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정치 다시 '혼란'..총리 지명자, 정부 구성권 반납

권태훈 기자 입력 2018. 5. 28.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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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이후 80여 일의 무정부 상태를 끝내고, 서유럽 최초 포퓰리즘 정권 출범을 눈앞에 뒀던 이탈리아 정치가 다시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주세페 콘테(53) 총리 지명자는 27일 세르지오 마타렐라(76) 대통령을 만난 뒤 나흘 전 받은 정부 구성권을 반납했습니다.

총선 후 역대 최장이 된 이탈리아의 무정부 상태는 당분간 이어질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올가을 총선을 다시 치를 가능성마저 거론되고 있습니다.

콘테 지명자는 이날 반체제 정당 '오성운동', 극우정당 '동맹'과 합의한 내각 명단을 제출했으나, 대통령이 재정경제장관 후보를 거부하자 총리 후보직에서 전격 사퇴했습니다.

그는 대통령궁을 떠나면서 취재진에 "'변화의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부여받은 권한을 포기한다"고 밝혔습니다.

피렌체대학 법학과 교수로 정치 경험이 전무함에도 포퓰리즘 연정의 두 축인 오성운동과 동맹의 합의로 총리 후보로 깜짝 천거된 그는 대통령의 승인을 거쳐 23일부터 내각 구성 작업을 해왔습니다.

오성운동, 동맹 연정 출범의 걸림돌이 된 재정경제장관 후보 파올로 사보나(81)는 산업부 장관, 이탈리아 중앙은행 고위직 등을 역임한 경제학자로, 유럽연합(EU)과 유로화, EU의 주축인 독일에 적대적 시각을 지닌 것으로 유명합니다.

EU의 굳건한 신봉자이며 중도 좌파 민주당 집권 때 국가수반으로 선출된 마타렐라 대통령은 사보나를 이탈리아 경제 수장에 임명하면 시장과 주변국의 불안이 증폭될 것이라는 점을 우려해 왔습니다.

마타렐라 대통령은 콘테 지명자와 면담 뒤 발표한 담화에서 "정부의 보증인으로서 시장과 투자자, 이탈리아 국민과 외국인들 모두에게 불안을 주는 반(反) 유로 입장을 견지한 경제장관을 승인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최근 매일 '스프레드'가 상승하고 있고, 이로 인해 이탈리아 부채가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대통령의 말처럼 재정 지출 확대, EU와 엇박자를 예고한 포퓰리즘 정부 탄생이 임박했다는 우려로 이탈리아 금융 시장은 최근 심하게 요동쳤습니다.

시장 심리의 지표인 이탈리아와 독일 국채 10년물 스프레드(금리차)는 유로화 가입을 이탈리아의 '역사적 실수'라고 한 사보나의 경제장관 기용설에 25일 한때 217bp까지 치솟아 4년여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국제 신용평가 기관 무디스 역시 이탈리아 국채 등급이 현행 'Baa2'에서 'Baa3'로 강등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오성운동과 동맹은 마타렐라 대통령이 경제장관 후보를 거부한 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즉각 반발했습니다.

사보나를 경제장관으로 적극 지지한 마테오 살비니(45) 동맹 대표는 격앙된 표정으로 "이탈리아 국민의 이익을 지키려는 정부 구성 노력이 거부당했다"며 "이제 유일한 해결책은 총선을 다시 치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루이지 디 마이오(31) 오성운동 대표도 "대통령의 거부는 결코 용인할 수 없는, 유례없는 결정"이라며 "신용평가 기관이 (정부구성을) 결정한다면 투표가 왜 필요하냐. 헌법을 배신한 대통령을 의회가 탄핵해야 한다"고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나 마타렐라 대통령은 "정부 구성이 난국에 빠진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라며 "사보나 후보를 대체할 대안을 제시했으나 오성운동과 동맹이 거부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선거를 공표할지는 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한편 대통령궁이 2008년∼2013년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근무한 경제학자 카를로 코타렐리(64)를 호출했다고 밝혀 주목됩니다.

코타렐리는 이탈리아가 재정 위기에 처했던 당시 공공지출 삭감을 주장해 '미스터 가위'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마타렐라 대통령은 이달 초 연정 구성이 어려움을 겪을 때 거국 중립 내각을 꾸려 연말까지 내년 예산 통과와 선거법 개정 등의 임무를 맡긴 뒤 내년 초 조기 총선을 치르는 방안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이탈리아는 올 3월 4일 총선을 치렀고, 우파 정당 4개가 손잡은 우파연합이 37%를 득표해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정당도 과반 의석을 얻지 못해 연정 구성을 위한 각 정당 간 '짝짓기'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이탈리아의 무정부 상태는 이날로 84일째 이어졌는데, 1992년 총선 이후 줄리아노 아마토 내각이 출범하기까지 걸린 83일을 넘어선 최장 기록입니다.

이달 19일 콘테를 총리로 공동 지명해 서유럽 최초의 포퓰리즘 정부 탄생에 바짝 다가섰던 오성운동과 동맹은 내각 임명권을 쥐고 EU 수호자를 자처한 마타렐라 대통령의 반대를 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오성운동은 총선에서 기득권에 대한 심판 분위기를 등에 업고 33%에 육박하는 표를 얻어 창당 9년 만에 이탈리아 최대 정당이 됐고, 동맹은 반(反)난민 정서에 편승, 17%가 넘는 득표율로 기세를 올렸습니다.

지난 5년 집권당이던 중도좌파 민주당은 더딘 경제성장과 2013년 이래 70만 명에 달한 난민 행렬에 지친 유권자들이 등을 돌리며 득표율이 19%까지 추락, 역대 최악의 성적을 거뒀습니다.
 

권태훈 기자rhors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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