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였던 강물 위에서 불법 카지노 배들이 '두둥실'

2018. 5. 26.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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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혁명전진기지 매솟의 오늘
개발 기대 못미친다는 실망 뒤로
타이 노동시장 최하부 지탱하는
20만 버마 노동자들 향한 차별

카렌해방군-버마 정부군 격전장
매솟 서쪽 5km 떨어진 먀와디
가장자리로 9개 카지노 판 벌여
아웅산수찌 정부 한계 상징

[한겨레] [토요판] 정문태의 국경일기

(16) 타이-버마 접경지 매솟·먀와디

배를 타고 모에이강을 건너 매솟으로 넘어오는 버마 노동자들. 타이-버마를 잇는 우정의 다리(사진 오른쪽 위)는 여권과 노동허가증 없는 버마 노동자들에게는 비정한 다리일 뿐이다. 정문태 제공

꼭 5년 만이다. 그 사이 매솟이 크게 변했다. 못 보던 호텔과 술집들이 곳곳에 생겼고 대형 백화점에다 유통업체까지 들어섰다. 1990~2000년대 초까지 내 집처럼 드나들며 손바닥 읽듯 훤하다고 믿었던 것도 이젠 다 지난 일이다. 새로 생긴 길에서 어리둥절 해맬 판이다.

모에이강을 끼고 서쪽으로 버마의 먀와디와 국경을 맞댄 매솟은 여러 가지 무늬를 지닌 도시다. 무역 중심지로, 문화 전파 길목으로, 관광지로, 마약과 밀수와 인신매매가 판치는 무법천지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내겐 애초 이 매솟이 혁명전진기지로 박혔다. 까렌민족연합(KNU),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버마연방국민회의(NCUB)를 비롯한 버마의 소수민족해방, 민주혁명, 망명 민주정치조직들이 저마다 바깥세상과 통하는 연락사무소 겸 보급기지를 매솟에 차렸던 까닭이다. 바로 이 매솟에서 선을 달고 각 진영 ‘개구멍’을 통해 버마 전선을 들락거렸다. 1990년대 말로 접어들어 버마 소수민족해방전선과 민주혁명전선이 한꺼번에 시들면서 이젠 한 물 갔지만, 그 시절 외신기자들한테는 일과 낭만이 넘치던 도시였다.

그들이 “입도 뻥끗 못하는” 현실

방콕에서 북서쪽으로 498㎞ 떨어진 매솟은 타이-버마 관문일 뿐 아니라 인디아 대륙과 인도차이나반도를 잇는 다리 노릇을 해왔다. 매솟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타이, 버마를 아우르는 이른바 동서경제통로(EWEC)의 한 축인데다, 자유무역을 내걸고 2015년 출범한 아세안경제공동체(AEC)로 한껏 부풀어 올랐다. 타이 정부는 2021년 매솟 경제특구 건설을 목표로 내걸었다. 근데 겉치레일 뿐 요즘 매솟은 맥 빠진 기운이다. 만나는 이들마다 경기가 엉망이라고들 한다. 실제로 2016년 900억밧(약 3조원)이었던 매솟-먀와디 국경 무역이 2017년엔 700억 밧으로 곤두박질쳤다. 농산물 가격 폭락과 버마 돈 짯이 약세를 보인 탓이다.

딱주의 한 군쯤 되는 매솟은 12만 주민 가운데 버마 사람들이 80%에 이르는 타이 속의 버마다. 어디를 가나 버마 말이 들릴 정도다. 그러니 매솟 산업도 버마 사람들한테 기대왔다. 현재 타이에서 일하는 버마 노동자 수를 2백~4백만쯤으로 잡는데, 매솟에서 일하는 버마 노동자만도 20만을 헤아린다. 한 땐 버마 노동자 90%가 불법 이주자였는데, 지난해부터 타이 정부가 버마 노동자 합법화를 내걸고 여권 소지자한테 취업 허가증을 발급하면서 그 시한을 올 6월30일로 못 박았다. 해서 요즘 불법 노동자가 크게 줄었지만 앞날은 알 수 없다. 몇 달씩 걸리는 여권 발급에다 30만원 웃도는 비용을 노동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탓이다. “장기적 관점에서는 옳은 길이다. 다만 매솟을 비롯한 딱주 경제가 버마 노동자에 기대 온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딱 상공회의소 고문 수찻 뜨리랏왓따나 말 속에 매솟의 고민이 담겨있다.

1999년 타이 정부의 불법 버마노동자 체포령을 취재하면서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매솟을 본 적이 있다. 그즈음 매솟은 모든 공장에다 벼농사까지 멈췄다. 닭장차에 실려 온 버마 노동자 수백 명이 경찰 몽둥이에 휘둘리며 모에이강 둑에 무릎 꿇고 추방을 기다리던 그 새벽녘 풍경은 여태 내 심장에 박혀있다.

버마 노동자들은 타이 노동시장의 최하부 공동화를 매우는 땜질 노릇을 해왔다. 타이 경제를 놓고 보면 빼앗은 일자리가 아니라 떠받친 일자리다. 근데 아직도 버마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박해는 여전하다. “한 달에 3620밧(12만원) 받지만 입도 뻥긋 못한다. 쫓아내니까.” 매솟의 일본인 투자 옷공장에서 일해 온 산다 웨인(36) 말이다. 현재 타이 정부의 매솟 지역 최저 임금은 일당 310밧(1만원)이다. 같은 일을 하고도 타이 노동자에 비해 3분의 1밖에 못 받는 실정이다. 이번 취재에서 만난 남녀 노동자 일곱이 다 그랬다. 모두들 타이 관리자들한테 받는 성희롱과 비인격적 대우는 일상이라고들 입을 모았다. 이주 노동자의 권리와 평등 문제는 어디 할 것 없이 국경사회가 풀어야할 해묵은 과제다. 매솟은 그 한 본보기일 뿐이다.

모에이강을 끼고 타이의 매솟과 국경을 맞댄 버마 먀와디의 불법 카지노들은 전용 배를 띄워 고객을 실어나른다. 정문태 제공

무장세력 불법사업의 ‘현대판’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매솟에서 서쪽으로 5㎞ 떨어진 먀와디를 찾아간다. 매솟 출입국사무소를 지나 420m짜리 우정의 다리를 걸어서 넘어간다. 그 사이 먀와디도 많이 변했다. 1990년대 초 허름한 옛날 다리를 건너 두어 번 먀와디를 둘러 본 기억과 딴판이다. 다리를 건너기 무섭게 날아들던 총 든 군인들의 날카로운 눈길도, 범죄자 대하듯 노려보던 출입국관리소 공무원들 눈길도 이젠 사라지고 없다. 허허벌판에 판자 가건물 몇 개와 군인과 정보원들이 다였던 먀와디엔 4~5층짜리 건물들이 즐비하고 은행들과 환전소에 온갖 가게들이 들어찼다. 타이와 버마 상품들이 뒤섞인 시장통은 국경 마을 같은 냄새도 제법 풍긴다.

근데 속을 들여다보니 이런 건 변화 축에도 못 낀다. 카지노가 들어섰다. 모에이강을 낀 먀와디 가장자리에만 9개 카지노가 판을 벌였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여긴 까렌민족해방군과 버마 정부군이 치고받던 전선이었다. 특히 모에이강 물돌이동 완카는 버마 현대사에서 최대 격전지였다. 올해 초 먀와디 주민 3백여명이 반카지노 시위를 벌였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는데 와서 보니 아예 카지노 열풍이다. 그렇잖아도 5월 초 버마 정부가 카지노 합법화를 입에 올린데 이어 5월 중순엔 소수민족 따앙민족해방군(TNLA)이 정부군과 연결된 중국 국경 쪽 카지노를 공격해 19명이 사망하면서 카지노를 놓고 큰 말썽이 일던 터였다.

1989년 도박금지법에 따라 버마에서 카지노는 불법이다. 그럼에도 현재 타이와 중국 국경 쪽에 50여개 넘는 카지노가 날뛴다. 자본도 고객도 모두 카지노가 불법인 중국과 타이 몫이다. 카지노는 그동안 군부와 소수민족 무장 세력들이 국경 점령지역에서 벌여온 마약, 목재, 보석을 비롯한 전통적인 불법사업에서 한 발 더 나간 현대판이라 부를 만하다.

그 불법 현장을 볼만하다. 모에이강을 낀 먀와디 콤플렉스 카지노를 비롯한 모든 카지노들이 전용배를 띄워 타이 쪽에서 고객을 실어 나른다. 외국인이 비자 없이 국경을 불법으로 드나든다는 뜻이다. 단언컨대 버마 정부군과 카지노와 타이 공무원 사이에 불법 삼각거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먀와디 지역 카지노에서 다달이 2200만밧(660억원) 웃도는 돈줄이 굴러다닌다는 소문이 자자한 마당에 버마 정부나 타이 정부가 모를 리 없다. 먀와디 지역 카지노의 심각성은 여기가 버마 정부군 지역이라는 데 있다. 정부도 법도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건 아웅산수찌 정부의 한계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모에이강 너머로 지는 해가 전에 없이 아리게 다가온다. 남의 땅 매솟에서 눈치를 보며 서럽게 살아가는 버마 노동자들도, 먀와디에서 날뛰는 불법 카지노도 모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군사독재가 남긴 버마의 유산이다. 아웅산수찌를 이용해 민간정부 탈을 쓴 채 여전히 권력을 휘두르는 군인독재국가의 일상이다. 버마의 혁명이 끝날 수 없는 까닭이다.

타이와 국경을 맞댄 버마 먀와디의 냐지전통시장. 정문태 제공

[인터뷰] 버마노동자연대기구 대표 탄독

“매솟의 이 아이들이 내 팔자다”

88년 랭군공과대 학생시위 지도자

매솟서 노동자와 아이들 교육 헌신

흔히들 가문의 영광을 말하는데, 그이 집안은 버마 현대사에서 ‘싸움꾼’으로 이름 날렸다. 그이 아버지 수윈마웅은 1962년 독재자 네윈 반대투쟁을 이끈 주인공으로 1988년 민주항쟁 뒤엔 35년 형을 받았던 제1세대 싸움꾼이었다. 만달레이의대 출신인 그이 동생 탄케는 1988년 민주항쟁 뒤 국경에서 조직한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의장으로 반독재 무장투쟁을 이끌어왔다. 그이는 1988년 민주항쟁 도화선을 깐 랭군공과대학 시위를 이끈 학생운동 지도자로 매솟에서 버마노동자연대기구(BLSO)를 꾸려온 탄독이다. 남편과 아들 둘을 민주혁명에 바친 어머니 먀탄은 만달레이 지역 운동가들을 보살펴왔다. 2003년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아웅산수찌는 먀을 찾아가 이 싸움꾼 집안의 대 이은 민주화투쟁에 경의를 표했다.

1989년 체포령을 피해 인디아 국경으로 빠져나간 탄독은 버마민주게릴라전선(BDGF)과 버마학생동맹(ABSL)을 통해 무장투쟁을 준비했지만 인디아 정부가 허락하지 않아 한 동안 정치투쟁에 매달렸다. “근데 왜 노동운동으로?” “본디 나는 학생 때도 노동 쪽이었어. 인디아 국경에서 총은커녕 먹고 살겠다고 길이나 닦다보니 혁명도 노동운동도 다 뜬구름이었지.” “그쪽을 두고 왜 타이-버마 국경으로?” “인디아 국경 쪽엔 버마 노동자들이 없었으니. 해서 뜻이라도 한번 펴보고 죽자는 심정으로 매솟에 왔어.”

그렇게 2000년 매솟에 온 탄독은 동지 여섯과 함께 버마노동자연대기구를 만들었다. “여기도 와서 보니 노동환경보다 당장 아이들이 눈에 밟히더구먼. 지금 이 학교자리 주인한테 사정사정해서 가마니 깔고 판자 올려 학교부터 열었지.” 친구나 이웃들이 보태주는 샐닢으로 시작한 판자집 초등학교가 입을 타면서 2003년 노르웨이 노동단체에 이어 2005년 한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단체들이 힘을 보탰다. 그렇게 해서 2014년 매솟 한 귀퉁이에 교실 7개와 사무실 1개에다 노동자회의용 방 하나를 갖춘 2층짜리 학교를 세웠고 타이 교육부 공인까지 받아냈다. 탄독은 현재 교사 7명에 160명 아이들이 꼬물거리는 이 초등학교에 내년쯤 중학교 과정을 넣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다. 근데 현실은 거꾸로 간다. 그동안 이 학교 예산을 떠맡았던 오스트레일리아 이주노동자 지원단체(APHEDA) 지원이 올해 끝난다고 한다. “도와주겠다는 이들이 있긴 한데, 정치적 배경 지닌 아무 돈이나 덥석 받을 수 없어 마다했어. 어떻게 되겠지.” 그이는 열없는 마음을 껄껄웃음으로 때운다. 한 달에 6000밧(20만원) 받는 선생 일곱과 160명 공짜학생을 가르치는데 드는 1년 총예산이 60만밧(2천만원)이라고 한다. 2천만원에 160명 아이들 운명이 달렸다.

일요일 아침부터 탄독은 몰려든 버마 노동자들 교육과 상담으로 정신없다. 노동자와 그 아이들을 돌보는 이 고단한 일을 탄독은 “내 꿈이었고, 내 팔자다.”고 한다. 꼭 있어야 하고, 꼭 해야 할 일에 이 세상은 참 인색하다. 어떻게든 이 아이들 내년을 지켜줘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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