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구본무 회장이 만들라 했던 '새 도감'

2018. 5. 26.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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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피플] 이병우의 새 보기 좋은 날

[한겨레]

탐조인들이 새를 관찰하고 있다. 관찰 도구와 도감은 탐조의 필수 요소다.

탐조 문화가 정착되기 위해서 중요한 전제 조건들이 있다. 탐조하는 사람, 탐조하는 단체, 관찰 도구, 새들 서식지의 보존 등이 그 조건이다. 그 중에서 아주 핵심적인 요소가 하나 더 있다. 도감이다. 좋은 도감의 유무를 탐조 문화 발전의 조건으로 보기도 한다.

도감(圖鑑)은 한자 뜻대로 ‘그림이나 사진을 모아 실물 대신 볼 수 있도록 엮은 책’이다. 영어로는 ‘일러스트레이티드 북’(illustrated book) 또는 ‘필드 가이드’(field guide)라고 하는데, 휴대용 도감이라는 뜻을 가진 필드 가이드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도감의 필수 조건은 휴대가 간편하면서 필요한 모든 내용이 다 담겨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진정한 도감은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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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조류도감의 탄생

많은 탐조인들은 2000년에 발간된 ‘야외 원색도감 한국의 새’(한국의 새)를 한국 탐조 역사에 있어 아주 큰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이전에는 일본에서 발간된 도감과 일부 학자들이 발간한 사진 도감을 병행해 사용했다. 사진 도감에 실리는 사진은 촬영 환경과 개체의 개성에 따라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한 종을 표준적으로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그림 도감이 절실하던 차였다.

그때 엘지(LG) 상록재단이 ‘한국의 새’를 발간했다. 당시 한국에는 새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세밀화 화가가 없었다. 엘지는 일본의 새 도감을 그린 타니구치 타카시의 그림을 실어 도감을 완성했다. 한국과 일본은 같은 서식지로서 나라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이미 좋은 새 그림을 가진 일본의 책을 활용한 것은 여러모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우리나라 화가를 양성하여 그렸다면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했을 것이다.

지난해 울산에서 열린 세계 조류 축제 중 하나인 ‘아시아 버드 페어’(ABF)에서 ‘한국의 새’ 도감을 활용하는 참가자들.
현장에서 도감은 새 식별을 위한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렇다면 엘지는 왜 이 도감을 만들었을까? 최근 작고한 엘지 구본무 회장이 쓴 초판 발간사에 그 이유가 나와 있다.

구 전 회장은 오랜 취미로 새를 관찰해온 탐조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발간사에서 “탐조 길에 오르며 외국에서 발간된 도감을 챙길 때마다 우리나라에도 간편하게 휴대하면서 참고할 수 있는 조류도감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어왔는데, 마침 엘지 상록재단이 자연 생태계 보전 사업의 목적으로 우리말과 영문으로 된 도감을 만들게 되어 기쁘다”고 밝혔다.

조류도감의 역작 ‘한국의 새’를 아시나요
탐조가였던 고 구본무 엘지 회장이
18년 전 의욕적으로 펴낸 새 그림 도감
한국 조류도감의 ‘역작’으로 떠올랐고
새는 전문가에서 대중에게 날아왔다

많은 사람이 이 책의 발간으로 학자들의 조류 연구 수준의 새 보기 활동에서 보통의 탐조 문화 시대로 접어든 것으로 평가한다.

이후 꽤 괜찮은 도감들이 몇 종 더 출간됐다. 그런데 대부분 사진 도감이었고, 그림 도감 몇 종은 시장성에 맞지 않아 안타깝게도 절판됐다. 엘지 상록재단 도감도 시장에서 수익성은 없을 것이다. 한 재벌의 지혜로운 결단으로 매우 훌륭한 도감을 갖게 되었지만, 실상 자연과 사람을 위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한 결단은 결코 재벌이라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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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사람이 이 책을 봤으면 좋겠다

그런데 엘지가 좋은 뜻으로 책을 계속 만들어낸다고 하더라도, 이 책의 유통 문제는 풀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대형서점에 가도 이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온라인에서는 구매가 가능하지만 나이 드신 분이나 외국인의 경우 접근이 어렵다. 상록재단은 ‘한국의 새’ 애플리케이션을 책의 약 30% 가격인 1만원에 판매하고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체험판은 무료인데 너무 적은 종만 볼 수 있어 도감으로서 큰 의미는 없다. 누구에게나 쉽게 전달돼 활용될 수 있도록 유통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생기기를 기대한다. 그러면 구본무 회장의 발간사에서처럼 그의 소망이, 그리고 누구나 바라는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새가 자유와 평화, 그리고 희망의 상징이듯이 우리의 자녀들 또한 복된 미래를 누려야 할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들이 이 도감을 펼쳐놓고 더욱 많은 새의 이름과 그 생태에 관한 견문을 넓히고 나아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사는 값진 지혜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글·사진 이병우 에코버드투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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