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섭 싫다" 날 풀리니 밖으로..또 다시 거리 점령한 '그들'

최민지 기자 입력 2018. 5. 23.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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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면 무법천지".. 시작된 여름철 노숙 전쟁.. "자립 의지 심는 장기적 대책 필요"


낮 최고기온이 29도까지 올라간 이달 15일 밤 8시 서울역 앞. 술과 땀, 소변 냄새가 뒤섞인 악취가 후텁지근한 바람을 타고 코를 훅 찌른다. 노숙자들에게서 나는 냄새다. 지하도 계단과 통로, 역 앞 광장, 택시 승·하차 구역 어디로 눈을 돌려도 노숙자가 없는 곳이 없었다.

얇은 천이나 박스 위에 몸을 뉘이고 조용히 잠을 청하는 노숙자도 있는 반면 삼삼오오 모여 술 마시며 큰 소리로 '천국'을 논하는 무리도 있었다. 한 노숙자는 사람들이 지나가든 말든 바지 앞섶을 풀고 소변을 봤다. 광장 앞 길가에서는 경찰 2명이 횡설수설하는 노숙자 2명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어느덧 올해도 초여름을 향하면서 거리에서 한뎃잠을 청하는 노숙자들이 급증하고 있다.

야외 취침이 가능한 계절이 다가오면서 해마다 반복되는 '노숙 전쟁'이 또 시작됐다. 역 주변 경찰들은 노숙자들로 인한 민원에 하루에도 몇 번씩 거리로 나선다. 보건복지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이 대책을 내세우지만 역부족이다.

서울역파출소 관계자는 "날씨가 따뜻해지면 노숙자들이 더 많이 밖으로 나온다"며 "추울 때 150명 정도이던 노숙자들이 날씨가 더울 땐 230명까지 늘어난다"고 말했다. 10년째 서울 영등포역파출소에서 노숙인 관리를 전담하고 있는 정순태 경위도 "추운 겨울에 50~60명 정도였던 영등포역 노숙자는 한여름이 되면 두 배 가까이 늘어난다"고 말했다.

노숙인 사건·사고는 음주 폭행부터 고독사까지 다양하다. 1년 정도 서울역에서 근무한 윤종곤 서울역 4호선 역장은 "걸어다니면서 용변을 보거나 옷 벗기, 지나가는 여성에게 성희롱 발언을 하는 경우가 가장 흔하게 보이는 문제 사례"라며 "'외국인이 많아 부끄럽다'는 식으로 민원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은데 문제의 노숙자를 경찰에 신고해도 대부분 훈방 조치된다"고 말했다.

17일 오후 서울역 광장 앞 천막에서 진행된 한 종교단체의 예배에 노숙자들이 참여하는 모습. 날이 더워지고 야외 노숙이 가능해지면서 거리를 배회하는 노숙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진=김영상 기자


정순태 경위는 "음주 상태에서 시비가 붙는 노숙인들, 파출소로 쳐들어오는 노숙인들을 말리고 나면 진이 다 빠진다"고 말했다. 사망사고도 끊이지 않는다. 정 경위는 "5년 전쯤엔 낮 최고기온이 37도까지 오른 8월의 어느 날 온몸에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노숙인 시체를 수습한 적도 있다"며 "여름에는 부패가 빨라 시신 수습에 더 애를 먹는다"고 말했다.

이들을 위한 시설 자체가 없는 게 아니다. 하지만 추울 때 잠시 머물다 날씨가 풀리면 다시 거리로 나오는 패턴이 반복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국가에서 관리하는 노숙인 생활시설은 전국 57개소, 지방자치단체에서 관리하는 재활센터만 60개소에 달한다. 노숙인의 보호·재활·자립 기반 조성을 위해 2012년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노숙인복지법)'이 제정된 이후 지속적으로 시설이나 예산이 늘었다. 서울시 노숙인 지원 예산은 2011년 363억원에서 지난해 477억원으로 100억원 넘게 늘었다.

그러나 노숙인 수는 줄지 않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하는 '노숙인 등 실태조사'에 따르면 행정자료 상 거리 노숙인 수는 2014년 1138명에서 2016년 10월 1522명으로 증가했다.

시설 생활 초기에 금연, 금주 등의 규칙적인 생활을 꺼려 다시 길거리로 나서는 노숙인들이 많다는 분석이다. 정 경위는 "거리 노숙인들은 통제당하는 걸 싫어하는데 시설에 들어가면 술도 못 마시고 단체생활을 해야 하는 등 자유로운 생활이 제한된다"며 "추운 겨울에는 몇 달 간 시설로 들어갔다가 날이 풀리면 다시 거리로 나온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시설 대신 알코올 등 각종 중독 증세를 보이는 노숙인들을 위한 정신과 치료나 자립을 위한 장기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숙인을 지원하는 서울시 산하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의 이수범 실장은 "한 시민이 노숙자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문제를 겪었으며 대부분 희망을 잃고 심신이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라며 "노숙인이 거리생활을 벗어나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한 상처치료·심리치료·트라우마 극복·자존감 회복 등을 위한 트라우마극복센터나 심리치유센터를 신설해 노숙인의 정신적·정서적 피해회복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18일 지하철 서울역 화장실에 버려져 있던 대변 묻은 바지를 한 청소노동자가 치우고 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 청소노동자는 "노숙자들이 역내 화장실 벽에 종종 변을 묻혀놓곤 한다"고 말했다. /사진=김영상 기자


다년간 현장에서 노숙인을 지원해 온 서울시 관계자는 "시설에서 단체생활이 어려운 알코올중독·정신질환 노숙인을 위해 2016년부터 주택지원사업을 시범 운영 중"이라며 "사회복지사를 배치해 (알코올 중독 치료를 위한) 복약 관리, 병원 전문의 상담 안내 등을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택지원사업이란 단체 생활에 적응하기 힘든 노숙인에게 원룸형 공공임대주택을 활용해 주거 공간을 제공하는 사업이다. 현재 남성 노숙인 지원주택 20호에 19명, 여성 18호에 17명이 각각 생활하고 있다.

이 관계자는 "일부 단체들은 거리 노숙인들의 (폭행, 강제퇴거 등) 인권 침해 문제만 강조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건 노숙인 한 명이 시민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도록 재활 의지를 심어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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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지 기자 mj1@mt.co.kr, 최동수 기자 firefly@mt.co.kr, 방윤영 기자 byy@mt.co.kr, 김영상 기자 video@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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