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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백성을 착취하려고 존재한 악귀, 조선시대 아전 집단

배한철 기자
입력 : 
2018-06-02 06: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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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사 공덕비. 많은 수령들이 공덕비를 세우는데 혈안이 되면서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했다.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44] 1636년(인조 14) 발발한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멸망할 때까지 큰 전쟁을 겪지 않았다. 만일 이 땅에 또다시 적이 쳐들어왔다면 앞선 전쟁들을 교훈 삼아 성공적으로 막아냈을까.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그의 대표작 '목민심서'에서 조선군의 실태를 고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군대 편성을 언급하는 것은 벌써 이름뿐이고 쌀이나 베를 거두어 들이는 게 실제의 목적이다. 지금과 같은 정세에서 새삼스럽게 대와 오를 바로잡는다고 하여 허위의 기록을 조사하고 도망간 자, 늙은이, 죽은 자를 밝혀내어 군정을 정돈한다고 하면 또다시 아전의 농간이 따르게 마련이므로 현명한 수령은 이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 ~ 백년 묵은 옛 칼은 자루는 있으나 날이 없고 삼대를 내려오는 깨진 총은 불을 질러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정약용은 그러면서 "조선의 군대는 있으나 마나한 조직이니 행여나 (일선 군대를 관장하는) 수령이 이를 고쳐보려고 할 생각도 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오히려 그러다가 백성들만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1818년(순조 18)에 완성된 목민심서는 지방 수령의 자세, 정책 등 목민관이 지켜야 할 지침을 제시한다. 농민의 생활 실태, 서리·토호의 부정 등 조선후기 지방의 실정도 폭로한다. 그가 살던 시대 아전들의 횡포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다. 정약용은 아전들을 모든 폐단의 근원으로 보고 수령이 그들을 엄히 단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을 백성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온갖 폐단과 갖은 간사하고 악랄한 행위는 모두 아전의 농간에서 생긴다. 아전들의 이런 악행과 간계를 단속하지 않고 고을을 잘 다스릴 수는 없다. 그러나 아전을 단속하려면 수령 자신이 먼저 공명 정대하고 청렴 결백한 몸가짐을 한 뒤라야 가능하다. ~ 수령이 (뇌물) 하나를 맛보면 아전은 그 백을 먹게 마련인 것이다."

그들이 백성들을 고혈을 짜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집단으로 인식될 만큼 착취의 형태는 실로 다양했다. "농간은 천 가지 만 가지로 이루 다 셀 수 없으나 그 명칭은 대략 열두 가지가 있다. 반작(反作·환곡을 봄에 나눠줄 때와 가을에 거두어들일 때에 주지 않고도 주었다고 하고 회수하고도 회수하지 않았다고 하며 중간에 이득을 나눔), 입본(立本·일년 중 농사 상황과 곡식 시세를 살펴서 돈과 곡식 간의 교환을 통해 이득을 챙김), 가집(加執·상급 부서에서 지시한 것보다 더 많은 곡식을 방출하고 거기에서 남는 것은 횡령), 암류(暗留·환곡을 제때에 대출하지 않고 창고에 쌓아 두었다가 값이 오르면 팔고 내리면 사들임), 반백(半白·농민을 속여 대출 때 곡식의 절반을 가로채고 갚을 때는 모두 갚게 함), 분석(分石·창고에 있는 곡식에 돌, 쭉정이를 섞어 분량을 늘려 횡령), 집신(執新·묵은 곡식은 나눠주고 햇곡식은 자기들이 가짐), 탄정(呑亭·흉년이 들면 정부에서 환곡의 수량을 감해주는데 백성들에게는 환곡을 전량 징수해놓고 감액만큼 착복), 세전(稅轉·환곡으로 받은 곡식과 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이리저리 돌려 이익을 남김), 요합(遙合·민간이 부역 대신 곡식으로 납부할 때 우수리 쌀을 횡령), 사흔(私混·아전들이 환곡을 징수하면서 자기들의 사례비를 같이 징수), 채륵(債勒·아전이 개인 채무까지 환곡과 혼합해 착복)이 그것이다."

아전의 발호는 전적으로 수령의 책임이다. 대개 아전과 결탁해 제 주머니를 먼저 채우는 수령이 부지기수였다. 아전들의 행태를 그저 방관하기도 했다. 시와 문, 글씨에 뛰어나 3절로 불렸고 성종이 친구라고 칭하며 크게 아꼈던 유호인은 시나 읊고 바둑이나 두면서 아전들에게 정사를 맡겼다. "성종 때 뇌계 유호인이 부모 봉양할 것을 청하여 산음현감이 됐다. 경상관찰사가 새로 임명돼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할 때 성종은 '내 친구 유효인이 산음현감으로 있으니 경은 잘 돌봐주도록 하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유호인은 백성을 다스리는 데 소홀히 하고 시 짓는 일만 계속하므로 감사가 그를 쫓아내 버렸다."

중앙에서도 외관직으로 지방에 내려가면 한몫 단단히 챙기는 것으로 인식했다. 사령을 받은 지방관이 지방으로 떠날 때 대궐 내에서 돈을 갈취하는 무리가 많았다. "대궐 안의 잡배들인 대전별감, 승정원사령들이 예전(例錢·전례에 따라 받는 돈)을 내라고 하는데 많게는 수백 냥, 적어도 50~60냥은 뜯어낸다.~ 잡배들이 떼를 지어 욕을 하고 옷을 잡아당기는 등 욕을 보이는 자까지 있으니 이는 큰 악풍이다. ~ 신임 수령의 주위에서도 '부유한 고을을 손에 넣었으니 백성들의 고혈을 먹을 터인데 어찌 돈을 쓰지 않느냐' 하고 ~ 이렇게 나온 돈은 수령 자신의 것을 쥐어짤 리는 만무하고 백성들에게 받아낼 것이 너무도 명백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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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김홍도 필 평안감사향연도(부분). 대동강에서 평안감사(관찰사)가 연 잔치의 모습을 담고있다. 대동강 위에 평안감사가 탄 배를 중심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악대 등 관선과 관기들이 탄 배, 음식을 준비하는 배, 사대부나 아전이 탄 배가 늘어서 있다. 지방수령 중 최고위직인 감사의 위세를 잘 보여준다. 정약용은 목민관이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목민관이라면 재난에서 백성을 구하고 실의에 빠진 그들을 위로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 김희채(1744∼1802)가 황해도 장연현감이 됐을 때 홍수로 구월산이 무너져 30리가 덮였다. 죽은 사람과 농작물 피해를 계산하기조차 힘들었다. "희채가 (현장에) 나가보자 백성들이 통곡했다. 희채가 말에서 내려 백성들의 손을 잡고 같이 울었다. 백성들이 감격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했다."

늦게까지 결혼 못한 남녀를 엮어주는 것도 선정의 하나이다. 조정에서는 혼인이 늦어지면 혼례품을 지급하면서 혼례를 독려했다. "정종 15년에 백성들이 가난하여 혼인의 때를 놓치는 것을 딱히 여기고 혼기가 지난 자가 혼인을 하면 관청에서 홍례비로 돈 500, 베 2필을 주게했으며 매월 상황을 보고하게 했다. ~ 남자 25세, 여자 20세 이상의 자를 골라서 ~ 이웃의 유력한 자를 시켜 중매하게 하고 관에서 약간의 돈과 포복을 주어 돕는다. ~ 홀아비와 과부를 중매하여 짝지어주는 것도 또한 선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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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광통교. 조선시대에 불륜 등으로 원치않은 아이를 출산한 여인들이 청계천에 영아를 종종 버렸다.
흉년이 되면 입하나 덜기 위해 어린아이를 버리기 일쑤였다. 원치 않은 아이를 낳았을 때 청계천에 유기하는 일도 있었다. "임몽득이 평창에 있을때 홍수가 일자 ~ 버려진 아이를 기른자에게 상을 주고 상평창의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이로 인해 구제받은 아이가 3800명이나 되었다. ~ 서울의 개천에는 간혹 버려진 아이가 있다. 그것은 간음으로 인해서 낳은 아이가 많다. ~ 백성이 거두어 기르게 하고 아들이나 딸을 삼는 것을 허락해야 한다."

죄수도 인권은 있는 법이다. "나무칼을 목에 씌우는 법은 후세에 생긴 것이고 선왕의 법은 아니다. 나무칼이란 옥졸을 위한 것이다. 나무칼을 씌워놓으면 쳐다볼 수도, 굽어볼 수도, 숨을 쉴 수도 없다. 한 시각도 사람이 견딜 수 없다. 죽이면 죽일지언정 나무칼을 씌우는 일은 옳지 않다."

관내 사당의 제사도 수령의 임무 중 하나였고 비를 오게 해달라고 지내는 기우제도 수령의 몫이었다. "시중에서 양이나 돼지를 사다가 희생으로 써서는 안 된다. 미리 목전(牧田·국영목장)에서 길러서 살찌고 병이 없게 해야 한다. ~ 요새 수령들이 짚으로 용을 만들어 애들에게 끌고다니게 하면서 매질하고 욕보이고 주문을 외워 비를 빌고 있다. 이것은 아주 예에 어긋나는 일이다."

풍수설을 맹신했던 조선시대에 묘지를 둘러싼 분쟁이 빈발했다. "묘지에 관한 송사는 지금 폐해 있는 풍속이 되었다. 구타, 살인 사건의 절반이 이로 인해 일어난다. 남의 묘지를 파버리는 변고를 저지르는 행위를 효행이라고 생각한다. ~ 장사를 지내고 나면 자리가 나쁘다고 해서 세 번, 네 번 개장하는 동안에 자리 때문에 송사가 생겨 마침내는 원수가 되고 마니 어리석은 일이다."

권력자들은 남의 묘를 강제로 뺏었다. "참의 홍혼이 양주목사로 있을 때 후궁의 친족이 권세를 업고 함부로 고을의 아무 데나 묘를 썼다. 홍혼이 법에 따라 묘를 파내버렸다. 관찰사가 이를 듣고 놀라고 주위에서 모두 몸을 떨었다."

목민관은 성을 쌓아 국방에 힘써야 한다. 정약용은 토성보다 흙으로 만든 석성이 우수하다고 평가했다. "변란을 당하여 적을 방어하는 데는 토성만 한 것이 없다. 흙을 반죽하여 공이로 찧어가며 쌓는 것을 축이라고 하고 돌을 포개어 쌓은 것을 체라고 하며, ~ 옛날에는 축성이라면 토성을 말함이며 그것을 제일로 쳤다."

정약용은 애주가는 아니었던듯 쌀을 낭비하는 술이 금지해야 한다는 견해를 폈다. "양곡을 소모하는 것 중에 술보다 더한 것은 없다. ~ 술과 단술에 쓰이는 양곡은 흉년 때엔 긴요한 것이니 음탕과 주정을 낳는 술을 금해야 할 것이다."

정약용의 시대에는 외국 선박이 우리나라 해변에 자주 표류했다. 하멜은 우리나라에 14년 동안 있었지만 조정은 그들의 선진 문화를 배우려 하지 않았고 하멜 일행을 박대해 유럽에 우리나라가 알려지는 것을 더디게 했다. 정약용은 달랐다. "표류 선박 안의 문서는 모두 베껴서 보고해야 한다. ~ 표류 선박을 조사할 때는 배의 구조, 크고 작고 넓고 협소함과 사용한 재질, 운전법, 속력, 기타 장치와 기계를 자세히 기록한다. ~ 조난한 외국인에 대해서는 인자하게 대하고 의복 등의 제공은 좋은 것을 할 것이며 성의와 호의를 표시하여 그들이 호감을 가지고 돌아가도록 할 것이다."

임기가 끝난 수령에 대해 백성들이 유임시켜 달라고 청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 하지만 거짓으로 나라에 청하는 일도 있었다. "목민관 중에는 사사로운 이익을 얻기 위하여 아전들과 공모하고 촌로들을 술과 음식으로서 회유하여 채임을 청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이는 목민관이 행할 바가 아니다."

선정비는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세우더라도 금지해야 한다고 봤다. "선정비를 세운다는 것은 또한 백성들에게 쇄마전, 입비전의 부담을 안기는 것이 된다. ~ 비록 목비라고 해도 민폐를 끼치는 것은 마찬가지다. 만민이 기뻐하더라도 그중에 원망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세워서 욕을 먹을 바에야 세우지 않음만 못할 것이다."

[배한철 영남본부장]



▶정약용(1762~1836)=호가 다산이며 팔당호 기슭의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에서 출생했다. 15세에 상경해 성호 이익에게 학문을 배웠다. 1789년 28세때 식년 문과에서 장원했다. 10년 남짓한 관직생활에서 벼슬이 정3품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정조 사후인 1801년 일어난 신유박해 때 젊은시절 서학에 심취한 이력이 빌미가 돼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가 18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사회개혁을 담은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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