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경의 내맘대로 본다

누구에게나 배울 점은 있다

방송인·작가
한 중년 남성이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바닥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고를 등지고 앉아 있는 모습이 사뭇 경건했다. 정적을 깨는 셔터소리가 미안했다./정지윤기자 color@kyunghyang.com

한 중년 남성이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바닥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고를 등지고 앉아 있는 모습이 사뭇 경건했다. 정적을 깨는 셔터소리가 미안했다./정지윤기자 color@kyunghyang.com

책구경을 하러 서점에 갔다가 조금 당혹스러웠다.

베스트셀러 코너에 진열된 책들이 온통 만화와 동화의 주인공이 들려주는, 혹은 그들에게서 배운 내용을 담은 책들이어서다.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보노보노의 인생 상담> <스누피와 친구들의 인생 가이드> <도라에몽이 전하는 말> <빨간머리 앤이 하는 말> 등등 온갖 만화의 주인공들이 전하는 교훈서들이 아동 도서가 아닌 베스트셀러 매대에 가득했다.

<빨간머리 앤이 하는 말>을 지난해 처음 읽었을 때는 어린시절에 읽었던 빨간머리 앤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백영옥 작가의 따뜻하고 섬세한 문장도 마음에 들어 딸에게도 권했다. 그런데 그후 만화책의 주인공들, 대부분 동물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담은 아류작이 줄줄이 나오자 출판사들의 얄팍한 마케팅에 살짝 실망했다.

“석학들이나 한 분야에 수십년을 바친 전문가들이 쓴 책은 초판도 팔리기 어려운데 만화책을 적당히 편집한 책들이 이렇게 잘 팔리다니…. 이러다가 <바퀴벌레에게 배우는 생존법> <고슴도치가 전하는 아파도 괜찮아 사랑법> <나무늘보가 말하는 게으름의 미학> 등등 온갖 동물과 곤충들이 다 등장하는 것 아닌가?”

출판계의 주요 고객인 2030 여성들에게‘왜 이런 책을 사는가’를 물었더니 이런 답들이 돌아왔다.

“무엇보다 책 표지가 예쁘쟎아요. 귀여운 곰돌이 푸나 수달 보노보노가 그려진 책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인스타그램 등 sns에 올리면 더 사랑스럽게 보이죠.”

“음….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들이 쓴 자기계발 관련 책도 읽어봤는데요. 너무 어렵거나 지나치게 교훈적이어서 자극을 받기보다 열등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냥 이번 생은 망했다 싶더라고요. 그런데 이런 책들은 어린 시절의 친구가 토닥토닥 위로해주는듯한 느낌을 받아요. 빨간머리 앤이건 곰돌이 푸건 완벽한 주인공은 아니쟎아요. 실수해도 된다고, 작은 일에 기뻐하라고 가볍게 이야기해줘서 좋아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얼마나 편견에 가득한 기성세대인가를 실감했다. 꼭 하바드대학 교수의 강의나 종교지도자들에게서만 배울게 있는게 아니다. 노벨문학상이나 콩쿠르상 수상작만 읽을 필요도 없다. 어떤 이유로건 책을 친근하게 받아들이고 단 한 줄이라도 교훈이나 감동을 느끼면 그게 책의 효능이다. 덕분에 책이 잘 팔리면 출판계나 책방도 좋고….

그러고보니 지식만 풍부할 뿐 인성은 형편없는 이들, 나이만 많다고 무조건 충고만 늘어놓는 어른보다 어린이, 무학의 시골 아낙, 심지어 우리집 강아지에게 배우는 지혜나 삶의 철학이 더욱 깊고 풍성한 경우가 많다.

언젠가 시골 장터에서 나물을 샀는데 할머니가 엄청 많이 담아주셨다. “이렇게 많이 주셔서 남는게 있나요?”라고 감사함을 표하자 “땡볕에서 나물들이 더 시들시들해지기 전에 빨리 팔라 그래. 나도 머리쓰는겨.”라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소박하고 진솔한 말에 나도 미소가 지어졌다. 우리집 강아지는 내가 집에 오면 온 몸을 다해 격렬하게 반가움을 표현한다. 꼬리를 흔들고 양발을 들고 숨까지 가쁘게 몰아쉰다. 내가 가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면 그저 가만히 곁에 앉아 ‘괜찮아요. 다들 그럴 때가 있어요’란 눈빛을 보낸다. 진정한 위로는 말이 필요없고 곁에 있어주거나 어깨를 빌려주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안다는 듯이... 비록 꼬리치며 달려오는 것이 나에 대한 반가움과 그리움이 아니라 ‘뭐 밖에서 가져온 먹거리는 없수?’라는 개들의 본능일지라도, 강아지들은 밥을 주는 주인 곁에 있어야 안정감을 느낀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 강아지의 해맑은 눈빛에서 평화를 느낀다.

새삼 피천득 시인의 오월이란 시의 한 귀절이 떠오른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지금 나는 오월속에 있다.-

신록이 빛나는 오월. 괜히 어른다워야한다는 무게감을 벗어버리고 이젠 가볍고 순수한 기쁨을 배워야겠다. 어린 아이건 동물이건 누구에게서나 배울 것은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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