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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라이프] 우연처럼 만나 필연이 된 농구로 ‘아웃사이더’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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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5-26 15:00:00 수정 : 2018-05-26 11:3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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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길 한국농구발전연구소장 / 공과 인연 깊었던 학창시절 / 축구→핸드볼→농구선수 활동 / 대학 진학 후 농구 열정 식어 / 결국 실업팀 못 가고 군 입대 / 농구와 이별 후 사업가로 / IMF사태도 이겨내고 승승장구 / 사기꾼에 속아 다시 내리막길 / 농구협 홈피 관리로 방황극복 / 농구로 소외계층 위해 봉사 / 장애아·다문화 어린이 팀 결성 / 각계 후원 이끌어내며 힘 보태 / "모든 게 생계 도맡은 아내 덕분" 씨줄과 날줄이 만나 옷감이 완성되듯 한 사람의 인생은 ‘우연’이라는 씨줄이 ‘필연’이라는 날줄을 만나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천수길(58) 한국농구발전연구소장은 우연의 씨줄을 이어주는 필연의 날줄을 ‘덕분에’라는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했다. 천 소장은 우연히 농구와 맺은 인연 ‘덕분에’ 장애아와 소외계층 아동들, 그리고 다문화 어린이까지 우리 사회에서 아웃사이더가 될 수 있었던 이들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천수길 소장이 일하는 한국농구발전연구소는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언덕길가 반지하 사무실에 둥지를 틀고 있다. 눈에 띄는 간판도 없어 직접 마중 나오지 않으면 찾기도 힘든 곳이지만 겉치레를 중요시하지 않는 천 소장의 소탈함이 느껴진다. 

한국농구발전연구소 천수길 소장은 인생의 우여곡절 끝에 농구를 통한 사회봉사활동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이는 정신지체 아동 농구교실을 시작으로 사회복지시설 아동 농구단 ‘드림팀’, 다문화 어린이 농구단 ‘글로벌 프렌즈’ 등의 창단으로 이어졌다.
이재문 기자
#우연으로 시작한 농구

천 소장은 자신이 지금 같은 인생을 살 것이라고는 창창하던 젊은 시절에는 상상도 못했다. 파주 신산초등학교 시절 축구선수였던 그는 5학년 때 서울 홍제초로 전학을 간 뒤 처음 농구공을 만져봤다. 그는 “파주 학교에는 농구골대도 없었다. 선생님이 새 친구들과 얼마나 잘 어울리나 보려고 농구를 시켰는데 또래보다 키가 커서 그랬는지 곧잘 했다”면서 “그때 농구공의 느낌이 좋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보통 여기서 천 소장의 농구 인생이 시작될 것 같지만 이는 필연이 되기 위해 스쳐가는 우연의 시작일 뿐이었다. 중학교 진학 후 그는 핸드볼을 했지 농구와는 인연이 없었다.

천 소장의 본격적인 농구인생은 배재고 진학과 함께 시작됐다. “학교 분위기가 만만치 않더라. 선후배 규율도 세고. 180㎝가 넘는 키 탓에 눈에도 띄고 하니 예비소집일부터 여기저기 불려다니고 학교생활이 조심스러웠다. 입학식 때 동기들 눈빛을 보니 공부로 버티기 어렵겠다는 생각도 들고(웃음).” 거기에다 장사하시는 아버지에 셋이나 되는 동생들을 생각하니 대학 진학을 위해 운동부에 들어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처음엔 럭비부를 염두에 뒀지만 흙바닥을 뒹구는 것이 싫었다. 농구가 대학진학에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테스트를 봤다. 천 소장은 “핸드볼 스텝으로 레이업슛을 했는데 단번에 합격했다. 사실 당시 배제중 선수들이 고교로 올라오는 시스템인 줄도 모르고 들어갔다”고 회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시절 우연히 만졌던 농구공의 여운이 그를 이끌었는지 모른다.

#좌절이 다시 만나게 한 농구

천 소장은 농구를 발판삼아 단국대에 진학했다. 막상 대학에 들어가서는 농구에 모든 걸 걸고 싶지는 않아서 설렁설렁 운동했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그러다 졸업반이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이전만 해도 웬만하면 실업팀에 영입됐는데 하필 내가 졸업할 때 실업팀들이 선수선발 숫자를 줄였다. 좀 더 열심히 운동할 걸 하는 후회가 막급했다”고 털어놨다. 어쩔 수 없이 군입대한 천 소장은 “큰 키 때문인지 청와대 경호실로 차출돼 남들보다 ‘빡센’ 군생활도 해야 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창피해서 군생활 내내 농구선수 출신이라는 말은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대신 부대 축구대회에서 펄펄 날았다”며 웃었다.

천 소장은 이렇게 농구와 스스로 이별을 택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사회생활을 하다 1980년대 중반 지인의 컴퓨터 소모품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회사가 어렵다며 일곱달 동안 월급이 나오지 않았다. 지인의 사정을 잘 알기에 힘들게 모았던 주택부금까지 해약해 직접 투자까지 했는데도 사정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차라리 직접 회사를 차리기로 했다. “서소문에 사무실을 내고 발품으로 영업을 하며 나름 자리를 잡았다. 1990년대 후반에는 용산전자상가에서 당시 뜨던 휴대전화 PCS 부품 사업도 하면서 잘 나갔다. 1997년 IMF 사태도 견뎌냈다”고 말했다.

승승장구할 것만 같던 사업은 또 다른 우연으로 흔들렸다. 천 소장은 “어쩌다 알게 된 사람에게 정신을 다 뺏길 만큼 빠져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사기꾼이었지만 그때는 그 사람이 있던 교도소까지 면회갈 정도로 믿었다”면서 “돈을 뜯기면서도 내가 못 해본 일을 많이 가르쳐 줬다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결국 사업도 기울고 사람에 대한 믿음도 깨지면서 천 소장은 자신의 인생이 텅빈 코트에 덩그러니 있는 농구공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천 소장은 “이제 나는 사업 안 한다. 난 돈과 인연이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3년 동안 아무 일도 안 하고 방황했다”고 당시의 아픔을 떠올렸다. 그러자 필연처럼 잊고 있던 농구가 그를 찾아왔다. 느닷없이 학창시절 열심히 했던 농구로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면서 방황을 떨쳐냈다. 인터넷 홈페이지가 활성화되던 2000년 초반 그는 자신의 사업경험을 살려 대한농구협회 홈페이지를 10년간 무상으로 관리해 주겠다고 나섰다.

한국농구발전연구소가 2012년 창단한 다문화 어린이 농구단 ‘글로벌 프렌즈’의 활동 모습. ‘글로벌 프렌즈’는 하나투어의 후원 아래 전국 대회는 물론 해외 전지훈련도 다녀온다.
한국농구발전연구소 제공
#농구로 무엇을 할까

처음엔 다른 꿍꿍이가 있나 의심도 받았다. 특히 2004년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농구협회장으로 오게 되는 과정에 일조했고, 이후 농구협회 홍보이사와 총무이사 직함을 받자 의심은 더 커졌다. 하지만 그는 이런 주위의 시선에 신경쓰기보다는 농구로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 “적지 않은 농구인들이 농구가 나한테 뭘 해줄까를 생각했지만 나는 농구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농구발전연구소라는 단체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가장 먼저 2005년 정신지체아동을 대상으로 한 농구교실을 열었다. 동대문구에서 ‘독수리 농구단’ 이름으로 시작한 이 사업은 서울 각 구청으로 확대되며 큰 호응을 얻었다. 천 소장은 “지금은 각 구청들이 인수해서 자체 사업으로 잘 꾸려나가고 있다”며 흡족해했다.

2006년 농구발전연구소가 정식 출범하면서 천 소장의 다음 사업은 아동복지시설 농구단인 ‘드림팀’이었다. 문제는 아이들이 농구연습을 더 하고 싶어도 제약이 많았다는 점이다. “오후 5시반에 시설에서는 저녁을 먹는다. 체육관에서 연습을 하고 가면 저녁식사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 서오릉의 한 보리밥집에서 아이들 저녁식사를 후원해 편하게 훈련했고 드림팀이 전국대회에서 성적을 내면서 유명해졌다”고 밝은 표정을 지었다. 천 소장은 “그 식당이 아이들을 후원한 뒤부터 장사가 잘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한켠에서 내가 과일장사도 하고 주차관리도 도와주면서 드림팀 후원비를 충원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천 소장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지인에게 다문화 어린이들의 힘든 사정을 듣고 그들을 돕겠다는 생각으로 가장 먼저 구로와 금천구쪽 교육청을 찾아갔지만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낙담했다. 그러다 서울 이태원의 보광초등학교에 다문화 학생들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 2011년 무작정 찾아가 농구교실을 열고 싶다고 제안했다. “당시 교감선생님이 다문화 학생들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며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기 시작해 다문화 어린이 농구단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천 소장은 말했다. 이는 2012년 다문화 어린이 농구단 ‘글로벌 프렌즈’의 창단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현재는 하나투어의 후원 속에 전국대회는 물론 해외전지훈련까지 다닐 만큼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입에 달고 사는 말 “여러분 덕분에”

천 소장이 우연처럼 만나 필연이 된 농구를 통해 이런 다양한 사회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의 입에서 “덕분에”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 이유다. 역시 “아내 덕분에”가 가장 먼저 나왔다. 사업 실패 후 농구를 통한 봉사로 새로운 인생을 찾아가는 자신을 보고 아내가 가족 생계는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나서줬기 때문이다. “아내가 홍은동 사거리 유진상가에서 13년째 이불가게를 하고 있다”며 천 소장은 겸연쩍어했다.

그 외에도 농구발전연구소를 도와준 이들은 많다. 최희암 전 연세대 감독을 비롯해 신선우 WKBL 총재, 프로농구 울산 현대모비스의 양동근 등이 적지 않은 돈을 기탁하기도 했다. 또한 여러 농구계 인사들이 농구교실에 재능기부 자원봉사자로 나서며 힘을 보탰다.

지난 5일에에는 농구협회와 함께 심판 사관학교를 열었다. 심판 판정의 일관성이 없어 학생이나 학부모들의 불만이 커 농구발전에 저해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천 소장은 “농구원로인 원인구 선생이 교장을 맡아주셨다”며 “원 선생님 덕분에”도 잊지 않았다. 심판 사관학교는 영어교사는 물론 언어행동분석 전문가까지 포함된 9명의 강사진이 꾸리는 4개월 교육과정을 통해 좋은 심판들을 양성하고 있다.

송용준 기자 eidy015@segye.com

천수길 소장은

●1960년 6월13일 경기 파주 출생
●배재고-단국대 졸업
●2004∼2006년 대한농구협회 홍보이사
●2007∼2011년 대한농구협회 총무이사
●2005년 정신지체장애 독수리 농구단 출범
●2006년 대한농구발전연구소 설립
●2006년 아동복지시설 농구단 드림팀 창단
●2012년 다문화 어린이 농구단 글로벌 프렌즈 창단
●2018년 농구심판 사관학교 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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