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이젠 안녕" 고려대 터줏대감 중국집 설성반점 31년만에 폐업

2018. 6. 2.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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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 배달·공짜 군만두'로 명성..주인 김태영씨, 교통사고 후 운영난 가속
고려대 명물 중국집 31년 만에 폐업 (서울=연합뉴스) 현혜란 기자 = 서울 성북구 고려대 정경대학 후문 옆 중국집 '설성번개반점'을 1987년부터 운영해 온 김태영(84)씨가 폐업 전날인 지난달 31일 가게 안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2018.6.2

(서울=연합뉴스) 현혜란 기자 = "돈이 없을 땐 음식을 공짜로 주셨어요. 값이 싼 짜장면만 시켜도 군만두를 꼭 넣어주시더라고요, 젊은 사람들이 배고플 거라면서…. 지방에서 올라와 돈도 없고 정에 굶주렸던 저 같은 고대생들한테 잔잔한 위로를 주는 곳이었는데 이제 없어진다니 가슴이 먹먹하네요."

서울 성북구 고려대 안암캠퍼스 정경대학 후문 옆을 30년 넘게 지켜온 중국집 '설성번개반점'이 이달 1일 문을 닫았다는 소식에 직장인 박모(30)씨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설성에 애틋한 추억이 어려있는 고대 졸업생은 박씨 뿐만이 아니다. 가게 앞에 폐업을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리자 졸업생들은 카카오톡 등 온라인 메신저 단체대화방에 이를 알리며 헛헛한 마음을 공유했다.

페이스북 '고려대학교 대나무숲'에 올라온 설성을 추억하는 글에는 '막상 식사하러 가면 그저 그랬는데 중앙광장, 과방에서 시켜먹으면 뭐가 그렇게 맛있던지', '안암에서 처음 고량주와 짜장면 먹었던 설성 안녕' 등 댓글이 줄지어 달렸다.

아쉬운 마음은 재학생도 마찬가지였다. 폐업 전날 가게를 찾은 최모(21)씨는 "수업과 수업 사이 1시간밖에 여유가 없을 때면 자주 시켜먹곤 했는데 내일부터 문을 닫는다고 해서 아쉬운 마음에 직접 와봤다"고 말했다.

'이별의 인사를 드립니다' (서울=연합뉴스) 현혜란 기자 = 서울 성북구 고려대 안암캠퍼스 정경대학 후문 옆을 31년간 지켜온 중국집 '설성번개반점'이 가게 입구에 이달 1일 자로 문을 닫는다는 현수막을 내걸어놨다. 2018.6.2

설성은 무엇보다 신속 배달로 유명했다. 주문을 취소할 틈도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번개'라 불린 배달원 조태훈씨가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고려대 명예 강사로 위촉되고 전국 순회강연을 다닐 정도로 일약 스타가 됐다. 하지만 2003년 옛 직장동료 이름을 10년간 훔쳐 쓴 것이 들통나 대학가를 술렁이게 했다.

이처럼 고대 명물로 자리 잡은 중국집이 문을 닫는 이유는 사장 김태영(84)씨가 올해 두 차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운영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매일 오전 6시 오토바이를 타고 경동시장에 가서 식자재를 직접 사 오던 그는 사고 이후 몇 달째 배달에 의존해 식자재를 사야만 했다.

김씨에게 30년 넘게 지켜온 가게를 정리하는 마음을 묻자 한참을 생각하더니 휴지를 꺼내 눈물을 훔쳤다. 자신이 인생 절반 가까이 몸담았던 설성이기에 특별할 수밖에 없는 곳이라고 했다.

"여기서 번 돈으로 집도 사고, 우리 가족을 먹여 살렸어. 모든 열정을 쏟아부은 곳이야. 죽기 직전까지 가게를 운영하고 싶었는데 교통사고 때문에 중도에 하차하는 기분이라 아주 섭섭하지."

설성은 1987년 문을 열었다. 큰 규모의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김씨는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생각에 고대 후문 옆에 자리를 잡았다. '맹모삼천지교'의 마음으로, 두 아들이 명문사학에 진학했으면 하는 바람에 안암동을 택했다고 한다.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경찰에 쫓기는 학생들이 하루가 멀다고 헐레벌떡 가게로 들어왔고 그때마다 김씨는 학생들을 뒷문으로 안내했다. 사복 경찰이 뒤따라오면 "남의 장사 방해하지 말고 어서 나가라"고 화를 내며 내쫓았다고 회상했다.

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동아리 학생들이 단체 주문을 하면 고생하는 데 한 끼 든든히 먹으라며 무료로 보내주기 일쑤였고, 지갑을 깜빡한 채 찾아온 학생에게는 돈을 받지 않았다.

안녕, 추억의 '설성' (서울=연합뉴스) 현혜란 기자 = 서울 성북구 고려대 안암캠퍼스 정경대학 후문 옆을 30년 넘게 지켜온 중국집 '설성번개반점'이 폐업하기 하루 전인 지난달 31일의 모습. 2018.6.2

가격을 올리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쓴 것도, 최대한 음식을 빨리 배달하려 한 것도 모두 학생들을 위해서였다. 돈이 없는 학생들이 공부하느라 바쁠 텐데 음식 기다리는 시간이라도 아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김씨는 학생들이 있기에 설성이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그만큼 베풀고 싶었다며 웃었다. 은퇴하고 나서는 젊은 학생들이 아니라, 자신의 또래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아볼 계획이라고 전했다.

"몇 개월 요양하고 몸이 회복되면 나 같은 노인네들이 많이 모이는 동네에 가서 칼국수를 만들어 싼 가격에 팔려고 해. 어깨너머로 배운 실력으로 국수는 삶을 수 있거든. 노인네한테 점심 한 끼라도 배불리 싼 값에 먹이고 싶어."

run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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