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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이 총애했지만 연산의 간신이 된 임사홍-명예를 하사 받다, 그것은 천천히 나가라는 뜻

입력 : 
2018-05-30 14:57:52
수정 : 
2018-05-30 15:4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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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홍은 간신이다. 그는 연산군에게는 충신이었는지 모르지만 군주의 그릇된 행동에 간언하지 못했고, 폭주를 제어하지 못했다. 또한 갑자사화를 주동하진 않았지만 일조를 한 것임은 분명하다. 유능하고 심지 있는 젊은 관리였던 임사홍은 당장의 부귀와 영화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것이 역사의 도도한 흐름인지, 잘못된 운명인지 모르지만, 임사홍은 유능한 군주 성종 치하에서는 충신으로 살았다. 그러나 폭군 연산 치하에서는 간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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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다. 승리자는 자신들의 승리를 더욱 극적으로 미화하기 위해 패배자를 탐욕적, 반인륜적으로 기록한다. 그것은 승리자의 특권이자 승리자의 가치를 드높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 왕조에서 승리자의 붓은 칼보다 더 날카롭고 잔혹했다. 수없이 일어난 역모 사건과 사화는 왕권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훈구파와 신진 사림파의 끝없는 사상과 투쟁의 산물이었다. 이 지난한 싸움의 절정이 연산군과 광해군을 쫓아낸 반정이었고, 승리자인 반정 세력은 자신들의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 두 군주를 폭군으로 단죄했다. 당연히 연산군과 광해군 치하에서 권력의 정점에 있던, 그리고 그 주변부에서 권력의 콩고물이라도 차지했던 자들은 모두 ‘간신’으로 몰려 멸문되었다.

역사가 간신으로 명한 임사홍은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제일 먼저 반정군에게 붙잡혀 맞아 죽었고, 이후 땅에 묻힌 지 20여 일 만에 다시 부관참시를 당하는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그가 간신이라는 역사적 증거는 사림파에 의해 쓰인 <연산군일기>에 남아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사림파 중심의 사간들에 의해 관직에서 쫓겨나 10여 년이 넘는 오랜 시간 권력에서 소외된 뒤 다시 권력을 잡은 임사홍이 자신의 복수를 위해 갑자사화를 기획하고 연산군을 조종했으며, 일국의 재상이 기껏 권력과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채홍사’ 노릇을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임사홍을 간신으로 단죄한 결정적 사건인 갑자사화를 바라보는 몇 가지 다른 시각이 있다.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생모 폐비 윤 씨의 존재를 알리고 외할머니를 만나게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향후 100년간 폐비 윤 씨의 일을 절대 입에 담지 말라”는 성종의 지엄한 어명을 임사홍이 어긴 것은 분명하지만 연산군은 이미 폐비 윤 씨 사건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연산군이 느닷없이 만고의 효자가 된 듯 갑자사화를 일으킨 것은 사림파의 득세에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였다. 임사홍에게는 연산군의 폭주를 막지 못한 죄가 분명히 있다. 더욱이 그의 두 아들 임광재, 임숭재의 연산군을 향한 그릇된 충성에 대해서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임사홍에 대해서 좀 더 들여다보는 것은 그가 관리 초임의 행적에서 간신보다는, 똑똑하고 기개 있고 사리 분명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세조 대에 관직에 나간 임사홍은 특히 성종의 신뢰와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학문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으며 일본어와 여진 말도 잘하는 그야말로 박학다식한 인물이었다. 성종 또한 이를 알고 그를 경연관으로 발탁해 측근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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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외척이자 인척이라는 무게감

임사홍은 기개도 있었다. 재상과 정승의 행실에 서슴지 않고 간언을 했고 특히 권신 한명회를 정면에서 탄핵할 정도로 용감했다. 예종 대에 남이 장군이 역모로 탄핵받을 때 이에 동조하지 않았고, 성종에게도 ‘궁중의 내불당을 철거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질투심에 성종에게 대들어 용안에 상처 냈다는 이유로 성종의 생모인 인수대비가 윤 씨를 폐서인에 처하려 할 때 “다음 대권의 주인공인 세자의 생모를 폐서인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반대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임사홍에게는 두껍지만 무거운 갑옷이 있었다. 그것은 왕실의 인척이자 외척이라는 굴레였다. 임사홍의 부인은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아들 보성군의 딸이었고, 임사홍의 장남 임광재는 예종의 딸 현숙공주와 결혼했다. 셋째 아들 임숭재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와 결혼해 왕실과 겹사돈이었다. 이는 임사홍에게 출세의 꽃 길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험난한 길이기도 했다. 태종은 ‘외척의 발호’를 후계들에게 경계했고 삼사 관원들에게 임사홍의 모든 행동은 감찰 대상이 되어 그는 권력의 정점에 올라설 수 없었다.

그래도, 임사홍은 간신이다. 그는 연산군에게는 충신이었는지 모르지만 군주의 그릇된 행동에 간언하지 못했고, 폭주를 제어하지 못했다. 또한 조선 사림파의 무덤이 되었던 갑자사화의 주동은 아니었지만 그 파동에 일조를 한 것은 분명하다. 결국 앞날이 기대되는 유능하고 심지 있는 젊은 관리였던 임사홍은 당장의 부귀와 영화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것이 역사의 도도한 흐름인지, 무능하고 시기심 많고 사리 분별이 뚜렷하지 못한 1인자를 만난 잘못된 운명인지 모르지만 임사홍은 유능한 군주 성종 치하에서는 충신으로 살다, 폭군 연산 치하에서는 간신이 되었다.

그는 왕실의 인척, 외척 신분에 만족했어야 했다. 그 외피를 입고 권력의 뜨거운 불 속에 뛰어드는 순간, 임사홍은 훈구파, 사림파, 궁중파 등 근본적으로 왕권과 권력을 다투어온 조선 사대부들의 공적이 되었다. 왕권의 견제는 조선 왕조를 창업하고 리더십과 통치 교본을 만든 정도전의 유산이었다. 그 유산은 암암리에 조선 사대부들의 마음속에 전승되었다. 그들에게 임사홍은 그 신분만으로도 경계 대상이자 모두의 과녁이 된 것이다. 우리가 임사홍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양손에 떡을 쥐고 또 하나를 더 손에 쥘 수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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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망받았던 엘리트, 임사홍

임사홍은 1445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짓고 글씨 솜씨 또한 좋았다. 아버지는 임원준으로 좌천성을 지냈고 어머니는 조선의 개국 공신 남재의 후손 남규의 딸이다. 남규는 사림파 학자 남곤의 친할아버지이다. 임사홍은 효령대군의 손녀와 결혼했다. 임사홍은 음서로 벼슬길에 올랐고 21세에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당시 임사홍은 패기 넘치는 젊은 관리였다. 조정의 고위직과 외척은 물론 당대의 실력자 한명회, 신숙주를 비판하는 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또한 조정의 대세 여론에도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왕에게 간언도 서슴지 않았고 학문의 깊이와 특히 글씨가 뛰어나 엘리트 그룹의 선두 주자였다. 임사홍의 능력을 알아준 이는 성종이었다. 성종은 임사홍의 재주를 아껴 시강관으로 경연에 참석하게 했고, <세조실록><예종실록> 편찬에도 수찬관으로 참여시켰다. 임사홍은 당대 최고의 학문인 최항의 인정을 받았고 한명회, 신숙주 등과 나란히 성균관 문묘에서 경연을 강의했으며, 성종에게 <국조보감>을 강독해 활을 선물 받기도 했다. 그야말로 뛰어난 학문, 강직한 성품으로 장차 크게 쓰일 인물로 주목받았던 것이다. 임사홍은 예의 강직한 성품으로 정승, 판서는 물론이고 모든 관리들의 부정과 잘못된 언행에 대해 탄핵하고 잘못을 지적했다.

임사홍이 비판하는 대상에는 군주도 예외가 아니었다. 성종에게 궁 안에 있는 내불당을 철거할 것을 상소해 이를 관철시켰고, 성종이 생부인 의경세자에게 시호를 내리려는 뜻에도 반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성종은 임사홍의 벼슬을 오히려 올려주며 그를 격려하고 관리로서 풍부한 경력을 쌓게 했다. 이를테면 1476년 3월에 좌부승지로 임명했다가 닷새 만에 우승지로 곧바로 승진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튀어나오면 정을 맞는 법. 임사홍은 간관들의 주 탄핵 대상이었다. 간관들은 임사홍의 능력은 인정했지만 27세에 벼슬이 승지에 이르자 경계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임사홍에게 어느날 정치적인 시련이 찾아왔다. 현명하고 올바른 군주 성종은 국정에 빈틈이 없었지만 궁중 관리에는 구멍이 많았다. 성종은 윤비와 생모 인수대비 간의 갈등을 조정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후궁을 본 성종을 질투한 윤비가 용안에 그만 상처를 내고 말았다. 이를 안 인수대비는 ‘윤비를 폐서인하라’며 성종을 압박했다. 임사홍은 이를 반대했다. 그가 장차 왕위에 오를 세자의 생모에 아부를 한 것일 수도 있지만 임사홍은 “윤비는 세자 융의 생모이므로 폐서인에 처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다”라는 논리로 반대했다. 그 무렵 임사홍이 유자광과 뜻을 같이해 도승지 현석규를 탄핵하자 성종은 임사홍은 의주로, 유자광은 동래로 귀양 보냈다. 임사홍이 조정을 떠나자 인수대비는 조정 대신들을 움직여 결국 성종의 허락을 받아냈다. 이 사건이 연산군 시대의 비극을 잉태한 것이다.

성종은 다시 임사홍을 불러들여 그를 도승지에 임명했다. 1478년, 34세의 임사홍에게 운명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4월 하늘에서 흙비가 내린 것이다. 지금이야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으나 당시만 해도 이는 변괴였다. 군주국가에서 변괴나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일차적으로 군주에 대한 ‘하늘의 경계’로 받아들였다. 삼사와 신료들이 “흙비가 내리는 것은 하늘이 보내는 경고다. 이럴 때일수록 행동을 조심하고 근신하며 특히 술은 금지해야 한다”고 성종에게 간했다. 조정의 중론이었다. 임사홍은 다른 의견을 냈다. 그는 “흙비가 내리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이를 하늘의 경고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곧 나라의 제가 있는데 술을 금지하는 것은 올바른 결정이 아니다. 승정원도 같은 생각이다. 삼사의 의견이라고 해도 이를 무조건 따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은 물론 임사홍을 평소 경계하던 삼사가 모두 들고 일어나 임사홍을 집중 공격했다. 그들은 ‘임사홍이 사치와 향락을 조장하고 언론을 가볍게 여기며, 또한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 파당을 조직했다’는 명분으로 공격했다. 매일 거듭되는 성토에 성종도 어쩔 수가 없었다. 임사홍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는 성종이 임사홍을 배려한 벌이었다. 당시 조정에서 임사홍을 변호하고 엄호해 준 인물은 없었다. 어느덧, 임사홍은 자신도 모르게 조정 관리들의 공적이 되어 있었다.

성종의 측근에서 총애를 받던 신분에서 유배형에 처해지자 곁에 있던 모든 사람이 사라졌다. 임사홍은 권력 무상을 깨달았다. 그는 글을 쓰고 유배지 아이들을 가르치며 세월을 보냈다. 성종은 임사홍을 잊지 않았다. 그를 다시 불러들일 수는 없었지만 딸 휘숙옹주를 임사홍의 둘째 아들 임숭재와 결혼시켰다.

1491년 유배형에 처해지고 관직을 삭탈 당한 지 12년 만에 임사홍은 승정원 도승지로 정계에 복귀했다. 무려 12년간의 공백이 억울했지만 간관들은 임사홍을 집요하게 탄핵했다. 임사홍의 모든 언행이 탄핵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임사홍이 복권해 권력의 중심으로 입성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때 임사홍이 탄핵되어 그 솜씨 좋은 학문과 글씨로 후학이나 가르치며 생을 보냈다면 임사홍 개인도, 연산군도, 조선의 역사도 조금은 변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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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간 유배, 독한 복수를 다짐하다 1494년, 임사홍이 50세가 되는 해에 연산군이 19세로 왕위에 올랐다. 임사홍은 연산군 치하에서 그야말로 매일 일희일비를 겪었다. 연산은 임사홍을 승진시켜 가선 상호군에 임명했다. 간관들은 여전히 “임사홍을 승진시키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라고 상소를 올렸지만 독불장군에 불통의 아이콘 연산군은 간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것은 임사홍을 아끼고 신뢰해서가 아니라 대신들의 주장을 들어주기 싫은 마음이 더 컸다. 연산군은 성종 시대의 대신들과 간관들이 젊은 군주인 자신을 길들인다고 여긴 것이다. 연산군의 측근 자리는 임사홍이 아닌 그의 둘째 아들 임숭재의 몫이었다. 연산군은 자신의 혈육 중에서 임숭재의 부인인 휘숙옹주를 유난히 아꼈다.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김종직이 세조의 찬탈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조의제문’을 쓴 것을 <성종실록>을 편찬하던 이극돈이 발견해 유자광에게 알렸다. 서자 출신으로 사대부의 멸시와 천대를 받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벼슬길에 올랐던 유자광은 이를 기회로 여겼다. 그는 연산군에게 이를 고했고 연산군은 김종직과 사림파에 대한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임사홍을 비롯한 훈구파는 이 같은 연산군의 폭주를 묵인했다. 무오사화는 유자광의 복수, 훈구파의 묵인, 연산군의 사림파 군기 잡기라는 세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사건이었다. 무오사화에서 임사홍은 역할도, 피해도 없었지만 그의 셋째 아들 임희재가 연루되었다. 총명하고 바른 성품의 임희재는 아버지나 형들과 달리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였다. 임희재는 사림파라는 이유로 함경도로 귀양 보내졌다. 임희재의 존재는 임사홍에게 또 하나의 굴레였다. 그는 아들의 ‘충성스럽지 못한 행동’을 극복하고 희석시키기 위해 더욱 간신의 역할을 자임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이때까지도 권부의 핵심에 입성하지 못한 임사홍은 일거에 정세를 뒤집을 카드를 찾고 있었다. 임사홍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연산군 외할머니 신 씨의 존재였다. 임사홍은 폐비 윤 씨의 생모 신 씨를 연산군과 만나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연산군은 정현왕후가 자신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모는 성종에게 대역죄를 저질러 사약을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연산군에게는 ‘나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콤플렉스가 있었다.

연산군은 생모 윤 씨를 복권시키려 했지만 훈구파와 사림파 모두가 반대했다. 임사홍, 신수근, 유자광 정도가 연산군의 뜻을 옳다고 받아들였다. 이때도 임사홍의 아들 임희재는 앞장서서 반대 주장을 폈다. 연산군은 일단 자신의 뜻을 접었다.

그때 임숭재가 사가에 연산군을 초대해 주연을 열었다. 그리고 임사홍이 와 있음을 알리자 연산군은 임사홍과 합석했다. 임사홍은 비통한 표정으로 연산군을 바라보며 폐비 윤 씨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연산군의 외할머니 신 씨를 그 자리에 불렀다. 연산군은 외할머니의 생존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신 씨가 전해 준 어머니의 피 묻은 적삼을 보고 눈이 뒤집혔다. 여기에 임사홍이 기름을 부었다. 그는 성종 대의 궁중 암투, 훈구 사림파가 어떻게 폐비 문제에 관여했는지 소상하게 설명했다.

연산군은 곧바로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윤필상, 김굉필은 사형에 처해졌고, 한명회, 정여창,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했다. 성종의 후궁들은 연산군에게 직접적인 폭력을 당했고 할머니 인수대비 역시 연산군에게 폭언을 듣기도 했다. 연산군은 모두 잡아들였다. 임사홍의 아들 임희재는 물론이고 외사촌인 남곤도 사형 당할 지경이었지만 임사홍은 그들을 구하려는 시도도, 변호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런 행동을 했다면 임사홍 역시 무사하지 못할 정도로 연산군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사림파는 뿌리가 흔들릴 정도로 숙청을 당했다.

임사홍이 폐비 윤 씨 사건을 일으킨 것은 권력의 중심에 들어서려는 의도였다. 또 임사홍이 자신의 복수를 하려는 목적이었다는 기록도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결과는 자신의 아들도 희생 당한 강력한 피바람이 되었다. 사실 갑자사화는 무오사화를 통해 사림파를 숙청해 왕권을 강화한 연산군이 다시금 왕권에 도전하는 모든 세력을 제거하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임희재가 죽던 날, 임사홍은 평소처럼 잔치를 벌이고 술을 먹었다고 한다. 연산군은 사람을 보내 임사홍을 감시하게 했고, 그가 술잔치를 벌인다는 소리를 듣고서야 임사홍에 대한 의심을 풀었다고 한다. 이 부분에는 여러 기록이 있다. 임사홍이 밤늦게 임희재의 죽음을 슬퍼하며 대성통곡했다는 설도 있고, 임희재가 무오사화 때부터 연산군의 눈에 벗어나 그 최후가 예정되어 있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것이라 해도 임사홍은 권력을 위해 아들의 죽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비정한 아버지, 탐욕을 앞세워 정적을 숙청하고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간신이라는 점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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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실한 하수인의 비참한 최후

갑자사화 이후 임사홍은 권력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러면서 과거 성종의 총애를 받았던 임사홍의 장점은 모두 사라지고 간신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임사홍에게 정적을 모두 숙청하면서 권력의 달콤함을 안겼던 갑자사화였으나 그로 인해 아들을 잃는 비극을 맞았다. 더구나 큰아들 광재는 1495년에, 그리고 숭재는 1505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무리 권력과 부를 손에 쥐었지만 임사홍은 아들 셋을 자신보다 앞서 보내면서 인생무상을 느꼈을 것이다. 그 뒤부터 임사홍은 변했다. 더욱 간특해지고 잔혹해졌다. 자신을 비방하거나 무시했던 관리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기필코 복수를 했다. 조정의 모든 대신과 관리들은 임사홍을 두려워했고 당대의 권력자인 신수근조차 임사홍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정도였다. 그는 더욱 권력에 집착하고 연산군의 폭주를 부추겼다.

임사홍은 이조 판서, 병조 판서를 차례로 맡았다. 하지만 그의 임무는 고작 채홍사가 되어 연산군의 후궁을 뽑는 일이었다. 기록을 보면 이 채홍사 임무에 임사홍이 한편으로는 적극적이었다는 부분도 있고, ‘일국의 대신에게 기껏 여자나 고르는 일을 주다니’ 하고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껴 일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부분도 있다. 해서 연산군이 임사홍에게 “제대로 채홍사를 못한다”고 질책했다는 기록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임사홍이 채홍사 노릇을 한 것은 사실이고 이 사실로 인해 임사홍은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조정의 대신으로서 체면과 도리를 못했다’는 비난을 받고 간신으로 낙인 찍혔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질주했다. 아무도 그에게 간언을 하지 못하자 연산군의 패륜과 악행은 그 도를 넘어섰다. 연산군은 쾌락과 향락만 좇았다. 전국의 기생들을 모아 ‘운평’이라 칭하고 이들을 대궐에서 기거하게 했다. 그 규모가 커져 약 1만 명에 달했고 이들이 먹고 입는 모든 비용은 백성들의 몫이 됐다. 연산군은 금도를 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기생들을 향락 대상으로 삼았지만 나중에는 관리나 사대부의 부인은 물론이고 종실의 여인들까지 범하면서 군주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도 최소한의 도덕과 양심을 벗어났다.

아버지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은 연산군에게는 큰아버지이다. 그의 부인 박 씨는 미인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연산군은 백모 박 씨를 강제로 범했고, 박 씨는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고 말았다. 박 씨의 동생은 도총관 박원종이었다. 그는 연산군을 반정으로 몰아내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당시 임사홍은 연산군의 하수인으로, 때로는 조력자로 행동했다. 임사홍 역시 멈추지 못하고 멸망의 늪으로 점점 빠져든 것이다.

1506년, 박원종은 유순정, 성희안,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을 같은 편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좌의정 신수근이었다. 그는 연산군의 처남이었다. 박원종은 연산을 몰아내고 다음 보위에 진성대군을 앉히자고 신수근을 설득했다. 진성대군은 신수근의 사위이다. 신수근은 결국 처남, 사위 중에서 사위를 선택했다. 박원종은 군사를 휘몰아 경복궁으로 들어가 연산군을 잡았다. 그리고 반정군은 제일 먼저 연산 정권의 실력자 임사홍을 잡아 그 자리에서 때려 죽였다. 임사홍은 그 동안의 권세와 영화가 무색하게도 하루아침에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그의 시신은 여주 선산에 묻혔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반정군은 임사홍에게 처절한 복수를 가했다. 의금부에서 중종에게 임사홍의 죄를 다시 알리며 그의 부관참시를 주장했던 것이다.

“임사홍은 성종 대에 붕당을 조직하고 조정을 어지럽혀 벌을 받아야 하지만 오히려 임금에게 은혜를 입었습니다. 또한 연산군 대에는 아들 임숭재를 앞세워 장녹수에게 아부하여 온갖 악한 일을 자행했습니다. 그로 인해 충직한 사람은 다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으며 임금을 불의의 길로 인도해 종사를 위태롭게 했습니다. 그의 죄를 다시 물어 부관참시하고 모든 재산과 집을 몰수해야 합니다.”

임사홍은 맞아 죽어 선산에 묻힌 지 20일 만에 다시 시신의 목이 잘리는 참형을 당했다. 간신의 비참한 최후라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형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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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세학 | 조직에서 명예를 주겠다? 그것은 천천히 나가라는 뜻 임사홍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간신이라는 말로 대신한다. 그 어떤 수식어도 인간을 규정하는 말로서 이 간명하고도 강렬한 단어를 넘어설 수 없다. 하지만 임사홍을 다른 시각에서 조명해 보는 것은 그의 재주가 아깝기 때문이다. 그는 글과 글씨에서 탁월했고 특히 글씨는 당대 최고로 손꼽힐 정도였다. 또한 집안 덕에 음서로 출사했지만 18세에 과거에도 급제한 실력을 갖추었고 관리 초임 시절 누구보다 강직하고 곧은 성품으로 고위 관리들의 언행과 업무에 엄격한 눈을 갖고 있어 간관들의 역할을 대신할 정도였다.

현명한 리더십을 갖춘 1인자 성종은 임사홍을 특별히 아끼고 신뢰해 중용했다. 20대에 도승지에 임명했고 간관과 다른 관리들이 임사홍을 탄핵하고 비난해도 그를 엄호했다. 간관이 ‘임사홍을 파직하라’는 상소를 올리자 오히려 “그렇다면 임사홍이 저지른 잘못과 악행을 내 앞에서 구체적으로 말해 보라”고 말할 정도였다. 물론 성종이 인간 임사홍의 깊숙한 내면과 그의 세포에 숨겨진 탐욕과 이기심, 거짓의 DNA을 세밀히 파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해서 임사홍은 그 누구보다 성종 대에는 충신까지는 아니었더라도 관리로서는 능력, 역할, 인품에서 부족하지 않았다. 물론 사대부들이 쓰는 ‘욕’ 중 가장 강도가 강한 ‘소인’이라는 말을 들은 임사홍이기는 했다. 아마도 위로는 1인자인 성종과 성종 정권의 지분을 갖고 있는 대주주인 한명회, 신숙주부터 아래로는 일개 지방관까지, 가리지 않고 잘못을 지적한 임사홍의 융통성, 유연성 없는 엄격함의 결과겠지만 임사홍 자체의 인격이 배려, 소통, 이해에서는 모자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연산군이라는 최고의 폭군 대에서는 180도 변신해 천하의 간신이 되었다. 그는 마치 성종 시대의 엄격한 관리처럼, 완벽한 간신의 역할을 다했다. 이런 전격적인 인격 이탈, 혹은 역할 바꿈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소한 이유로 권력과 중앙 무대에서 12년간 멀어졌던 사건이었다. 촉망 받는 엘리트에서 하루아침에 기약 없는 유배에 처해지자 임사홍은 자신의 처신, 잘못에 대한 반성보다 ‘복수’를 마음속에 키운 것이다.

임사홍은 충신과 간신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개인적인 능력도 있었고, 그 자신이 왕실과 결혼했으며 두 아들 역시 임금의 사위가 되면서 왕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임사홍은 두 가지 선택지에서 전반은 충신을, 후반은 간신을 선택했다. 그는 욕심이 많았다. 최선을 다했지만 충신도 명신도 되지 못하고 오히려 적을 만들었고 ‘억울한 귀양살이’를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후반전, 그는 전반과는 반대 작전을 세웠다. ‘1인자의 총애를 받기 위해 어떤 짓도 할 수 있다’ ‘적은 보이는 대로 제거해야 후환이 없다’ 등의 처세로 전환한 것이다. 이 작전은 성공했다. 적어도 1인자가 존재할 때까지 말이다. 임사홍 역시 연산군이 반정으로 쫓겨나고 자신은 두 번의 죽임을 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임사홍과 연산군은 30년의 나이 차가 있었다. 그는 자연의 섭리인 자신의 물리적 죽음만을 예상하고 연산군에게 올인했던 것이다.

조직은 생물이다. 엄격하고 원칙적이며 전혀 움직일 것 같지 않지만 의외로 변동이 가능하고 다양한 형태로 변환된다. 그 이유는 조직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 바로 무쌍하게 변하는 인간 때문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명예와 권력, 돈을 모두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설사 그것을 얻어도 그 유통 기한은 생각보다 짧다.

우리는 알고 있다. 회사의 여러 자리 중에서 명예직인 것과 장차 회사의 중추가 될 실력자를 기르는 힘 있는 자리가 어떤 것인지를. 명예직에서 힘 있는 자리로 가기 위한 통로는 매우 좁다. 그 이유 중에서 가장 큰 것은 회사는 선례를 남기는 것을 굉장히 꺼려한다는 것이다. 좌천과 은퇴로 가는 전 단계의 자리는 그 결과가 좌천과 은퇴로 남아야 하는 것이 ‘효율’을 강조하는 회사가 조직을 운용하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회사도 ‘명예와 힘, 두 가지 선택지’를 조직원에게 주지 않는다. 병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명예의 선택지가 주어지면 그것은 연착륙이고, 힘이 주어지면 더 높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높이 나는 것보다 오래 날아가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다. 역사에서 또 배운다. 임사홍은 자신의 선택지를 스스로 만들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간신으로, 또 역사의 죄인으로 만든 것이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31호 (18.06.05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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