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누나' 떠나도 배우들은 남았다 "닮아서 잘 어울리나봐요"

민경원 2018. 5. 28.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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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 연상연하 커플로 호흡을 맞춘 배우 손예진과 정해인. [사진 JTBC]
드라마는 끝났지만 배우는 남았다. JTBC 금토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김은 극본, 안판석 연출) 얘기다. 실제로 드라마는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멜로가 아닌 현실 잔혹사에 가까우리 만치 지지부진하게 흘러갔지만, 극 중 연상연하 커플로 등장한 손예진(36)과 정해인(30)은 굿데이터코퍼레이션 화제성 조사에서 방송 내내 1, 2위를 다투며 인기를 과시했다.

종영 후 서울 소격동에서 만난 손예진은 “대본을 끝까지 다 보고 출연을 결정했는데 15~16부가 특히 좋았다”고 말했다. 한 가족처럼 자란 두 사람이 가족의 반대로 헤어지고, 직장 내 성추행에 맞서 법정 싸움을 벌이느라 3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제자리걸음인 윤진아(손예진 분)의 모습에 많은 시청자들이 답답함을 토로한 것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회사에 만연하던 불의에도 웃어넘기던 윤진아가 자신을 조건 없이 사랑해주는 남자 서준희(정해인 분)를 만나 스스로 소중히 여기고 변화하기 시작했던 전반부와 달리 되려 퇴보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이어졌다.

손예진은 "드라마를 보면서 어떤 부분에서 답답해할지 눈에 보였다"면서도 "하지만 그 부분이 조금씩 바뀌었다면 전혀 다른 드라마가 됐을 것"이라며 결말에 만족감을 표했다.[사진 엠에스팀엔터테인먼트]
손예진의 설명은 서글프지만 명쾌했다. “기존의 드라마 캐릭터는 사건을 통해 아픔을 겪고 나면 아주 빠르게 성장하죠. 처음엔 못하던 걸 갑자기 잘하게 되고. 그런데 그건 우리가 보고 싶은 인간의 모습이죠. 사람은 계속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가는데. 실제로 회사에서도 피해자가 가해자를 향해 미투(MeToo) 선언을 하고 나면 몇 년간 이어지는 싸움에 결국 무너져버린다면서요. 그러니 이편이 더 현실적인 거 아닐까요.”

이는 안판석 PD의 전공분야이기도 하다. ‘아내의 자격’(2012)은 멜로, ‘풍문으로 들었소’(2015)는 가족극 같지만 실은 현미경을 들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부조리함을 낱낱이 들여다보는 풍자극에 가깝다. 정해인은 “5분짜리 장면이면 촬영 시간도 5분이었다. 대부분 롱테이크인데다 한 번에 끝나니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박살 날 수밖에 없는 공포의 현장이었다”고 고백했다. 별도 리허설도 없고, 카메라 세팅도 바뀌지 않으니 현실과 흡사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연출이 가능했지만, 첫 주연을 맡은 배우에게는 쉽지 않은 도전이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카메라 위치가 바뀌지 않고 한 번에 찍은 분량이 많아 배우 옆모습이나 뒷모습도 종종 화면에 등장했다. 이같은 앵글은 몰입감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사진 JTBC]
옆에서 훔쳐보는 듯한 앵글 덕에 ‘하이퍼 리얼리즘(극사실주의) 드라마’라는 별명도 얻었다. 두 사람이 데이트할 때면 시청자들도 함께 가상연애를 즐기고, 엄마(길해연 분)가 모진 말로 이들 가슴에 대못을 박을 때는 같이 부아가 치미는 경험을 선사한 덕이다. 정해인은 “연기를 덜 하는 방법을 배웠다” 했고, 손예진은 “캐릭터의 여백을 느낌과 향기로 전하고자 노력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이 “실제 사귀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계속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주어진 기회는 한 번뿐이니 촬영 전 소통이 필수. 손예진은 “남자친구가 있는 상태에서 억지로 선을 볼 때도 예뻐 보이고 싶은 게 여자 마음인 것 같다”며 “너무 꾸민 것이 이상해 보이지 않도록 ‘왜 이렇게 예쁘게 하고 갔냐’는 애드리브를 부탁했다”고 말했다. 정해인은 “처음엔 대선배라 아주 어렵고 무서웠는데 너무 잘 웃어서 무장해제됐다”고 밝혔다. 손예진은 “스태프들도 하도 많이 물어봐서 둘이 같이 찍은 사진을 봤더니 생김새나 분위기가 좀 닮은 것 같다”며 자체 분석 이유를 내놓기도 했다.

정해인은 "평소 운동을 좋아해 꾸준히 하는 편인데 부엌 신에서 갑자기 상의 탈의 설정이 추가돼 미처 준비를 하지 못했다"며 "완벽한 복근을 보여드리지 못해 아쉬웠다"고 말했다. [사진 FNC엔터테인먼트]
서로에 대한 칭찬도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정해인을 상대역으로 추천한 손예진은 “내가 그리던 준희 이미지와 잘 어울리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다”며 “간혹 현장 지시에 따라 연기 스타일을 바꿔야 할 때가 있는데 전환이 무척 빨라 더 놀랐다”고 말했다. 정해인은 “보통 신인에게 열정을 말하는데 누나는 연기에 임하는 자세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안판석 PD는 대기실에서 촬영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손예진을 두고 링에 오르는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에 비유하기도 했다.
손예진은 "극 중 진아와 나이가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직장 생활의 어려움이나 부모님의 결혼 반대 등은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는 일들이었다"고 말했다. [사진 엠에스팀엔터테인먼트]
여기엔 원톱 여배우로서 고충이 담겨 있기도 하다.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타이틀롤을 맡을 수 있는 30대 여배우가 손에 꼽는 탓이다. 손예진은 “촬영 전 화장실에서 손을 씻을 때면 마치 수술에 들어가는 의사가 된 기분이 들 때가 있다”며 ‘덕혜옹주’(2016) 이후 가중된 부담감을 토로했다. “여름 극장가는 죄다 블록버스터에 남자 영화잖아요. 이게 안 되면 여자 영화는 앞으로 더 안 만들어지겠지 하는 마음에 자꾸 목숨 걸고 하게 돼요. 개봉을 앞둔 ‘협상’에서도 협상을 이끄는 여형사로 나오는데 저한테는 그런 주체성이 되게 중요한 지점인 것 같아요.”

소지섭과 호흡을 맞춘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역시 흥행에 성공하면서 ‘멜로 퀸’ 이미지를 굳혔지만, 재난영화 ‘타워’(2012), 액션극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 스릴러 ‘비밀은 없다’(2016) 등 누구보다 다채로운 필모그래피를 가진 그녀만이 할 수 있는 발언이기도 하다. 도전을 마다치 않는 탓에 신인 감독을 좋아하는 ‘입봉 전문 배우’라는 소문도 있지만 “새롭고 재밌는 시나리오에 끌릴 뿐 저도 때로 의지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해인은 "이번 드라마를 찍으면서 연애관이 바뀌었다"면서 "눈빛만 봐도 다 안다는 것은 착각이었다. 어떤 마음인지 어떤 생각인지 더 용기내어 소통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밝혔다. [사진 FNC엔터테인먼트]
차세대 남자주인공으로 급부상한 정해인은 “건강이 안 좋아져서 좀 쉬고 싶단 생각이 있었는데 좋은 드라마를 찍으며 치유받았다”며 “하루빨리 차기작으로 인사드리고 싶다”고 밝혔다. 2013년 데뷔 이후 사극과 현대극을 오가며 공백없이 활동해온 그는 “장르 가리지 않고 열심히 시나리오를 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30대 연기를 해서 이제 교복 입기는 힘들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식음료ㆍ화장품ㆍ보험 등 각종 광고를 섭렵하며 이번 달 남자 광고모델 브랜드 평판 1위(한국기업평판연구소 조사)에 오른 그의 현재 기분은 어떨까. “매 순간이 행복하죠. 촬영이 잘 끝났을 때, 집에 와서 샤워하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낼 때, 그 맥주를 따서 첫 모금을 마실 때 등등. 요즘 일기엔 매일 감사하고 행복한 순간만 적혀 있어요. 외식하고 계산을 하려고 하면 부모님이 항상 말리셨는데 이제는 잘 먹었다고 하시니까 되게 뿌듯하더라고요. 예진 누나 만날 때도 밥은 거의 제가 사요. 고맙잖아요. 밥 잘 사주고 싶은 예쁜 누나죠.”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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