월 차 임산부가 손목을 긋는 일도 있다. 가디언은 정신과 교수들의 말을 인용해 “점령은 계속되는 전쟁보다 정신, 육체적 건강에 훨씬 해롭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이-팔 분쟁은 멈추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놓인 민간인을 공격하는 이스라엘이 국가적 ‘전쟁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비난이 거세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가자 봉쇄’에 집착하는 이유는 팔레스타인인들 상당수가 과격 무장단체 하마스와 직간접 연관을 맺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무장 투쟁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을 위협하는 하마스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부장 사리 바시는 포린폴리시 기고문에서 “이스라엘 정부는 모든 시위대를 하마스의 요원으로 취급하고 치명적인 무력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하마스의 가자지구 통제는 이스라엘에 안보 위협이 될 수 있지만, 민간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법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시위를 벌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EPA=연합뉴스]
평화적 해법이 멈춰 서있는 것도 문제다. 국제사회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적 공존을 위한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을 근간으로 하는 오슬로 협정을 끌어냈지만, 지금은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결국 양측 모두 상대를 무력으로 몰아붙여야 한다는 강경파의 목소리만 득세하고 있는 실정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싸움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싸움을 멈추는 것뿐”이라며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파괴하기 위해 무장 투쟁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만약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목을 조르는 것을 멈추길 원한다면, 팔레스타인인들부터 먼저 이스라엘이 안전하다는 점을 입증해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스라엘군의 실탄 사격에 피해 달아나는 팔레스타인 시위대.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등장 이후 미국의 노골적인 이스라엘 편들기도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
NYT의 칼럼니스트 토마스 프리드만은 “트럼프와 미국 의회가 네타냐후(이스라엘 총리)에게 자유 권한을 주면서 비비(네타냐후의 별명)는 자신이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네타냐후가 왜 평화를 위한 양보를 할까”라고 꼬집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방치 속에 ‘가자의 피눈물’은 마르지 않고 있다.
황수연 기자 ppangsh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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