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 청와대 '눈치'에 일제 징용 피해자 외면했나

2018. 5. 27.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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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처 심의관 2015년 3월 작성
'상고법원 관련 BH 대응전략'에
이병기 비서실장 요청 추정 기재

"일제 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
청구기각 취지 파기환송 기대 예상"
대법원, 관련 판결 5년째 심리 중

[한겨레]

일제 강제징용 희생자 유해 33위가 3.1절을 하루 앞둔 지난 2월28일 국내로 봉환돼, 서울 용산역 앞에서 징용살풀이 행사가 열리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박근혜 전 대통령 때 청와대가 양승태 대법원장의 법원행정처에 ‘한일 우호관계 복원’을 위해 관련 재판에 대해 부적절한 요구를 했다고 의심되는 문건이 공개됐다. 문건에서 언급된 ‘일제 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사건’은 2013년 대법원에 접수된 뒤 무려 5년째 심리가 진행 중이다.

27일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단장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의 조사보고서에 실린 ‘상고법원 관련 BH 대응전략’ 문건을 보면 “청와대(이병기 비서실장)가 재판과 관련하여 부적절한 요구 또는 요청을 한 것으로 의심되는 부분”이 등장한다. 이 문건은 상고법원에 반대하는 우병우 민정수석의 영향력 약화를 위해 입체적인 대응전략을 제기하면서 발상을 전환해 비서실장, 특보를 설득·활용하는 우회 전략이 제시됐다.

문건의 ‘구체적 접촉·설득 방안’ 중 ‘이병기 비서실장’ 부분에서는 “주요 관심사항 관련 원론적 차원에서의 법원의 협조 노력 또는 공감 의사 피력”이라고 적혀있다. 이어 ‘최대 관심사→한일 우호 관계의 복원’ 아래 ‘산케이 신문 서울지국장 사건의 외교적 해결 노력 중→출국정지기간 연장처분 집행정지 신청 사건의 항고심에 대하여 4.15까지 결정 보류 요청”, “일제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사건에 대하여 청구기각취지의 파기환송판결 기대할 것으로 예상”이라고 나온다. ‘원세훈 사건’이라는 제목 아래에는 “적어도 전원합의체의 판단 등을 기대하는 것으로 보임”이라고 기재됐다.

'상고법원 관련 BH 대응전략'

이 문건은 2015년 3월 당시 시진국 행정처 기획제1심의관(현 창원지법 통영지원 부장판사)이 임종헌 기조실장의 지시를 받아 작성했다. 시 부장판사는 “산케이 신문 서울지국장 사건, 원세훈 사건에 관한 부분은 임종헌 기조실장이 불러주는 대로 작성했다”고 특조단 조사에서 진술했다.

그런데 문건에서 언급된 ‘일제 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 사건’은 2013년 대법원에 접수됐지만 “관련 사건을 통일적이고 모순없이 처리하기 위해 심층 검토 중”이라는 이유로 아직까지 대법 선고가 나오지 않았다. 징용 피해자 5명은 2000년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부산지법에, 일본제철 징용피해자 4명은 2005년 신일본주금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1·2심은 패소했으나 대법원 1부(주심 김능환 대법관)는 2012년 5월 최초로 일본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고 사건을 서울·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한) 일본 판결은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므로 그 효력을 승인할 수 없다”며 “원고들의 청구권이 소멸시효의 완성으로 소멸했다는 피고들의 주장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여 허용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대법 판결 취지대로 서울고법은 2013년 7월10일 원고 1인당 1억원의 손해배상을, 부산고법은 2013년 7월30일 원고 1인당 8000만원의 손해배상을 인정했다. 문건에 쓰인 대로라면 박근혜 청와대는 일본 기업의 손해배상을 인정한 고법 판결들의 ‘파기’를 기대했고, 행정처도 이를 인식하고 있었다. 대법원은 피고의 상고로 다시 심리하게 된 미쓰비시와 신일본주금 징용 사건을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다. 길게는 2000년부터 18년째 진행된 사건에 고령의 당사자들은 최종 판결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있다. 이 때문에 대한변호사협회도 지난해 11월 “대법원은 판결을 신속히 해 피해자들이 생존해 있는 동안 법적 구제를 받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피해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한·일 양국의 법치주의를 확장·강화시키길 바란다”는 성명을 냈다. 징용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김세은 변호사(법무법인 해마루)는 “대법원에서 이미 한번 판단한 사건인데 선고가 미뤄지면서 당사자들이 힘들어하고 있다”고 말했다.

‘산케이 신문 서울지국장’의 집행정지 사건이 메모대로 실행된 듯한 정황도 대법원이 청와대를 의식해 일제 징용 피해자의 손해배상 사건 판단을 늦춘 게 아니냐는 의혹을 짙게 한다.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 신문> 서울지국장은 세월호 참사 당일 박 전 대통령의 행적에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를 썼다가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다. 가토 전 지국장은 기소 뒤인 2015년 2월6일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출국정지 연장을 중단해달라”며 서울행정법원에 집행정지를 신청했다. 그러나 서울행정법원 행정1부(재판장 이승택)는 2015년 2월13일 “출국할 경우 형사 재판에 출석할지 알 수 없다”며 가토 전 지국장의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토 전 지국장은 같은 해 2월25일 항고했으나, 검찰이 2015년 4월14일 출국을 허용하면서 취하했다. ‘4월15일까지 결정 보류’와 시기적으로 맞물린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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