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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end Interview] 러시아월드컵 해설위원으로 돌아온 `2002월드컵 전사` 이영표

이용익 기자
이용익 기자
입력 : 
2018-06-01 15:47:46
수정 : 
2018-06-05 11: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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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내 발에 닿는 건, 한 경기에 단 150초…나머지 87분 움직임서 좋은 선수가 나온다
영원한 수비수이자 `축덕`…"해설의 묘미? 빅매치 다 보는거죠"
2018 국제축구연맹(FIFA) 러시아월드컵을 앞둔 축구팬들은 속이 탄다. 부상 악재와 조직력 부족으로 시달리는 신태용호의 수비 불안이 그 원인이다. 자연스레 축구팬들이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 한 명 있다. 세 차례 연속 월드컵에 출전했고 네덜란드, 영국, 독일, 사우디아라비아, 캐나다 등 다양한 리그에서 인정받은 수비수. 바로 '초롱이' 이영표(41)가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선수 시절만 이야기한다면 이영표의 절반만 보는 셈이다. 은퇴 후에도 그의 행보는 거침이 없다. 해설위원으로 변신해 뛰어난 경기 예측력으로 '인간 문어'라는 찬사를 받았고, 평소에는 철학자처럼 사색적인 글을 통해 한국 축구의 미래를 다시 밝힐 혜안을 제시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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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선수 때처럼 날렵한 몸을 유지하고 헤어스타일조차 변함이 없는 그를 여의도 KBS에서 만났다. 그의 축구 인생을 시작부터 끝까지 들어보는 것은 물론 다가올 월드컵 예측도 빼놓지 않고 물어봤다. 어떤 질문에도 명료한 목소리로 곧바로 답변하는 모습에서 그가 바꿔나갈 한국 축구 미래에 대한 기대감도 함께 피어올랐다. ―월드컵이 눈앞이다. 다만 대표팀의 선전이 어려워 보여 분위기는 예년보다 조용한 듯하다. 그럼에도 월드컵이 지구촌 축제인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나라가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것과 내가 응원하는 클럽이 리그에서 우승하는 것 중에 어떤 걸 더 원하느냐고 질문을 던져보면 가끔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클럽이 우승하는 게 더 좋다고 하는 이도 많다. 워낙 축구 자체를 사랑하는 나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월드컵이 훨씬 더 클까. 아무래도 애국주의, 내셔널리즘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들이 역사적으로 감정이 상하는 일도 많았는데 그럴 때 정상적인 방법으로, 아주 통쾌한 방법으로 상대의 기를 누를 수 있는 게 축구다. 우리나라 한일전과 마찬가지로 각 나라의 역사와 축구는 연결점이 있다. 민족의 자존심과 국력의 대결, 한 나라와 나라 간의 자존심 대결. 이런 것까지 축구가 깊숙이 연결돼 있기 때문에 월드컵은 올림픽도 능가하는 엄청난 대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

―역대 월드컵 대회 중 재미있었고, 의미가 깊었던 대회를 꼽는다면. ▷일단 뛴 대회로는 당연히 2002년 한일월드컵이고, 어렸을 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 대회라면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1994년 미국월드컵, 1998년 프랑스월드컵 정도인데 그중에는 아무래도 미국월드컵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가 스페인, 독일처럼 강한 팀과 한 조에 묶였지만 그래도 경기력이 가장 낫지 않았나. 스페인과는 비기고, 독일과는 2대3까지 따라붙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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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선수 개인으로 초점을 맞춰서 지금까지 본 선수, 같이 뛰어본 선수 다 포함해서 최고의 선수는 누구였나. ▷나랑 경기했을 때 가장 좋은 퍼포먼스를 보였던 선수들이 가장 기억에 남게 마련이다. 나는 네덜란드 선수들이 인상적이었다. EPL 아스날에서 뛰었던 베르캄프는 볼 터치가 정말 뛰어났고, 네덜란드 PSV에인트호번에서 함께 뛰었던 필립 코쿠는 정말 정확하게 항상 내 발 앞에 오는 패스를 줘서 '어떻게 저런 킥이 되는 선수가 있지?' 하고 놀랐다.

―2018 러시아월드컵에 대해서도 공부를 많이 했을 것 같다. 어떤 부분에 집중해서 보는 게 즐거울지 팁을 준다면. ▷축구에서 제일 중요한 건 긴장감이다. 그런데 그 긴장감은 약간의 기대감과 비슷하다. 우리가 이길 것 같은 기대감. 지면 안 될 것 같은 긴장감. 그런 감정이야말로 스포츠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매력 중 하나다. 이번 월드컵에서 스웨덴과 멕시코, 독일을 만나면서 그 기대감과 긴장감이라는 감정의 교차를 즐겼으면 좋겠다. 물론 경기 자체는 질 수도, 이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니지 않나. 우리가 5분 동안 엄청난 긴장감을 맛보기 위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90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거저 누릴 수 있는 긴장감과 기대감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총 64경기가 펼쳐질 예정인데 일단 조별예선에서 눈여겨볼 만한 경기가 있을까. ▷A조에 이슈가 많을 것 같다. 개최국인 러시아를 시작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우루과이가 속해 있는데 심판 판정에 대한 논란이 분명히 일어날 조라고 생각한다. 또 포르투갈과 스페인, 모로코, 이란이 속한 B조 역시 재미있을 것 같다. 사실 이번 대회부터는 FIFA가 조 추첨 룰을 바꿔서 강팀하고 약팀을 잘 섞어놨기 때문에 강팀끼리 예선에서 만나는 일이 사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 대신 16강전부터는 그 어느 대회보다 불꽃 튀는 대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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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회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칠 것이라 보는 선수와 나라를 골라주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생각이다. ▷1998년생 어린 선수인 프랑스의 킬리안 음바페(파리 생제르맹)를 지켜보고 있다. 물론 지금 이미 기량이 올라와 있는 선수지만 이번 월드컵을 통해서 한 단계 높은 레벨의 선수로 성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유력한 우승 후보팀으로도 프랑스를 꼽는데 음바페가 얼마나 활약을 해주느냐에 따라서 프랑스가 우승을 할지, 득점왕을 배출할지도 갈릴 것 같다. 음바페가 직접 득점보다도 어시스트를 많이 해주면 앙투안 그리즈만(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같은 선수가 득점왕을 할 수도 있고. 이런 선수들이 있으니 프랑스가 1998년 이후로 다시 주목을 받을 때가 된 것 같다. 사실은 독일이든, 스페인이든, 프랑스든, 아르헨티나든, 벨기에든 어떤 팀이 우승한다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월드컵 열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한국 대표팀 성적이다. F조의 나머지 3팀에 대해서 평가를 해본다면. ▷우선 스웨덴은 상당히 조직적이고 이미 4―4―2라는 완성된 포메이션이 있는 나라다. 그걸 또 뒤집어보면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준비를 충분히 할 수 있는 팀이기도 하다. 스웨덴 역시 우리에게 분명히 승점 3점을 반드시 얻어야 되는데, '반드시'라는 말에 바로 힌트가 있다. 후반 70분 정도까지 버티면 스웨덴이 전진할 텐데 그때까지 시간 관리를 잘하면서 기다리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올 수 있다. 멕시코는 후안 카를로스 오소리오 감독이 부임한 뒤 지난 3년 반 동안 46개 경기에서 4―4―2, 4―3―3, 3―5―2, 4―1―4―1, 4―2―3―1, 3―4―3까지 6개 전술을 고르게 사용했을 정도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팀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모든 선수가 2~3개 포지션을 뛸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이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생기는 조직력 문제가 있기에 그 부분을 파고들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독일은 사실, 약점이 없는 팀이다(웃음). 월드컵 우승 경험이 있는 선수들에 신예 선수들까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다만 몇몇 주축 선수, 특히 중앙수비수인 제롬 보아텡이라든가, 마츠 훔멜스(이상 바이에른 뮌헨)가 정점을 지난 선수들이라는 점에서 수비에 약간은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본다.

―한국 대표팀의 16강행 가능성을 25% 정도로 예측했는데. 그 낮은 가능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가 스웨덴과 멕시코 상대로 승점을 따내야 할 것 같다. ▷물론 그렇다. 스웨덴이 4―4―2로 나온다고 하면 중앙수비수가 상대 공격수보다 무조건 한 명이 많아야 하니 3백 전술을 준비해야 한다. 멕시코는 그 46경기를 따져보면 원톱을 쓴 경우가 67%니 4백 전술을 또 준비해둬야 할 가능성이 높다. 약팀이라면 상대에 맞게 전술을 바꾸면서 대응하는 방법밖에 없고, 그러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일관된 조직력을 유지하느냐가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가 그래도 뭔가를 기대할 수 있는지 아닌지 핵심 포인트다.

―반대로 우리가 골을 넣기 위해 공격 구성은 어떻게 해야 할까. ▷투톱을 쓴다면 손흥민(토트넘)을 포워드로 놓고, 원톱을 쓴다면 사이드에 배치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다. 수비를 어떻게 하고 어디까지 공을 전달하는지는 전술적으로 준비할 수 있지만 공격은 어느 시점부터는 개인적인 창조력에 의해 결정된다. 이승우(헬라스 베로나)나 문선민(인천 유나이티드)처럼 빠른 공격수들을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알다시피 부상 선수가 많아서 고민인데, 2002년 당시 부상당하고도 빠른 회복으로 합류했던 경험을 살려 조언한다면. ▷이미 부상당한 선수가 제 컨디션을 찾기는 어렵다. 나는 10일 정도 쉬고 합류가 가능했지만 김진수(전북 현대)처럼 두 달 정도를 쉰 선수는 체력을 회복하기도 어렵다. 부상 선수들에게 우리가 얽매이기보다는 정상적인 선수들을 통해서 준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부상 선수들은 어디까지나 '보너스'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부상도 연장된 경기의 일부이니 얼마나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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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표는 브라질월드컵에 이어 이번에도 해설자로 시청자들과 만날 예정이다. '문어 영표'라는 별명대로 뛰어난 예측력을 선보이기 위해 수많은 팀들을 분석하고 있다. [이승환 기자]
―일반적인 엘리트 코스와 다른 코스를 밟았지만 국가대표, 나아가 EPL에까지 진출했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노력을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유를 굳이 찾아보자면 축구가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축구를 더욱 즐기고 싶었는데 잘하면 잘할수록 더 재미있는 운동이 축구였다. 그런데 잘하려면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더라. 나는 내가 더 즐겁게 축구를 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그게 기초가 돼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개인 연습을 시작했다. 밤마다 드리블 연습하는 콘을 15개씩 들고 나와서 사이로 몰고 다니는 연습을 했다. 고등학생이 된 후에는 줄넘기를 하고 산으로 뛰어다니며 체력을 키웠다. 할 수 있는 개인 운동은 다 해보려 한 것 같다.

―세상에 다양한 운동이 있는데 유독 왜 그리 축구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나. ▷축구를 하기 전에는 육상을 했다. 그런데 축구부 감독님이 나를 딱 찍더니 축구를 해보라고 권유하시더라. 나도 그냥 달릴 바에야 공을 차면서 달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전까지는 육상이 힘들어도 감히 안 하겠다는 말을 못했는데 기회가 생긴 것이다(웃음). 100m, 800m까지 단거리 달리기를 했는데 축구를 해보니 훨씬 재미있더라. 직접 축구를 선택했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는데 기대 이상으로 즐거웠다.

―선수 시절 자신의 장점을 키우는 것과 단점을 보완하는 것 중 어느 쪽에 더 힘을 쏟았나. ▷오른발잡이라 레프트백으로 한계가 있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지만 나는 단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레프트백이 내 주 포지션이었는데 오른발잡이 선수가 왼쪽에 서면 오히려 편한 점이 많다. 왼발잡이가 왼쪽에 서면 터치라인에서 막힐 때가 많지만 오른발로 공을 잡고 열면 각도가 확 늘어난다. 패스·드리블·슛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기에 오른발잡이 선수가 왼쪽에서 잘하면 더 유리할 수도 있다.

―유럽 무대에서 뛰던 시절을 돌아보면 가장 상대하기 어려웠던 선수는 누구였나. ▷내게는 그런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상대가 어렵냐, 안 어렵냐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컨디션을 좋게 유지할 수 있느냐, 아니냐가 훨씬 중요하더라. 내가 준비를 열심히 하지 못했다면 상대로 고등학교 축구부 학생이 들어와도 어렵다. 그런데 반대로 내가 준비가 잘돼 있고 컨디션이 좋다면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다. 연습경기든 실전이든 마찬가지다. 과거 프로축구 K리그 안양 LG에 있을 때 실업팀과 FA컵에서 만나 경기를 했는데 비긴 후 승부차기에서 졌다. 그때 90분 내내 힘든 경기를 한 뒤에 내가 준비가 안 돼 있으면 약체 팀을 만나도 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느꼈다.

―선수 시절 K리그를 떠나서도 유럽·중동 등 다양한 팀 경험을 쌓았다. 각 팀에서 느끼고 배운 점들이 있다면 듣고 싶다. ▷모두 다 축구를 하는 곳이었지만 차이는 있었다. PSV에인트호번에서는 '이기는 법' '즐기는 법'을 배웠다. 축구가 정말 얼마나 즐거운지를 느낀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네덜란드 내에서 워낙 강팀이라 좀처럼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토트넘으로 이적한 후에는 '축구의 속도'에 대해 눈을 떴고, 또 '축구만 잘하면 왕이 되는 사회'를 경험했다. 일단 EPL 경기 스타일이 워낙 빠르기 때문에 그 스피드에 적응하는 법을 익혀야 했다. 그렇게 해서 잘하게 되면 영국이라는 나라에서는 가는 곳마다 엄청난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독특하다. 축구를 잘한다는 전제만 있다면 그 어느 선수든 영국 무대를 떠나기 쉽지 않을 정도다. 구단에서는 원정 갈 때는 전용기를 태워줄 정도로 선수들을 관리해주고, 길거리에 나가도 모두가 환영해주기 때문이다. 도르트문트는 팀이 속한 분데스리가가 최고 리그는 아니지만 클럽 자체는 정말 명문이다. 독일이라는 사회가 규칙과 질서를 존중하는 곳이다 보니 시스템을 만들고, 매뉴얼을 철저히 지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해야 되는 일이면 하고, 클럽에 속한 누구나 자기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는 곳이었다.

―유럽 생활을 마친 뒤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축구를 대표하는 알 힐랄, 세계 축구의 신시장을 열어가는 MLS 밴쿠버 화이트캡스 등 새로운 리그에 가서 뛰기도 했다. ▷사우디 리그에 가서는 또 달랐다. '축구가 종교가 될 수 있구나' 하고 감탄했다. 예를 들자면 사우디에서는 연습을 생중계한다. 축구 열기가 뜨겁다 보니 연습경기도 아니고 일반적인 연습을 생중계해주는 것이다. 또 TV를 틀면 전 세계 축구를 다 볼 수 있기도 하다. 세어보니 축구 채널만 스물다섯 개 정도 되기에 깜짝 놀랐다. 마지막으로 MLS에서는 스포츠 마케팅 등 행정적인 부분을 배웠다. 기존에 뛰던 영국에서는 축구라는 스포츠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면,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즐길 수만 있다면 스포츠 형태는 어떻게 변해도 상관이 없다는 사고방식을 배웠다. 관중이 즐거워할 수 있다면 축구의 본질이 변해도 괜찮다. 즉 축구라는 스포츠도 하나의 수단일 뿐이고 궁극적인 목적은 엔터테인먼트라는 사고방식이다. 사람들이 즐기고, 스트레스를 풀게 해주며 리그가 돈을 벌 수 있다면 뭐든 하는 그곳 사람들이 맞는다 혹은 틀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스포츠를 대하는 사람들 태도가 이렇게 다양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K리그는 일상적인 엔터테인먼트로 자리 잡는 데는 아직도 멀어서 안타깝다. ▷지금 우리가 영국처럼 할 수는 없다. 아무리 우리가 축구의 전통을 세우고 지켜도 100년 먼저 시작한 그쪽보다 좋아지기는 어려운 것 아닌가. 생각해보라. 어린아이가 아버지, 할아버지와 함께 손잡고 축구장을 가고 라이벌팀에 지자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아이에게는 그 팀이 자신의 삶이 되는 거다. 그런 배경이 없는 지금 우리에게 맞는 것은 미국 같은 생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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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표 해설위원이 축구의 즐거움을 배우는 시간이었다고 회상한 PSV에인트호번 시절 활약 모습. [매경DB]
―선수 생활을 마친 뒤에는 행정가의 길로 접어들었고, 또 해설위원으로도 많은 지지를 받았다. 지도자를 택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면. ▷축구를 잘할 수 있도록 남들을 돕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지도자가 되어서 본인이 가지고 있는 노하우를 후배 선수들에게 전해주고, 기술적으로 성장시키는 방법이 있다. 이 길도 물론 중요하다. 그런데 또 한 가지가 있다. 유럽에서 보니 축구 자체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축구를 잘하는 시스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더라. 사실 우리나라는 이런 환경에서 지금 정도면 축구를 잘하고 있다고 본다. 좋은 기술을 가질 수 있도록 프로그램과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해서 지도자보다는 행정과 연구에 관련된 일을 해야 되겠구나 싶었다.

―그렇다면 일단 지금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일은 해설위원인데 이 직업의 매력은 무엇인가. ▷제일 좋은 것은 빅 이벤트의 현장에 패스를 받을 수 있다는 것 아닐까(웃음). 나는 선수 시절 월드컵 결승전을 TV로만 보고 실제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해설을 하면서야 처음으로 결승전 무대를 경험했다. 아시안컵과 올림픽, 월드컵 등 현장에서 다양한 각도로 관찰하고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현재로서는 가장 마음에 든다.

―공교롭게도 이번 2018 러시아월드컵에서는 박지성 SBS 해설위원, 안정환 MBC 해설위원과 경쟁하게 됐는데 이들에게 덕담을 한다면. ▷정환이 형은 이미 재미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실제로 예능 프로그램에도 나서면서 자신의 강점을 구축했으니 별 걱정이 없을 것 같다. 지성이 같은 경우는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하는 사람 아닌가. 나도 어떻게 말할지 들어보고 싶은데 시청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뭔가 새로운 해설 스타일을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덕담을 한다면 제일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할지 보지 말고 자신의 생각대로 하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무리 없이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는 것이 정답이다. 처음에 해설을 할 때는 함께 중계하는 캐스터의 조언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 방송을 능수능란하게 하는 분들이니 배울 점이 많다.

―마지막 질문이다. 스포츠를 통해 리더십이나 삶의 원리 등을 배우는 경우도 많다. 축구를 통해 얻은 배움을 나눠본다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한 가지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 우리 모두가 축구는 90분짜리 경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공이 움직이는 시간은 평균 60분 정도고, 한 선수가 공을 소유하는 시간은 평균 2분30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87분30초는 공 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모든 카메라와 관중의 시선은 공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쏠리게 마련이고, 당연히 선수들은 공을 오래 소유하고 싶어한다. 그렇지 않겠는가? 그런데 한 선수가 공을 오래 소유할수록 그 팀은 좋은 경기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주목받고 싶은 충동에서 벗어나 빠르게 패스를 해줄 때 더욱 강한 팀이 될 수 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겠다고 욕심을 부리며 공을 소유하는 선수가 많아지는 팀은 이기는 팀이 될 수 없다.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주목받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나에게도 손해고, 우리 모두에게도 손해가 된다. 그럼 반대로 나에게도 이익이고 모두에게도 이익이 되는 길은 무엇이겠는가. 좋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찾아서 빨리 패스해주는 것이다. 공을 패스하듯 마음을 나누고, 이해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이영표 해설위원은… 1977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 축구를 시작했다. 성실함을 무기로 1999년부터 2011년까지 한국 축구의 왼쪽 수비를 책임지며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뤘고, A매치 127경기를 뛴 '레전드' 반열에 올랐다. K리그 안양LG(현 FC 서울)에서 프로 커리어를 시작한 뒤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번, EPL 토트넘 홋스퍼, 분데스리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사우디아라비아 알 힐랄, MLS 밴쿠버 화이트캡스 등 다양한 팀을 거친 뒤 2013년 은퇴했다. 현재는 부인 장보윤 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하엘·나엘 두 딸을 키우며 KBS 축구 해설위원과 화이트캡스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성공이 성공이 아니고 실패가 실패가 아니다' '생각이 내가 된다'가 있다.

[이용익 기자 / 사진 =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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