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풋볼] 평범한 여자들도 축구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의 곳곳에서 축구에 푹 빠진 여자들이 열렬히 축구를 하고 있다. 해외축구와 K리그를 보며 천국과 지옥을 오가다가 급기야 덜컥 아마추어 여자축구팀에 입단, 지금은 축구를 직접 하며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있는 김혼비의 생애 첫 축구도전기이자 축구하는 여자들의 이야기. 피치 위에 더 많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새겨지기를 바라며. [편집자주]

# 축구와 여자 사이, 멀고도 먼

“같이 축구하는 사람들 어때? 뭐하는 사람들이야?”

축구를 시작하고 주변에서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다. 여러 번 받다 보니 나중에는 이 질문의 숨은 속내가 ‘같이 축구하는 여자들 유별나지? 무섭지? 성격 세지?’, ‘대체 뭐하는 여자들이길래 하필 축구 같은 걸 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글자로 보면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지만(실제로 그런 면이 아예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는 신기해하는 느낌에 좀 더 가깝다. 여러 면에서 ‘여자가 취미로 축구하는 이야기’는 그 유명한 ‘남자가 군대에서 축구하는 이야기’의 정반대편에 서 있는 것 같은데, 특히 희소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국에서 축구라는 운동이 여자들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생각하면 당연하다.

유독 축구는 어려서부터 남자들의 운동이었다. 함께 땅따먹기를 하고 얼음땡을 하던 친구놈들 중 사내 녀석들은 언젠가부터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며 축구를 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체육시간에도 그랬다. 공을 가지고 노는 시간이면 선생님은 어김없이 남자들에게는 축구, 여자들에게는 발야구나 피구를 시켰다.

발야구나 피구라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애매한 운동 아닌가. 단지 올림픽 공식 종목에 포함되지 않는 스포츠라서가 아니라 게임 방식이나 룰을 따져 봐도 그렇다. 축구가 바둑이라면 발야구는 오목 정도의 느낌이고 피구는...... 알까기? 공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여러 사건들 중 던져서 사람 맞춰 내보내기라니. 바둑알 튕겨 맞춰 내보내는 알까기의 정신이랑 다를 게 뭔가.

게임의 짜임새가 피구보다 촘촘하기 때문에 오목에 비견하기는 했지만 발야구는 좀 더 미묘하다. 태생 자체가 야구와 축구를 8:2 정도로 이종 교배한 느낌인데, 몇 십 년 후 한국의 인터넷 신조어에 ‘발’이라는 부정적 접두어가 생기면서(대표적인 예로 ‘발연기’가 있다) 야구팬들이 엉망인 경기력을 펼친 팀이나 선수를 조롱하면서 쓰는 말이 ‘야구를 발로 한다’고 해서 ‘발야구’가 되어버렸다. 축구팬들도 ‘발야구’를 쓴다. 선수가 골대 앞 슈팅 찬스에서 공을 터무니없이 높이 날려버렸을 때 ‘골대 앞에서 홈런이나 날린다’며 조롱조로 쓰곤 한다. 내가 체육시간에 신나서 발야구를 할 때만 해도(투덜대기는 했지만 발야구도 피구도 꽤나 좋아했다) 이런 용법으로 쓰일 줄은 몰랐는데 요즘 들어 이래저래 욕으로 쓰이는 걸 보니 조금 불쌍해지려고 그런다. 마치 ’이명박‘이라는 이름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평화롭게 잘 살아오다가 시대가 바뀌면서 갑자기 욕 들어먹고 사는 것과 비슷한 운명이랄까.

중고등학교 올라가서도 마찬가지. 여자들에게 배구, 핸드볼, 농구 등은 서브라든가 3점슛 등으로 실기시험 종목에 포함되기도 했지만, 축구는 선택지에 없었다(요즘 친구들은 어떤지 모르겠다). 어쩌다 할 기회가 생긴다 해도 남자들 사이에 섞여 깍두기처럼 하거나 약식으로 하지, 11명이 포메이션 딱 갖춰 오프사이드룰까지 엄격히 적용해서 제대로 해본 여자는 거의 없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 이미 축구보다 훨씬 쉽게 시작하고 배울 수 있는 운동이 주위에 많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필라테스, 요가, 발레, 크로스핏 등은 어딘가 ‘힙’한 구석도 있으면서 몸매를 다듬고 필요한 근육을 붙이는 데 최적화된 운동들이다. 좀 더 클래식하게는 테니스와 골프처럼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운동들이 있다. 운동복도 예쁘고 라켓이나 골프채를 잡고 스윙하는 동작들도 우아한, 부르디외가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데에 유용한 수단”이라고까지 말한 바 있는 운동들이다. 터프한 계열로 가면 격투기나 킥복싱 같은 것이 있다. 높은 강도의 운동으로 강한 단련을 받고 싶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높아 수요층이 꽤 있다.

이 사이에서 축구는…… 애매하다. 일단 축구가 운동으로서 신체에 미치는 장점부터가 뚜렷하지 않다. 그냥 열심히 뛰어다니면 운동도 되고 다이어트도 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 정도로는 앞의 운동들에 밀린다. 오히려 축구는 현대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신체적‧미적 기준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결과를 가져온다. 꾸준히 하면 근육이 종아리에 붙어 매끈한 다리에 알통이 생기고, 땡볕에 두세 시간씩 노출되기 때문에 피부에도 좋지 않다.

그렇다고 터프한 이미지 쪽에 점수를 줄 것인가 하면 그건 또 격투기나 킥복싱 같은 운동에 밀린다. 이종격투기 하면 카리스마 넘치는 강인함이 떠오르는데, 축구 하면 우악스러움에 가까운 억셈이 떠오른다. 게다가 격투기 같은 운동들은 호신용 기술이라도 익힐 수 있지만 축구는 일상에서 써먹을 데가 거의 없다. 한다면 길에 굴러다니는 우유팩이나 쓰레기를 살살 쓰레기통 앞까지 몰고 가기? 이게 딱히 동네 환경미화에 기여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렇게 운동 효과 면에서나 대외 이미지 면에서나 일상 활용성 면에서 모두 애매하디애매한 운동이면서, 결정적으로 접근성까지 낮다. 다른 운동처럼 여기저기 배울 곳이 있고 정보가 널려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경로로 열심히 검색해봐야 하나씩 겨우 나온다. 이 모든 것이 여자들이 그라운드로 진입하는 것을 겹겹이 막으며 철통수비하고 있다. 축구로 입문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하나의 축구인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축구를 하는 여자들이 있다. 나는 저런 철통수비를 뚫고 축구를 선택한, 특히 성인이 된 이후 처음으로 축구를 시작한 여자들의 특별한 계기들이 항상 궁금했다. 대체 뭐가 그녀들로 하여금 이 우악스럽고 별 도움도 안 되면서 접근성까지 낮은 운동을 하게 만들었는가.

# 체육소녀, 호나우두와 직관을 만나다

“그러는 너는? 너는 대체 왜 했는데?”라고 묻는다면 중고등학교 시절로 다시 한 번 거슬러 올라가야겠다. 친구들 대부분이 문학소녀로 한 시절을 보내는 동안 나는 체육소녀로 운동장을 지켰다. 틈만 나면 나가 농구를 하고 배구도 했다. 점심시간 끝나는 예비종이 울리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땀이 뒤범벅된 채 수돗가로 달려가 쏟아지는 수돗물에 머리통만 쏙 들이밀고 몇 초 동안 샤워에 가까운 세수를 하고 있다가 머리끝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교실로 돌아와 교복으로 갈아입고 5교시를 맞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래서 오후수업에 많이 졸았다. 오전과 오후의 내 상태 편차가 어찌나 컸는지 국사 선생님이 나를 AM 김혼비, PM 김혼비로 나눠서 부를 정도였다(이 선견지명 있었던 작명법은 훗날 JYP가 소속사 아이돌 그룹의 이름을 2AM과 2PM으로 나눠 붙인 것의 전신이라고 가히 우겨볼 만하다).

그만큼 좋아했고 소질도 있어 운동은 항상 내 편이었다. 가사 실기에서 가차 없이 깎여나가곤 했던 내신 점수를(가사 선생님은 내 바느질 천을 빌려가서는 다른 반을 돌아다니며 ‘절대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용례’로 보여주곤 했다) 메워준 것은 항상 체육 실기였다. 대학교 OT에서 여자들끼리 한 과 대항 피구시합(그렇다. 역시 이때도 남자는 축구를, 여자는 피구를 했다!)에서 MVP로 뽑힌 후 학교 매점에서 종종 다른 과 학생들과 마주치면 “그때 김혼비님 공에 어깨 맞고 나갔던 사람입니다. 정말 아팠지만 멋있었어요”, “김혼비님이 휘감아 던지는 공에 맞으면 죽을 것 같아 그냥 금 밟고 죽어서 나간 사람입니다. 피구의 신 같으셨어요” 같은 말과 함께 캔음료를 선물 받기도 했다. 그런 내가 가장 즐겨 보는 운동이 축구였다.

어렸을 때는 또래 아이들처럼 야구를 더 좋아했다. 하지만 대우 로얄즈 팬이었던 아버지 어깨너머로 축구를 슬금슬금 보면서 그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는데, ‘인생의 많은 시간을 축구 보는 데 써도 아깝지 않겠어!’라고 느낄 만큼 본격적으로 빠져들었던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후였다. 그리고 그 매료의 순간에는 지금은 은퇴한 브라질의 축구 황제 호나우두의 ‘스텝오버’가 있었다.

스텝오버Step Over는 흔히 ‘헛다리짚기’라고 불린다. 수비수를 속이는 페인트 기술 중 하나다. 어느 한 방향으로 공을 몰고 갈 것처럼 다리를 공 위로 감싸듯 휘젓는데, 실제로는 공을 전혀 건드리지 않고 헛으로 다리를 짚는다고 해서 ‘헛다리’라고 한다. 스텝오버는 그런 헛다리를 양다리로 연속해서 짚으며 수비수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그래, 이영표가 잘하는 그거.

어느 날 우연히 호나우두가 스텝오버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이다. 보통 헛다리를 짚을 때는 달리는 속도가 확 줄기 마련인데 그런 기색 하나 없이 수비수들을 휙휙 제치고 죽죽 나아가고 있었다. 아니, 저게 가능해? 물리학적으로 말이 돼? 마지막에는 골키퍼까지 스텝오버로 제치고 골을 꽂아 넣는데 와, 축구가 저렇게까지 아름다울 노릇인가 어이없을 정도였다. 우아한 헛다리와 그물 안으로 감겨들어가는 공의 궤적과 관중들의 얼굴에 역력한 감동의 흔적. 어마어마한 규모의 관중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지만 세상이 잠시 숨을 죽인 것 같은 시간이었다. 그때부터 축구에 본격적으로 빠져들어 오랫동안 호나우두를 따라다니며 해외축구를 찾아봤다(새벽 중계가 대부분이어서 오랜만에 AM 김혼비가 맹활약했다).

호나우두가 은퇴한 후에는 한동안 축구를 보지 않았다. 운동을 보지도 하지도 않았던, 내 인생의 가장 긴 스포츠 공백기였는데, 거기에 다시 축구공을 뻥 차서 넣은 것은 오랜 K리그 팬인 (지금의 남편인) 애인이었다. 그를 따라 처음으로 축구장에 갔다가 ‘직관’의 매력에 사로잡혀 그날로 K리그 팬이 되어 틈만 나면 축구장에 갔다. 영국 소설가 J. B. 프리스틀리의 묘사처럼 경기장 입구가 “훨씬 황홀한 다른 인생을 약속하는 것”으로까지 보인 건 아니었지만, ‘직관’은 확실히 또 다른 세계였다. TV나 모니터를 통해서, 중계 카메라가 조망하는 시선을 빌려서가 아닌, 내 오감으로 직접 겪어내는 축구는 마음뿐만 아니라 몸속 깊숙이 새겨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날 불현듯 몸속 깊이 들어와 어딘가에 흐르고 있을 이 축구의 리듬을 내 몸으로 직접 타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나의 선수들이 필드 위에서 하고 있는 것들을 나도 해보고 싶다! 그때부터였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여자축구팀 정보를 찾기 시작한 건. 체육소녀가 열혈축구팬이 되었을 때 넘어갈 다음 코스로 여자축구팀 선수만 한 것도 없지 않은가.

사소하다면 사소하지만 축구팀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이유는 또 있었다. 축구팀에는 축구팬, 특히 K리그 팬들이 많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던 것이다. 주변에 해외축구나 국가대표 경기를 보는 사람은 제법 있어도 K리그 팬은 전무하다시피 하기 때문에(아니, 스타디움을 채우는 몇천의 K리그 팬들은 축구장 출구를 빠져나가자마자 하늘로 증발해버리는 것인가! 대체 다들 어디 있어요?) K리그에 애정이 깊은 여자 팬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축구를 할 정도로 축구에 애정이 깊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K리그를 화제 삼아 말이 통하고, 호나우두의 스텝오버가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지 알고 있으며, 각자의 마음속에 호나우두의 스텝오버 같은 순간을 하나쯤 소중히 품고 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이게 내가 막연히 가지고 있었던 축구팀의 이미지였다.

글=김혼비(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저자)


저작권자 © 인터풋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