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4대 냉면, 한국과 다르다? 우리가 몰랐던 평양냉면의 맛
[동아일보]
지난달 31일 오후 2시 지하철 2·5호선 을지로4가역. 핸드폰 화면에 구글 지도를 띄웠다. 평양냉면 노포(老鋪) 우래옥은 지하철역에서 멀지 않았다. 지상으로 올라오자 지도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한 곳을 향했다. 좁다란 골목엔 자가용 행렬이 멈춰 서 있었다.
사람과 자가용 사이를 헤치고 북적대는 주차장을 지나 우래옥 건물에 들어섰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홀에는 손님 100여 명이 대기 중이었다. “우리 집은 (대기실이 따로 있어서) 줄 안 서. 다른 집이 줄이 길지.” 이곳에서 55년간 일했다는 김지억 전무가 농을 건넸다.
매년 여름이면 평양냉면 신드롬이 일지만 올해엔 온도와 시기, 그리고 양상이 조금 다르다. 4월26일 남북 정상회담 때 북한이 진짜 평양냉면 맛을 보여주겠다며 제면기까지 이고 오는 퍼포먼스을 보인 데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아 멀다고 하면 안되갔구나”하는 유머 섞인 한마디까지 겹치며 평양냉면 열풍에 불을 지폈다.
“이것 봐, 장부를 보면 대충 몇 명 왔는지 알 수 있지.” 30명씩 기입된 장부가 25장을 넘어가고 있었다. 한 팀을 2명 정도로 잡으면 이미 1500그릇 넘게 팔았다는 의미다.
●2030 사로잡은 평양냉면
평양냉면은 실향민 1세대가 망향의 아픔을 달래던 음식이다. 1970년대 실향민 2세대와 식자층 베이비붐세대가 제2의 부흥을 이끌었다. 전직 공무원 장현 씨(70)는 “광화문 을지로 인근에 평양냉면 노포들이 몰려 있었는데, 당시 회식 장소로 인기였다. 자연히 평양냉면이 미식의 관문으로 자리 잡았고 냉면으로 해장하는 ‘선주후면(先酒後麵)’ 문화가 전파됐다”고 전했다.
최근엔 평양냉면에 입문한 2030들이 적지 않다. 소셜네트워크(SNS) 상에는 유명 가게를 하나씩 방문하는 ‘도장깨기’가 유행하며 ‘완냉샷(냉면을 다 먹은 그릇사진)’이 넘쳐난다. 특히 젊은 직장인들이 모여 있는 강남 분당 판교 등지의 신흥 냉면가게들이 성업을 이루고 있다. 딱 잡히는 맛 없이 슴슴하고 단순한 이 음식의 매력은 무엇일까.
“처음 먹을 때는 걸레 빤 물을 마시는 것 같았어요. 한데 한번 두 번 반복해서 먹으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극이 없는 맛이 중독을 부른달까요. 맛을 찾으려 애쓰는 과정이 재미있어요.”-박지민 씨(26·학생)
“차갑고 진한 고기국물이 일품이에요. 떡볶이 먹을 때 오뎅 국물은 조미료맛이 강해서 몇 번 들이켜고 마는데, 냉면 육수는 끝없이 들어가요. 감칠맛 때문인지 다른 요소 때문인지 몰르겠네요.”-김동민 씨(33·유통업)
미디어와 SNS의 영향도 크다는 지적이다. 온라인에서 평양냉면 가게 족보를 외며 면발과 육수를 놓고 토론하고. 미디어로 인해 평양냉면이 유행으로 번지는 찰나, 정상회담으로 관심이 증폭됐다는 것이다.
●냉면의 현지화
지난 4월 TV에서 북한에 간 남한 예술단의 일거수일투족이 흘러나왔다. 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장면은 백지영의 냉면시식기. 면발은 거무튀튀했고 쭉 뽑아 올린 길이는 150cm는 족히 돼 보였다. 육수도 맑은빛과 거리가 멀었다.
이 장면은 남한의 ‘평양냉면러’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툭툭 끊어지는 면발과 맑은 육수’를 경전처럼 받들며 메밀 함량과 육수 구성성분을 따지던 그들 아닌가. 정작 북한 냉면의 면은 질기고 육수는 검다니, ‘멘붕’에 빠질 만했다. 알고 보니 면은 전분 함량을 높이고 육수에는 간장을 섞어 검은 색을 띤다고 했다. 면발이 거무튀튀한 건 소화가 안 될 때 쓰는 식소다 때문이라고 탈북자들은 전한다.
실향민 1세대가 북에서 경험한 평양냉면은 어떨까. 중학생 때 월남한 이인범 평안북도 중앙도민회 고문(83)은 “육수재료는 정확히 모르지만 동치미가 들어간 건 확실하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밥으로도 간식으로도 먹었다”고 했다. 김금례 씨(87)는 “이북은 10월부터 겨울날씨라 동치미를 담그면 깊은 맛이 난다. 한데 남한에서는 그 맛을 내기 힘들다보니 냉면 육수를 고기로 내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들이 경험한 평양냉면은 동치미에 순면에 가까운 메밀면을 말아 넣은 국수 정도로 보인다. 집집마다 겨울이면 동치미 국물을 만들고 메밀반죽을 틀에 짜 국수를 뽑았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평양에서도 닭, 꿩, 소고기 등 육수를 동치미와 더러 섞어 썼다. 하지만 서민들은 대부분 동치미로 육수를 냈다.
반대로 북한에서는 면의 재료가 바뀌었다. 원래 평양냉면은 메밀100%의 순면을 주로 썼다. 너무 툭툭 끊어진다 싶으면 메밀과 전분을 8대2 정도로 섞어 찰기를 더했다. 남한은 이 공식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다. 반면 북한에선 전분 함량이 껑충 뛰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는 예종석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를 ‘경제사정에 따른 냉면의 현지화’라고 설명했다. 그는 “옥류관 청류관 고려호텔 민족식당 등 북한의 4대 냉면을 모두 맛봤는데 한국의 그것과 다르다. 동치미 함량이 높고 면발도 메밀을 많이 쓰지 않는다. 슬쩍 이유를 물어봤더니 고기와 메밀을 구하기 힘들어서 그렇다고 하더라”고 귀띔했다.
●남한 평양냉면의 계보
평양냉면은 계보를 알아가는 재미도 크다. 실향민의 아픔과 역사적 요소가 가미되 매력적인 스토리로 다가온다. 남북분단이라는 상황으로 사실을 확인할 수 없어 신비감이 더해진다.
노포들은 을지로와 그 인근에 몰려 있다. 남한의 평양냉면 역사는 1940년대 을지로 4가에 개업한 ‘서래관(폐업)’이 시작이다. 1946년 우래옥이 개업했고 1970~1980년대 필동면옥·을지면옥·장충동 평양면옥 등이 뒤를 잇는다. 외식문화가 없던 당시 평양냉면은 특별한 먹거리로 시대를 풍미했다.
우래옥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평양냉면집이다. 평양 유명 냉면가게인 명월관 주인이 개업해 3대째 명맥을 잇고 있다. 을지로 본점은 창업주 고(故) 장원일 씨의 손녀 경선 씨(66)가, 대치동 분점은 손주 근한 씨(64)가 운영한다. 우래옥은 소구기만으로 육수를 우려낸다. 순면 또는 전분을 살짝 섞은 면 두 가지를 맛볼 수 있다. 우래옥 영업부장인 유병석 씨는 “업게 평균보다 연봉이 높은 편이다. 퇴직금도 준다”며 “직원 대부분 20~30년씩 내 살림 돌보듯 일하는 것도 우래옥의 경쟁력”이라고 했다.
●”나도 있다“ 각 지역 냉면문화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에도 황해도식 냉면이 전해진다. 황해도 출신 이건협 씨가 1952년 개업한 ‘황해냉면’이 대표적. 굵은 면발에 간장이나 설탕으로 간을 한 육수가 특징이다. 옥천냉면과 옥천고읍냉면 등이 있다.
부산은 냉면이 밀면으로 변형됐다. 메밀 대신 미군에게 배급받은 밀가로루 냉면을 만들어 팔면서 밀면이 탄생했다. 유재우 내호냉면 사장은 ”함경도 흥남에서 냉면집을 운영하던 증조할머니가 밀면을 처음 만드셨다. 손님들은 밀가루를 쓰니 면이 부드러워졌다며 좋아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한편 함흠냉면집은 서울 중구 오장동 일대에 몰려 있다. 오장동에 자리잡은 함경도 피난민은 고향에서 먹던 농마국수를 변형해 함흥냉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감자 고구마 전분으로 만든 질긴 면을 매운 양념 가자미회 홍어회와 비벼 먹는다. 오장동 흥남집과 신창면옥이 대표적이다. 권이학 오장동 흥남집 이사는 ”양념장과 회의 쫀쫀한 식감이 함흥냉면의 매력이다. 함흥냉면이야말로 중독성이 대단한 음식“이라고 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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