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M이 버린 도시, 쓸려나가는 사람들

입력 2018. 5. 26. 15:56 수정 2018. 6. 8.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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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함께 한 100년, 함께 할 100년.” 건물과 건물을 잇는 통로 외벽에서 표어 하나가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 되어 의미를 잃었다. 폐쇄가 발표된 2월13일 이후 한국지엠 군산공장(소룡동·사진)에선 차도 사람도 사라졌다. 5월31일 군산공장이 공식 폐쇄된다. 희망퇴직자들의 퇴직도 이날 공식 처리된다. 대우자동차로 설립돼 한국지엠으로 사라지는 군산공장은 국내에서 폐쇄 처분되는 첫 완성차 공장이다. 지엠이 떠난 군산은 한국의 3대 주력산업(전자·조선·자동차) 중 2개 업종 대기업(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포함)이 철수하는 유일한 도시가 됐다. 군산시민들이 전에 겪어본 적 없는 위기감이 도시 전체를 휘감고 있다. 정부 지원안 발표(5월10일) 뒤 ‘지엠 사태’가 일단락됐다고들 한다. 사업과 숫자 계산엔 일단락이 있어도 사람의 삶엔 일단락이 없다. 전 지구를 사업장으로 삼아 공장을 짓고 폐쇄해온 거대 기업이 한국의 작은 도시를 쓰고 버릴 때, 쓸려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한겨레> 토요판은 한 공장에서 일했던 서로 다른 처지의 사람들이 공장 폐쇄 이후 걸어갈 서로 다른 길을 따라간다. 그 길 위에서 원치 않는 소용돌이에 던져진 개인과, 그들을 끌어안고 추락하는 도시와, ‘그것이 경제원리’라고 설파하는 시스템과, 아무 일 없다는 듯 무심히 굴러가는 지구가 보일 것이다. 이것은 한국지엠 노동자와 군산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 나와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구조다. 글·사진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그래픽 이정윤 기자 bbool@hani.co.kr

[토요판] GM이 버린 도시

① 쓸려나가는 사람들

나라와, 도시와, 사람만 바꿔 되풀이돼온 이야기가 한국의 인구 27만 도시에서 다시 시작되고 있다.

2월13일…예고 없던 벼락

2008년 6월2일 미국 지엠 본사에서 온 임원이 미국 위스콘신주 제인즈빌 공장의 ‘2년 뒤 폐쇄’(가동 중단은 2008년 12월)를 통보했을 때, 이 공장에서 13년간 자동차를 조립해온 제러드 휘터커와 동료들은 흐느끼기 시작했다.(에이미 골드스타인 <제인즈빌>)

2013년 12월11일 지엠이 호주 빅토리아주 홀덴공장의 ‘4년 뒤 철수’를 알렸을 때, 이 공장에서 17년간 기술자로 일한 리처드 브라운은 세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 막막해 머리를 감싸 쥐었다.(<헤럴드 선>)

2015년 2월26일 지엠이 인도네시아 서자바 브카시공장의 ‘3개월 뒤 가동중단’을 공식화했을 때, 이 공장 정문을 지키는 경비노동자 아판디는 자신의 앞날을 짐작하지 못한 채 임무를 계속했다.(<시엔엔 인도네시아>)

2018년 2월13일 한국지엠이 군산공장의 ‘3개월 뒤 폐쇄’를 발표했을 때, 이 공장에서 22년 일해온 정규직 김지상(가명·40대 중반)은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닷새 전(2월8일) 퇴근을 마지막으로 그는 다음 출근 날짜가 정해질 때까지 집에서 대기하던 중이었다. 공장 가동률 저하로 출근과 휴무가 반복되고 있었다.

“테레비에서 공장 문 닫는다는데, 너도 잘린 거여?”

김지상은 어머니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폐쇄 사실을 알았다.

그는 군산공장이 위치한 소룡동 토박이였다. 1996년 대우자동차 생산직으로 ‘군산에서 가장 좋은 회사’에 입사했다. 군산공장(준공식은 1997년 4월21일)의 첫 차인 ‘누비라’부터 근래 ‘올란도’와 ‘크루즈’까지 색을 입히며 정년퇴직을 꿈꿨다. 자신도 몰랐던 소식을 어머니로부터 전해 듣고 김지상은 말을 잃었다. 진정되지 않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어머니부터 진정시켰다.

“울지 말고 기다리세요. 알아볼게요.”

2월13일 오전 “(군산공장 폐쇄는) 힘들지만 반드시 필요한 우리 노력의 첫걸음”이란 카허 카젬 한국지엠 사장의 말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을 때, 이 공장으로 15년 출퇴근한 정규직 장철범(가명·30대 후반)은 사흘 뒤 양가 부모님께 드릴 설 선물을 주문하고 있었다.

2월13일 군산공장 폐쇄 발표 당시 어머니 전화 받고 사실 안 김지상 부모님 설 선물 고르다 들은 장철범 폐쇄 당일 불법파견 승소한 강동위 희망퇴직 뒤 일당 노동 하는 박일규

이미 한 달에 4~5일만 출근하는 일이 몇달째 계속되고 있었다. 2월8일 출근했을 때 모든 차의 작업을 완료하고 라인을 비우란 지시를 받았다. 16일 설 명절을 앞두고 차의 부식을 막기 위한 조처로 그는 이해했다. 퇴근할 때 ‘3월엔 아예 출근이 없고 4월도 그냥 넘길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달받았다. 장철범은 ‘이번 휴무는 유독 길다’고 느꼈다. 닷새 뒤 설 선물을 고른 그가 수신 주소를 써넣는데 휴대전화에 문자가 떴다.

“회사가 공장 폐쇄 통보.”

장철범은 전북 익산에서 자랐고 그곳에서 아내를 만났다. 2003년 지엠대우 비정규직으로 군산공장에 들어와 2007년 ‘발탁채용’으로 정규직이 됐다. ‘비’자 하나를 뗐을 뿐인데 비정규직 4년과 정규직 11년 사이에서 그는 전혀 다른 두 세계를 통과했다. 장철범은 아내의 충격이 걱정돼 폐쇄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하루 지나 소식을 전했을 때 말없이 텔레비전을 보던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아내는 그들 앞에 닥친 현실을 알고 있었지만 남편이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2월13일 오전 정규직들이 군산공장 폐쇄 소식으로 들끓고 있을 때, 이 공장에서 10년 일한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강동위(가명·40대 초반)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후배 해고자’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형, 들었어?”

후배가 그를 보자마자 물었다.

강동위는 전북 완주에서 자랐고 전주에서 살았다. ‘파견법’(1998년 제정)이 양산한 첫 비정규직 세대였다. 1999년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사내하청이 된 그는 “사대부(정규직)와 머슴(비정규직)의 격차”를 몸으로 살았다. 지엠 정규직인 매형의 권유로 2006년 한국지엠 군산공장 사내하청이 됐다. 2015년 군산공장이 2교대에서 1교대로 전환(지엠 본사의 유럽시장 철수로 생산량 감소)할 때 정규직들에게 자리(‘인소싱’)를 내주고 해고됐다.

그와 후배는 담담했다. 어차피 그들에게 공장 문은 3년 전부터 닫혀 있었다. 그도 후배도 착잡했다. 불법파견 소송에서 이겨 정규직 지위를 얻어도 돌아갈 공장이 군산엔 없었다.

강동위가 담뱃불을 비벼 끈 뒤 농성장(해고 뒤 군산공장 앞에 친 천막)으로 출발했다. 후배는 다른 해고자들과 인천으로 올라갔다. 2월13일, 군산공장이 ‘있던 정규직’도 뱉어낸 날, 그들(군산 8명과 부평 37명)은 정규직 신분을 인정받았다.(인천지방법원 1심 판결)

한국지엠은 공장 폐쇄 발표 뒤 곧바로 희망퇴직 접수(1차 3월2일까지)를 시작했다.

4월23일…터지는 불안

군산공장은 바다였던 땅과 접해 있었다.

소룡동은 본래 논밭이었다. 오식도~내초도~비응도를 메꾼 간척지(1919년부터 매립 시작)가 왼쪽에서 소룡동과 몸을 붙이며 군산국가산업단지 터가 됐다. 그 땅에 새로 생긴 공장이 우람했다. 1995년 군에서 제대한 김지상은 군산항 제4부두(자동차 수출 전용부두)에서 트라이포드 ‘공구리’(콘크리트)를 치다가 입대 전엔 없던 군산공장과 처음 대면했다. 지엠은 20년 간격으로 등장하고, 철수하고, 재등장하며 김지상의 시간과 얽히고, 떨어지고, 다시 얽혔다.

김지상이 태어나기 한 해 전(1972년) 태동하는 한국 자동차업계로 지엠이 처음 들어왔다. 그해 6월 신진자동차공업(1965년 새나라자동차 인수·설립)에 지분 50%를 투자하고 이름을 ‘지엠 코리아’로 바꿨다. 1973년 오일쇼크로 판매 부진에 빠진 회사의 신진 지분 50%를 산업은행이 인수(1976년 사명 ‘새한자동차’ 변경)했다. 1978년 대우가 산은 지분 전부를 사들이면서 새한의 경영에 뛰어들었다. 1984년엔 지분 1%를 추가(51%)한 대우가 이름(대우자동차)을 차지했다. 2년 뒤 대우는 군산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하며 지엠과 자금 조달을 협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경영 주도권을 두고 갈등하던 대우는 1992년 지엠 지분 전부를 매입했다.

지엠이 ‘20년 한국 합작’을 청산한 그해 김지상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군에 입대한 1993년 김우중 회장이 ‘지엠 없는 대우차’를 중심으로 ‘세계경영’을 선포했다. 4월12일엔 설립 계획 발표 7년 만에 군산공장이 착공했다. “군산공장은 김우중식 세계경영 추진의 전진기지”(당시 근무자)였다.

군산공장이 첫 차(누비라)를 출시한 1997년 아이엠에프 사태가 터졌다. 입사 1년여 만에 생산량이 줄면서 김지상은 출고사무소로 보내졌다. 차량 출고를 대행하던 협력업체 직원들이 대우차에서 온 정규직들에게 밀려 실직했다.

김우중의 대우그룹은 1999년 워크아웃을 맞았다. 2000년 대우차가 최종 부도 처리됐다. 1750명(정규직)의 부평공장 노동자들이 2001년 정리해고(이후 순차 복직)됐다. 결별 10년 만에 재등장한 지엠이 대우차를 인수(2002년)했다. 그해 김지상은 출고사무소에서 군산공장으로 복귀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땐 지엠이 파산했다. 한국 정부가 되살린 대우처럼 지엠은 미국 정부가 회생(‘General Motors’인 GM을 ‘Government Motors’로 부르는 배경)시켰다. 그 지엠이 10년 만에 한국 정부에 “긴급한 조치”와 “의미있는 진전”을 요구(2월13일 배리 엥글 지엠 해외사업부문 사장)하며 군산공장 폐쇄를 앞세웠다.

김지상과 장철범이 마지막인 줄 모른 채 마지막 작업을 하던 시각(2월8일 오전) 한국지엠 노사는 임단협 2차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김재홍 군산지회장이 경영진에게 물었다.

“군산은 굶어죽게 생겼다. 장기휴무가 계속되고 있는데 대안을 얘기해 달라.”

데일 설리번 부사장(영업·서비스·마케팅 부문)이 답했다.

“군산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배리 엥글 사장이 정부·주주·이해관계자들과 계속 만나고 있다. 매우 긍정적인 인상을 받았다.”

이날 언급되지 않은 군산공장 폐쇄가 다음날 한국지엠 이사회에서 결정돼 나흘 뒤 발표됐다. 대우차 때부터 두 차례 대규모 구조조정에 던져지며 생산직 노동자 김지상의 시간은 군산공장의 생몰과 겹쳐졌다.

“뭐 하는 겁니까.”

4월23일 오후 인천 부평공장(한국지엠 본사) 현장에서 거친 항의가 터졌다. ‘노사 교섭 종료’ 세 시간 전이었다. 군산에선 김지상·장철범이 온 신경을 부평으로 뻗고 있을 때였다. 군산공장 폐쇄 철회 여부와 희망퇴직을 신청하지 않은 두 사람의 앞날이 교섭 결과에 달려 있었다. 오후 2시께 부평 라인 전체가 예고 없이 멈췄다. ‘직’(10여명으로 구성된 일종의 팀)별로 직장들이 회사의 지시 사항을 전했다.

“오후 5시(노사 교섭 시한)까지 잠정합의가 도출되지 않으면 공장 가동을 중단한다. 모두 자기 짐을 싸서 퇴근하라.”

회사의 ‘합의 협박’(사쪽 “법정관리 가면 납품업체 부품을 돌려줘야 하므로 생산 중단이 불가피”)으로 현장은 받아들였다. 협상이 지엠의 성에 차지 않을 때 한국지엠 전체가 군산처럼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혔다. 한국지엠 이사회는 “오후 5시를 넘기면 법정관리를 의결한다”며 대기했다.

빚 때문에 퇴직 뒤 일 배우는 홍재식 군산공장 사망자와 친했던 곽문국 ‘비정규 대책 요구’ 대기발령 전지환 죽음으로 그들 인연 이어준 고태훈 군산공장 폐쇄 직면한 그들의 이야기

“우리는 노조 집행부가 회사 제시안에 우선 합의하기를 원합니다.”

교섭 시한 며칠 전 부평공장의 한 건물 유리창에 사무직 직원들이 쓴 글귀가 붙었다. 동의를 표하는 포스트잇들(‘좋아요’ ‘동의합니다’ ‘#미투’…)이 잇달아 달렸다. 일부 직군에선 연서명도 벌어졌다. ‘지엠에 볼모 잡힌 군산 때문에 우리가 군산의 볼모가 돼선 안 된다’는 의견들이 부평 노동자들 사이에서 나왔다. 지엠의 법정관리 압박이 다급해진 비(非)군산 직원들의 불안을 찔러 터뜨렸다. 불안은 녹아 흐르기 직전의 홍시처럼 오래 무르익어왔다.

한국지엠 노사 교섭 시한(오후 5시)을 몇 시간 앞둔 4월23일 오후 인천시 한국지엠 부평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인천/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인 홍영표 의원(오른쪽 둘째)이 4월23일 오후 인천 부평구 한국지엠 홍보관 회의실에서 노사 잠정합의안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카허 카젬 한국지엠 사장, 배리 엥글 지엠 총괄부사장 겸 해외사업부문 사장, 홍 의원, 문승 다성 사장. 인천/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3월2일…거짓말이 된 약속

불 꺼진 공장에서 휴대전화 액정만 흐린 빛을 발했다.

폐쇄 발표 한달여 뒤 장철범은 공장에 들어가 소지품을 챙겼다. 작업복, 작업화, 장갑, 칫솔…. 15년의 시간을 꼼꼼히 정리해도 가방 하나를 채우지 못했다. 마지막 출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20대 초반의 그를 30대 후반까지 지탱해준 공장 라인을 천천히 걸었다. 라인을 꽉 채운 어둠이 그의 눈에 맺힌 물기를 지웠다. 액정 불빛에 의지해 텅 빈 라인을 걷는데 목구멍으로 “억울하다”는 말이 울컥 올라왔다. ‘이렇게 버려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그 말에 묻어나왔다.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아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한국지엠 노동자들의 운명은 한국지엠이 아니라 지엠 본사가 결정했다.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공장들의 생산량과 수출량을 지엠이 배정했다. 한국지엠은 생산차량의 90%를 수출했지만 수출시장의 크기와 존폐는 지엠이 설계했다. 한국지엠의 최대 수출시장이던 유럽(2013년)과 러시아(2014년)의 물량 철수도 지엠이 단행했다. 군산 생산량의 급감(2012년 21만1176대 → 2013년 14만4814대 → 2014년 8만1670대 → 2015년 7만5대)과 2018년(1만5477대 계획) 공장 폐쇄를 낳은 첫째 원인으로 꼽혔다. ‘이전가격’(다국적기업 계열·관계사 간의 제품·서비스 교환가격)이 불합리하게 책정된다는 의혹(‘한국지엠은 원재료를 비싸게 받고 생산차량을 싸게 제공’)도 ‘억울함’에 더해졌다.

2001년 대우 파산과 2008년 지엠 파산을 겪으며 한국지엠 노동자들은 불안해졌다. 전세계로 생산공장을 확대하던 지엠이 10년 전부터 철수·폐쇄를 거듭하자 불안은 깊어졌다. ‘언제든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 있다’는 불안이 군산공장 폐쇄 발표로 부풀어 올랐다. 지난 시간 학습돼온 불안이 2018년 ‘군산을 지키다 모두가 망한다’는 불안을 떠밀었다. ‘나와 내 가족의 미래가 나와 무관하게 결정되는 현실’ 속에서 그들은 “모두 불안”(부평의 한 노동자)했다.

최초 시한(4월20일)을 사흘 넘긴 노사 교섭은 오후 5시를 한 시간 앞두고 잠정합의(4월26일 조합원 투표에서 67.3% 찬성으로 가결) 소식을 알렸다. 합의안 핵심은 기존 직원들의 복지 삭감과 군산공장 희망퇴직 미신청자들(680명)의 타 공장 전환배치였다. 전환배치 대기자들은 3년 휴직 처리하되 225만원의 생계비(30개월)를 노사가 절반씩 지원하는 안이 별도 합의됐다.

3월 어느 저녁 박일규(가명·40대 후반)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강동위가 매형 집을 찾았다.

막내 누나의 남편인 박일규가 강동위에게 한국지엠 사내하청 취업을 소개하면서 두 사람은 9년(2006~2015년)을 한 공장에서 일했다. 인구 30만명이 안 되는 도시에서 한국지엠 군산공장은 ‘지역기업’이기도 했다. 가족과 친지와 지인들이 공장 정문을 통과하면 직장 동료가 됐다.

매형(박일규)이 정규직일 때 처남(강동위)은 비정규직이었고, 남편(장철범의 여성 친구의 경우)은 정규직인데 친오빠는 납품업체 직원이었다. 군산공장 1교대 전환 때 정규직 친형은 일자리를 지켰으나, 비정규직 친동생(강동위 동료)은 정규직들의 고용유지에 희생됐다. 그해 강동위도 해고됐고, 3년 뒤 박일규(20년 이상 근무)도 군산공장에서 ‘희망하지 않는 희망퇴직’을 했다.

국내에서 폐쇄되는 첫 완성차 공장 군산은 한국의 3대 주력산업 중 2개 업종 대기업 철수한 유일 도시 현중 조선소 가동 중단과 물리며 겪은 적 없는 위기감에 싸인 도시

희망퇴직원 접수를 결정하기까지 박일규의 마음은 순간순간 깨졌다. 회사를 떠났을 때 군산에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군산공장은 국내에서 폐쇄 처분되는 첫 완성차 공장이었다. 지엠이 떠난 군산은 한국의 3대 주력산업(전자·조선·자동차) 중 2개 업종 대기업(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포함)이 문을 닫는 유일한 도시가 됐다.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철수(2017년 7월1일) 7개월 만에 지엠공장 폐쇄가 발표되면서 납품업체 등 연쇄도산이 예고됐다. 지역총생산 9조8천억원(2015년 기준) 중 1조4천억원이 사라질 것으로 추산됐다.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와 합하면 2조5400억원(25.9%, 2011년엔 68.1%)을 차지했다. 겪어본 적 없는 위기감이 도시를 휘감았다.

군산공장 노동자들은 걱정과 공포와 우울을 오갔다. 희망퇴직 접수가 시작된 뒤 “이번에 신청하지 않으면 이후엔 위로금도 받을 수 없다”는 말이 공장 안팎에서 돌았다. ‘회사 밖은 지옥’이란 말과 ‘대책 없는 휴직이 지옥’이란 말이 쓸모없는 우위를 다퉜다. 고민을 덜어보려 동료들과 술을 마시면 그들의 한탄과 불안까지 가슴에 얹어 돌아왔다. 접수 마감이 다가올수록 그들은 “심리적 통제불능 상태”(김지상)에 빠졌다. 2월말 300여명이던 신청자가 3월1일 700명을 넘더니 마지막날엔 900여명(생산직)이 됐다. 3월2일까지 군산·부평·창원공장에서 모두 2600여명(4월24~30일 2차 접수 때 300여명 추가)이 희망퇴직원을 냈다. 다시 들어올 일 없을 공장을 나서며 뒤돌아본 건물 벽에서 의미 잃은 표어 하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함께 한 100년, 함께 할 100년.”

희망퇴직 뒤 박일규는 농수로 정비 현장으로 일당 벌이를 나갔다. 평생 대기업 생산직으로 살았지만 구조조정 된 뒤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었다. 그에겐 초·중·고마다 한 명씩 세 명의 아이가 있었다. 4월4~5일 군산의 각급학교들은 전북교육청의 지침에 따라 일제히 가정통신문을 띄웠다. ‘한국지엠 군산공장 폐쇄에 따른 실직 등 근로자 자녀 교육비 지원 안내(학비·수학여행비·교복비 감면)’란 제목을 달았다.

5월14일…뼛가루의 서열

고·태·훈(가명·47).

3월24일 김지상은 휴대전화에 뜬 세 글자를 한참 들여다봤다. 고태훈은 1996년 입사 동기였다. 친하진 않았지만 그의 이름을 ‘부고’ 문자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날 고태훈은 아파트 자택에서 목매 숨진 채로 발견됐다. 사망 사흘 만에 여동생에게 발견됐다고 했다. 희망퇴직 접수 뒤 세 명(3월7일 부평·55살 → 3월24일 군산·47살 → 4월6일 부평·55살·사망 20여일 만에 확인)의 한국지엠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태훈은 두번째 사망자였다. 그도 접수 종료일에 희망퇴직원을 썼다. 2년 전 아내와 사별한 뒤 유학 간 딸과 떨어져 혼자 살았다. 평소 활달하던 그가 퇴직 승인 뒤 술을 많이 마셨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의 사망을 전하자 아내가 걱정하며 물었다.

“당신은 괜찮아?”

장철범이 아파트를 가만히 둘러봤다.

‘군산 사망자’가 이웃이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장철범은 5년을 산 아파트가 낯설게 느껴졌다. 군산에서도 죽음이 발생했다는 소식은 부평에서 ‘공장폐쇄 반대’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들었다. ‘희망 잃은 죽음’의 장소가 자신의 아파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태훈이 그의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죽음이 이렇게 올까’ 장철범은 생각해봤다. 정리해고(2009년 5월) 뒤 10년간 30여명이 스러진 쌍용자동차가 떠올라 머리를 흔들었다.

형.

뉴스가 묘사하는 사람이 형 같았다. 친구로부터 사실을 확인한 곽문국(가명·40대 초반)은 ‘태훈이 형’의 죽음이 믿기지 않았다. 2월23일 부평공장에서 부평역으로 행진하며 형과 눈인사로 스친 것이 마지막이었다.

고태훈과 곽문국은 섀시 라인 동료였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라인이 분리됐을 때 고태훈은 곽문국이 일하는 라인으로 자주 놀러 왔다. 2015년 1교대 전환으로 곽문국(사내하청)이 해고됐을 땐 고태훈(정규직)이 가끔 농성 천막으로 찾아와 커피를 건넸다. 빈소에 조문 간 곽문국이 고태훈의 영정을 봤을 때 커피와 함께 건너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미안하다.”

고태훈과 각자의 인연으로 맺어진 그들도 서로 처지가 나뉘었다.

김지상과 장철범은 부평으로의 전환배치를 기다렸다. 군산의 부평 이동 규모(부평공장의 빈자리를 고려할 때 100~250명이란 전망)를 놓고 5월14일부터 노사가 후속 논의를 벌였다. 군산 휴직자들(2차 희망퇴직자를 뺀 600여명)의 60~80%는 1차 전환배치 대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먼저 부평 또는 창원 공장으로 가느냐(군산지회 “폐쇄반대 집회 참석률 등을 우선 고려”)를 두고 군산의 갈등이 불가피할 것으로 두 사람은 예상했다. 김지상과 장철범의 희비도 엇갈릴 수 있었다. 1차에 포함되지 못하면 언제 추가 기회가 올지 모르는 채 3년을 버텨야 했다.

홍재식은 장철범의 선배였다. 두 사람은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홍재식도 장철범처럼 고태훈을 잘 알지 못했다. 홍재식은 후배와 다른 선택을 했다. 갚아야 할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희망퇴직원을 썼다. 그는 생계지원이 포함된 잠정합의안을 본 뒤 희망퇴직을 후회했다. 최근 시시티브이(CCTV) 설치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곽문국은 강동위와 같이 해고된 비정규직 동료였다. 5월10일 정부가 ‘지엠 경영정상화 지원안’(산업은행의 7억5천만달러 신규 출자 등)을 발표하자 ‘지엠 사태가 일단락됐다’는 보도들이 나왔다. 무엇이 정리됐다는 것인지 두 사람은 알 수 없었다. 한국지엠 노사 합의에도, 정부의 지엠 지원안에도,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별도의 통지가 있을 때까지 자택 대기를 명한다.”

전세계로 확장하다 잇단 철수·폐쇄 거대 다국적기업의 글로벌 전략 한국지엠 노동자들의 현재와 미래를 한국지엠 아닌 지엠 본사가 결정 불안이 고착시키는 뼛가루의 서열

정부 지원을 얻어낸 지엠 사장단이 부평공장에서 기자회견을 예정한 날이었다. 5월14일 저녁 부평공장 사내하청 노동자 전지환(가명·30대 후반)은 소속 업체로부터 ‘경고장’을 받았다. 그날 오전 사장단의 경영정상화 기자회견장(홍보관 대강당) 앞에서 그는 비정규직 대책을 요구하며 플래카드를 들었다. 동료들 10여명(한국지엠 부평비정규직지회)은 기자회견장 안에서 ‘불법파견 해결 없는 정상화는 없다’며 팻말시위를 했다. 기자회견은 취소됐다.

저녁 무렵 사내하청 11명(2차 하청 포함 15명)을 특정해 자택 대기와 공장 출입 금지를 통보하는 경고장이 발송됐다. 서로 다른 업체가 보냈지만 “당사는 ‘갑’사인 한국지엠으로부터 유감 표명 문서를 받았고 위반 당사자에 대해 출입통제 요청을 받았다”는 동일 문구가 반복됐다.

서열은 뼛가루에도 있었다.

기업이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말할 때 깎여나가는 데도 순서가 있었다. 한국지엠 정규직들이 ‘우리는 지엠의 하청’이라며 자조할 때 한국지엠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정규직 해고를 막는 방패(2008년 지엠 파산 때 부평·군산·창원 1천여명 → 2015년 1교대 전환 때 군산 1천여명)가 돼왔다. 회사가 생산물량 감소를 이유로 구조조정을 추진할 때마다 사내하청들이 정규직 앞에서 먼저 일을 빼앗겼다. 2001년 정리해고 사태 때도, 2018년 공장폐쇄 사태 때도, ‘사태’ 전에 소리 없이 증발한 그들(2010년 2천여명이던 군산공장 사내하청이 2월13일 공장폐쇄 당시 195명)의 존재는 말해지지 않았다. 전 지구를 사업장으로 삼아 공장을 짓고 폐쇄해온 거대 기업이 한국의 작은 도시를 쓰고 버릴 때 가장 먼저 쓸려나가는 뼛가루들도 그들이었다.

전지환은 열흘(5월24일 현재)이 넘도록 출근이 막혀 일을 하지 못했다. 아내의 뱃속엔 4개월 된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조합원들이 2월28일 비가 내리는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군산공장 폐쇄에 반대하며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시작되는 이야기

2008년 미국 제인즈빌공장이 생산을 중단했을 때, 6만4천명이 사는 소도시에서 9천여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2015년 인도네시아 브카시공장이 가동 2년 만에 공장을 철수(1927년 첫 진출 이후 3번째)했을 때,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 500여명이 일을 잃었다. 2017년 호주 홀덴공장이 문을 닫았을 때, 공장에 삶을 의탁해온 직원 3천여명의 생계가 아득해졌다. 2018년 5월31일 한국지엠 군산공장이 공식 폐쇄(정규직+사내하청+납품업체 1만3천여명 실직 예상)될 때, 전환배치 신청자 김지상·장철범과, 희망퇴직자 박일규·홍재식과, 비정규직 해고자 강동위·곽문국과, 사내하청 자택 대기자 전지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폐쇄는 끝이 아니라 폐쇄된 삶의 시작(▶2회 ‘불안의 고리’)이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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