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end Interview] 日서 태어나 韓귀화..위안부·독도연구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

이재철 2018. 5. 2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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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로 태어나 도쿄대 공대 졸업했지만..日 역사왜곡 두고볼 수 없어 독도학자 됐죠
"日우익단체, 가족 테러협박..그래도 신념지킨 아버지 되고싶어"
한국에서 `독도 지킴이`로 활약해온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가 연구실에 걸어둔 액자 하나를 들고 독도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와 사회의 보다 많은 관심과 대응을 당부하고 있다. 이 액자 속 사진은 고(故) 한진호 서예가가 1954년 독도 동도 정상 부근 암벽에 힘차게 새긴 `한국령(韓國領)` 글씨를 찍은 것이다. [한주형 기자]
"독도가 일본 영토입니까, 한국 영토입니까."

1995년께 한 대학 강연에서 나온 죽비 같은 질문이 일본 출신 한국 정치학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독도 분쟁에 어두웠던 그는 질문을 던진 학생에게 "지금은 잘 모른다. 하지만 연구를 해서 꼭 답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10년 뒤 관심이 생기면 끝을 보고야 마는 그의 끈기는 일본 정부와 학계를 발칵 뒤집어놓는 성과로 이어졌다. 그가 일본 곳곳을 돌며 확보한 1800년대 말 일본 관제지도에는 독도와 울릉도라는 지역 표기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이를 세상에 공개하며 그는 비로소 10년 전 한국 학생이 던진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었다.

일본 정부의 독도·위안부 역사 왜곡 행태에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맞서온 학자가 있다. 지난 반평생을 독도와 일본제국주의 역사 연구에 헌신해온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62·독도종합연구소장)다.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란 그는 일본 최고 대학인 도쿄대를 졸업하고 플라스틱 렌즈를 만드는 부친의 가업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한 잡지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기사를 읽고 충격을 받아 일본 제국주의 연구에 천착하게 된다. 소싯적 부친의 공장에서 일하던 재일동포 근로자들을 통해 접한 한국 문화에 대한 정보와 관심도 한몫했다.

서른둘이 되던 1988년 한국행을 결심해 고려대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30년 동안 그의 학문 영역은 제국주의 통치 방식에서 독도, 위안부 문제로 확장했다. 지금 학계는 최고의 독도·위안부 연구자로 그를 주저 없이 꼽는다. 일본 출신인 탓에 '독도는 일본과 무관한 고유의 한국 땅'이라는 그의 연구 발표는 일본 내부에 더 큰 충격과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 때문에 일본 우익단체들로부터 테러 협박을 당하기도 했다.

양국의 경계점에 서 있지만 그는 스스로를 "경계인이 아니라 분명한 한국인이다. 그래서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일본이 나를 낳아준 곳이라면, 한국은 내가 평생을 추구해야 할 일과 목표를 제시해준 나라"라며 정확한 과거사와 역사관을 제시하는 것이 고국에 대한 '애국'이라고 자부한다.

그는 이성과 사실을 중시하는 일본 정부와 학계가 객관성이 덜한 역사 분야에서 자의적으로 불편한 진실을 감추려는 행태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며 한숨을 쉰다. 어느덧 환갑을 지났지만 그의 밤샘 연구가 더 늘어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지난했던 연구 과정과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에 180분의 인터뷰 시간이 게 눈 감추듯 지나갔다.

―지난 15년간 독도 관련 일본의 논리를 무너뜨리는 고지도 발굴 등 성과가 상당하다.

▷1892년 제작된 '조선국전도'와 1893년 '대일본전도' 등을 찾아내 발표했다. 대일본전도에는 독도와 울릉도가 표기되지 않았다. 2005년에는 에도막부 시대 관제지도 3점도 찾아내 공개했다. 역시나 해당 지도에는 독도가 포함돼 있지 않았다. 1892년 일본인이 제작한 조선국전도를 보면 독도가 분명하게 조선국 영토로 표기돼 있다. 울릉도와 독도가 죽도와 송도라는 이름으로 써 있다. 1615년 에도막부가 만든 고지도에서도 독도는 물론 심지어 홋카이도(북해도)까지 일본 땅이 아닌 것으로 표시됐다. 조선으로 가는 항로 역시 독도 쪽이 아닌, 대마도에서 가는 항로만 표시돼 있다. 1897년 일본 농상무성이 제작한 관제지도는 일본 영토가 노란색, 조선 영토가 흰색인데 독도를 흰색으로 표시했다.

―이 중에서도 독도를 자국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이 반박할 수 없는 자료가 있다면.

▷일본에는 한국의 김정호 선생과 같은 위대한 지리학자가 있다. 바로 이노 다다타카(1745~1818)다. 일본 교과서에 이름이 나올 정도로 유명한 분이자 1930년대까지 모든 일본 지도의 근간이 된 지도를 만들었다. 이분이 1821년 완성한 '대일본연해여지전도'는 그 어떤 작은 섬도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그렸다. 그런데 이 지도 내 일본 영토에는 독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대한민국 외교부는 '대일본연해여지전도'를 기초로 50여 년 뒤 발행된 관제지도 '관판 실측일본지도' 원본을 보관 중이다. 이 지도는 독도의 일본 영토 주장을 무력화하는 중요 자료로 평가받는다). 이노 다다타카 지도를 비롯해 그간 축적한 일본 고지도의 '항로'를 기준으로 새롭게 일본의 거짓 논리를 입증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일본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찾는데 어려움이 크지 않았나.

▷기본적으로 고지도 자료는 도서관에서 공개된 것이다. 복사를 원하는 이가 어느 국적이든지 관계없이 공개해야 한다. 문제는 각종 역사 자료가 어느 곳에 있는지 파악하는 과정이 녹록지 않다는 점이다. 예컨대 내가 늘 찾던 일본 어느 현의 '○○지도센터'라는 도서관이 '마이크로필름화' 작업을 이유로 갑자기 공개 불가 상태로 바뀌었다. 2007년 작업을 시작한다고 하더니 1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작업이 끝나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일본이 마이크로필름화 작업을 하면서 고지도에 기재된 컬러 부분까지 모두 흑백으로 처리한다고 하더라. 이 경우 색상별로 본토와 외국 영토를 구분한 고지도에서는 독도가 어떤 영역으로 표기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사비를 털어가며 이런 자료를 수집했다고 하는데 혹시 외부 지원은 없었나.

▷다행히 연구를 돕겠다며 도와주신 기업인이나 연예인들이 있다. 가수 김장훈 씨는 내게 기부를 하며 어떤 부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잘 써달라고 하는데 한국을 위해 뛰는 내게 막중한 책임감을 불어넣어준다. 선한 의지가 힘이 되는, 너무나 고마운 분들이다.

―위안부 문제 연구에서도 성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지난달 출간한 '일본의 위안부 문제 증거자료집 1'이 대표적인데.

▷이 책은 중일전쟁이 시작된 1937년부터 태평양전쟁이 끝난 1945년까지 작성된 일본군 위안부 관련 문서 자료를 번역한 것이다. 2년이 걸렸다. 나를 비롯해 연구진 4명이 일본의 공문서 300여 개를 번역하고 그 의미를 분석했다. 단순한 번역 작업이 아니다. 해당 자료가 당시 시대 배경과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를 파악하고 해설하는 게 내 역할이었다. 당연히 일본의 시대 배경을 모르면 해석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특히 1940년 10월 11일 일본 다카모리 부대가 작성한 문건 '경비구역 내 지방상인의 영업에 관한 규정'은 꼭 봐야 한다. 여기에는 '위안소 위안부는 황군(일본군) 100명에 1명꼴'이라고 적혀 있었다. 위안부 1명이 병사 100명을 상대했다는 뜻으로, 위안부가 병사들의 성노예였음을 확인시켜준다.

호사카 유지 교수가 지난달 발간한 `일본의 위안부 문제 증거자료집 1`. 이 책에서 그는 `위안부는 일본군 100명에 1명꼴`이라는 1940년 일본 다카모리 부대의 위안부 영업규정을 최초로 공개해 잔혹했던 일본군의 위안부 착취를 입증했다.
―일본 문서에서 이 부분을 발견했을 때 심정은.

▷충격 그 자체였다. 올해 1월 즈음이었다.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 사이트에서 이 자료를 발견했다. 국내 위안부 연구의 권위자 두 분에게 자문을 했다. 이분들도 정부 문서에서 위안부 1명이 100명을 상대했다는 내용을 처음 본다고 하셨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핵심 논리는 위안부가 돈을 벌기 위해 이뤄진 자발적 참여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 작성 문건에서 이런 비인간적 성노예 규정이 존재하고 있었다. 일본의 거짓 부정 논리가 전혀 성립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일본 문서들이 옛 일본어로 서술돼 있어 일본사람조차 읽기 어려운 정도라고 들었다.

▷자료 대부분이 옛날 일본어에 흘림자로 돼 있어 번역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어떻게든 위안부문제 증거자료집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해석의 어려움 때문이다. 일본 국민조차 읽기 어려운 내용을 한국이 먼저 풀어내 널리 퍼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만 사실 관계를 알아서는 안 된다. 옛날 일본어가 현대 한국어로 번역됐으니 많은 일본인이 보다 쉽게 이 책을 통해 정확한 과거사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부끄러운 질문을 해야겠다. 박근혜정부에서 한일 위안부 이면합의 문제가 국민적 분노를 낳았다.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될 합의였다. 합의가 이뤄진 데 대해 연구자들도 반성을 해야 한다. 학계에서 반대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 증거자료집을 집필하기로 결심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면서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한국 사회 내부에서조차 위안부 이슈에서 생각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에서 국론이 분열돼 일본에 오히려 유리한 상황을 조성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호사카 유지 교수가 2015년 찾아내 발표한 `대일본제국전도`를 공개하며 독도가 일본의 `고유 영토`라는 아베 일본 정부 주장이 명백한 허위라고 강조하고 있다. 일본 농상무성이 1897년 제작한 이 지도는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영토와 다른 색깔로 그리며 조선 영토로 표기했다. 그간 일본 영토에서 독도가 빠져 있는 일본 고지도를 발굴해왔던 그는 독도를 조선 영토로 표기한 121년 전 정부 공식 지도까지 찾아내 아베 정부 주장이 명백한 허위임을 재확인시켰다. [한주형 기자]
―미국이 한일 합의를 종용했다는 얘기도 있다.

▷여러 설이 있지만 분명히 미국 쪽 요청도 컸다고 본다. 미국은 한·미·일의 원활한 공조체제를 위해 한일 관계가 좋아져야 한다고 압박해왔다. 이 때문에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한일 양국이 서로 납득하는 형태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라고 메시지를 강하게 보냈다. 이 같은 대외 변수로 갑작스러운 물밑 교섭이 이뤄졌고, 협상 과정에서 한국이 강력하게 주장해야 할 것들이 무시됐다. 당시 물밑 교섭에 관여했던 한국의 정보기관 인사를 만났는데 그조차 "한국이 일본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고백하더라.

―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한일 관계가 어떤 흐름으로 변화할까.

▷트럼프 대통령의 사고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는 미국의 '전통적' 한일관에서 비켜 있다. 전통적 한일관은 일본을 함께 가는 해양세력으로, 한국을 (이보다 느슨한) 연안세력 범주에 넣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철학을 공부한 인사가 아니다. 미국 정계의 전통적 사고가 옳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즈니스 마인드에서 이익만 있다면 얼마든지 러시아, 중국과도 악수를 하는 인물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을 싫어한다. 미국 경제에 가장 많은 적자를 안겨준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잘 활용하면 향후 미·일 관계 이상으로 한미 관계가 돈독해질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마인드는 남북 관계에도 중요한 변수가 될 것 같은데.

▷트럼프 대통령에게 최우선순위는 미국의 경제적 이익이다. 지금의 한반도 평화 창출 노력에도 트럼프 대통령의 비즈니스 마인드가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도 햄버거를 먹고, 평양에 트럼프타워를 만들며 미국 핵심 기업들을 진출시키겠다는 게 트럼프 대통령 생각이다. 이런 부분이 한반도 평화에 플러스가 되도록 한국 정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오로지 한국의 역량에 달렸다.

―그렇다면 현재 진행되는 남북 및 한일 관계에서 문재인정부의 노력은 어떻게 평가하나.

▷사실 어느 정부가 이끌더라도 지금 남북 간 중대한 변화의 이벤트는 발생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문재인정부를 평가할 만한 건 아주 빠르고 주도면밀하게 움직인다는 점이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의 행보를 보면 1970년대 초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가 연상된다. 그때와 상당히 비슷하다. 20년 뒤 동·서독 통일이 가능했던 것은 브란트 총리가 상호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며 평화협정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역사가 안내하는 이 같은 교훈을 제대로 파악하고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일본에서 태어나 최고 학부인 도쿄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정치학자로 활동하는 매우 특이한 이력이다.

▷내 도쿄대 동기들도 놀라서 "왜 정치학자가 됐느냐"고 묻는다. 동문 사이에서 나는 특이한 사람으로 분류된다. 전공은 아버지의 관심과 가업 문제 때문이었다. 아버지 회사가 금형으로 플라스틱 렌즈를 만드는 회사라서 금속공학과 연결된다. 사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중·고등학교 때 역사소설을 즐겨 읽었다. 어떤 면에서는 인문계가 맞았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알고 있는데 수학을 잘하면 무조건 이공계로 가는 게 당시 일본 문화였다. 나도 이런 관념에 걸렸다(웃음). 졸업 후 아버지께서는 큰형에게 경영을, 내게는 기술 관련 업무를 맡기셨다.

―잠시 가업을 잇다가 한국행을 선택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이었나.

▷대학 졸업 후 기술 업무를 담당할 때 공교롭게도 사업이 많이 어려워졌다. 아버지께서 "회사가 정상화될 때까지 너희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찾아보라"고 하시더라. 자식들에게 미안한 생각에 이런 결정을 내리신 것 같다. 그때 아버지께 한국말을 더 배우고 한국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았다. 아버지는 원래 교사였다가 소니에 입사해 기술을 배우고 창업하셨다. 아주 작은 기업으로 시작해 성공을 일구셨다. 지금 내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이자 가장 존경하는 분이다.

―전혀 다른 인생의 진로에서 빠르게 적응한 것 같다. 몰입 능력이 다른 이보다 뛰어난 것인가.

▷중학교 때 교장 선생님이 조회 시간에 늘 강조한 얘기가 있다. "하나를 듣고 열까지 아는 학생은 머리가 좋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이런 학생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대신 하나를 듣고 열 가지 의문을 가져 달라"는 것이다. 의문을 가지면 이를 풀고자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 노력이 쌓여 훌륭한 재목이 된다는 당부였다. 아버지께서도 식사 자리에서 내게 "인생이라는 것은 예측대로 가지 않는다. 네가 생각하는 이치 밖에 또 다른 이치가 있다는 것을 늘 명심하라"고 얘기하셨다. 일본이 숨기는 독도·위안부 문제의 진짜 이치를 내가 찾아온 것도 아버지의 평소 가르침과 무관하지 않다는 느낌이다. 이런 많은 말씀이 지금의 나를 완성시켰다고 생각한다. 아마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께서 들려주신 인생 얘기를 책으로 쓰면 몇 권은 될 것이다. 아버지는 저녁을 먹을 때 유독 내게 이런 인생 얘기를 세 시간 넘게 하시곤 했다.

―지금의 부인과는 어떻게 만났나.

▷도쿄대 선배가 소개해줬다. 동갑내기로 당시 아내는 한국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공부하며 도쿄대 한국시 낭독회 등에서 활동했다. 선배 소개로 만나 2년여 동안 양국을 오가면서 데이트를 했다. 특히 백제와 일본 관계 등 한일 고대사에서 서로 관심사가 맞았고 얘기가 잘 통했다. 1986년에 결혼했는데 부모님도 한국 여성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 크게 반대하지 않으셨다. 사업 관계로 자주 독일, 미국 등 해외를 왕래하며 국제결혼에 개방적 사고를 가지셨기에 가능했다. 어머니께서는 "왜 하필 한국 여자냐, 한국 여자가 예뻐서 그런 거냐"고 물으시더라(웃음).

―결혼은 그렇다 쳐도 한국으로 귀화하기로 한 결정은 일본 가족에게 정말 큰 충격이었을 텐데.

▷2003년 세종대 교수로 부임이 결정되고 한국으로 귀화를 결심했다. 당시 이 사실을 큰형과 두 동생에게 먼저 얘기했다. 형제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그래도 같은 세대라서 그런지 이해를 해주더라. 다만 "부모님이 놀라실 수 있으니 1년 뒤에 얘기하는 게 좋겠다"고 부탁하더라. 그래서 1년이 지나고 나서야 부모님께 고백했다. 당시 부모님께서는 아무 말씀을 안 하시고 그저 듣고만 계셨다. 표정을 보니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알겠더라. 하지만 이미 1년 전에 결정한 것이라 반대한들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는 점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귀화한 본인의 정체성을 외부에서는 '경계인'의 시각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한데.

▷(단호하게) 나는 한국 사람이다. 경계인이 아니다. 경계인이 되고 싶지도, 돼서도 안 된다. 나는 일본을 이해하는 입장이지만 지금 한국 사람이기에 한국을 왜곡하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 또 한국에서도 팩트가 잘못된 얘기가 나오면 명확하게 지적한다. 항상 논리와 진실을 추구해 왔고 앞으로도 확고한 한국인으로서 이 길을 걸어갈 것이다.

―독도·위안부 연구를 보면 관심 연구 분야를 정할 때 나름의 기준이 있을 것 같다.

▷그렇다. 나는 '사회적 공헌'을 하는 것이 아니면 관심이 없다. 지금까지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분야를 넓혀 가며 불필요한 사회적 논란을 종식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했다. 이번에 '일본의 위안부 문제 증거자료집1'을 출간한 것처럼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데 보람을 느낀다. 또한 나는 한 분야만 집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인터뷰에서도 한일 고대사부터 독도·위안부 문제와 남북 관계, 한·미·일 관계까지 다양한 분야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 한 곳만 파서는 복잡다단한 문제를 관통해 설명할 수 없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리고 학계에서 '호사카 유지'라는 이름이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나.

▷내 자녀들에게는 '신념을 가지고 살았던' 아버지로 기억되고 싶다. (웃으며) 아마 지금도 자녀들이 이와 비슷한 느낌으로 나를 평가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원하는 평판이나 기대하는 게 전혀 없다. 어떤 평가를 염두에 두고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생애에 은퇴라는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2년 뒤면 정년퇴임 시점이지만 아직도 논리와 진실을 확인해야 할 많은 자료가 쌓여 있다. 계속 연구할 생각이다. 일본 위안부 문제 증거자료집도 앞으로 2편, 3편, 4편을 계속 낼 것이다. 기대해 달라.

호사카 유지는…

1956년 일본 도쿄에서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플라스틱 렌즈 사업을 하는 부친 밑에서 유복하게 자라 1975년 도쿄대에 입학해 금속공학을 전공했다. 부친 회사에서 일하던 재일동포 근로자들에게서 한국 문화를 접했던 그는 한일 관계를 제대로 연구하겠다며 1988년 고려대 대학원에 입학해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땄다. 독도·위안부 문제로 연구 분야를 넓혀가며 2003년 세종대 교수로 부임하고 그해 한국으로 귀화했다. 이후 15년간 세종대 교양학부 교수와 독도종합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며 독도가 한국 땅임을 보여주는 일본 관제지도 등을 한국 정부에 기증해왔다. 일본의 소유권 논리를 무너뜨리는 각종 자료는 그가 사비를 털어 확보한 것들이었다. 한국시 낭독회에서 만난 동갑내기 한국 여성과 1986년 결혼해 2남1녀를 두고 있다.

[이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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