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바로가기

기사 상세

사회

수학공식 풀듯 자막으로 인물성격 풀어내죠

김시균 기자
입력 : 
2018-05-31 04:01:01

글자크기 설정

할리우드 히어로물 데드풀 담당…`영화 번역계의 아이돌` 황석희
사진설명
19금 히어로물 '데드풀2'가 누적 관객 326만명(30일 영화진흥위원회 집계)을 넘어섰다. 전작 '데드풀1' 성적(331만명)을 추월하는 것도 머지않았다. 거침없는 속사포 입담, 수위를 넘나드는 B급 유머, 막무가내식 자기 비하의 향연. 아마도 데드풀(라이언 레이놀즈)은 21세기 할리우드가 빚어낸 가장 기상천외한 히어로일 테다. 상기할 사실이 있다. 이 영화 흥행의 공을 오롯이 데드풀의 매력으로만 돌려선 곤란하다는 것. 두 편 모두 즐겨 봤다면 안다. 이 영화 자막이 얼마나 끝내주는지를. 과언이 아니다. 이만한 대사들을 이만큼 번역해낸 경우는 여지껏 없었다. 혹자가 "영화 번역계 혁명"이라 부른다면 그것도 틀린 말이 아니다.

아니 그럼 누가 번역했길래. 언제부턴가 '영화 번역계 아이돌'로 칭송받는 황석희 번역가(39)다. 최근 메가박스 신촌점에서 열린 'GV(관객과의 만남)'에서 그를 만났다. "1편 번역 때부터 2편까지 나오면 어쩌나 미리 걱정부터 들더라"고 했다. "최종 버전을 검수하면서 스트레스와 부담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해할 만하다. 데드풀 입가로 쉴 새 없이 터지는 19금 방언들, 그걸 또 한 번 번역하는 건 베테랑 번역가로서도 고역이다.

게다가 여타 히어로에 대한 '디스'와 '풍자'까지 날것 그대로 소화해내야 한다. 쉬운 작업이 아닐 것이다. 그는 "워낙 다양한 레퍼런스와 패러디가 담겨 있어 초고난도 번역이었다"고 했다. "자막만으로 캐릭터 느낌을 충분히 살려야 했다. 마치 수학 공식을 푸는 것 같았달까. 몇몇 단어는 수위를 지키되 폰트 크기를 달리하는 등 기존 포맷의 제약을 뛰어넘고자 했다."

'데드풀2'의 매력 중 하나는 다른 작품들에 대한 깨알 인용.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를 막론한 풍성한 언급으로 영화적 재미를 돋운다. 그는 "조시 브롤린의 데뷔작 '구니스'부터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까지 여러 영화의 레퍼런스가 차용됐다"며 "고전영화와 팝컬처도 두루 녹아 있어 사전 공부가 필수였다"고 했다.

"전해 들은 바로는 현대 코믹북 시장에서 데드풀 인기가 가장 뜨겁다더라. 데드풀은 미국 대중문화에 대해 해박하고, 코믹스 내에도 이에 대한 설명이 한가득이다. 특히 제4의 벽을 깨는 참신함, 자신의 고통을 유머로 희화하는 셀프디스 개그 등이 매력적이고."

경기 일산 태생인 그는 명목상으론 "한량처럼 살고 싶어" 영화 번역 일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실제론 밤샘 작업도 감수하며 누구보다 치열히 산다. 본연의 대사와 의미를 최대한 투명하게 전하는 게 모토라면 모토. 그간 번역한 작품만 잠시 훑어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웜 바디스' '인사이드 르윈'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부터 점차 인지도를 얻더니, '데드풀1'의 찰진 입담과 욕설, B급 감성을 온전히 풀어내 '번역계 아이돌'로 급부상했다.

사실 그간 개봉한 외화 중 상당수가 그의 손을 거쳤다 봐도 무방하다. 블록버스터, 예술영화 가리지 않는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문라이트' '스포트라이트'부터 '로건' '캐롤' '블레이드러너 2049' 등 예술성 짙은 작품들 모두 그의 충실한 번역 끝에 개봉했다. 미드 '밴드 오브 브라더스' '뉴스룸' 등도 마찬가지다.

영화 번역가를 꿈꾸는 이에게 그는 이제 1순위 롤모델일 터. 그런데 그가 정작 강조하는 건 한국어 능력이다. "좋은 글들을 읽으며 지금도 한국어 능력을 높이는 중이다. 최신 트렌드를 놓치면 안 되니 인터넷 게시판도 자주 들어가 보며 젊은 감각을 익힌다. 아, 각종 자료들 섭렵은 기본이다." 그럴 것이다. 제아무리 영어 실력이 빼어날지라도 우리말이 서투르면 말짱 도루묵일 테니.

[김시균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