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탁구공만한 화장품 주문했더니.. 금고만한 상자에 담겨왔다

손호영 기자 2018. 5. 22.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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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이 생명입니다] [1부-3] [쓰레기 쏟아내는 과대포장] 해외와 택배 포장 비교해보니
美서 배송된 택배, 상품 더 크지만 상자 부피는 국내 3분의 1
이케아 "공기를 배송하지 않는다".. 만들 때부터 '최소 포장'
한국 1인당 택배 44.8건 세계 1위.. 뽁뽁이 등 쓰레기 '눈덩이'

기자는 지난주 한 국내 화장품업체 온라인 몰에서 탁구공 크기의 아이섀도를 주문했다. 지름 4㎝, 높이 1.3㎝의 납작한 원통형 화장품이다. 나흘 뒤 집으로 가로 30㎝, 세로 25㎝, 높이 13㎝짜리 상자가 배송됐다. 비닐 테이프를 뜯으니 상자 윗부분이 텅 비었다. 뽁뽁이로 화장품을 둘둘 감싼 다음 종이 판자에 올리고, 그 위에 다시 랩을 씌워 상자 바닥에 고정했다. 상자 부피(9750㎤)가 화장품 부피(16.3㎤)의 598배다. 원통형 제품을 쌓을 경우 빈 공간이 생기는 점을 감안하면 같은 제품 420여 개를 담을 수 있는 크기다.

같은 날 미국의 한 백화점에서 온라인으로 주문한 비슷한 크기의 아이섀도는 이보다 훨씬 작은 상자에 담겨 배송됐다. 가로·세로 5㎝, 높이 1.3㎝ 크기의 화장품이 가로 21.5㎝, 세로 16.5㎝, 높이 8㎝의 상자에 담겨 왔다. 화장품 부피는 32.5㎤, 상자 부피는 2840㎤다. 화장품은 국내 제품보다 더 크지만 상자 부피는 국내 택배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해외 배송된 제품 역시 파손 없이 정상 배달됐다. 한국의 택배 포장은 말 그대로 '과포'(과대 포장)였다.

작년 우리나라에서 오간 택배 상자는 23억개나 된다. 1인 가구가 늘고 각종 대여 서비스가 발달하면서 먹고 입고 즐기는 모든 물건을 택배로 해결할 수 있게 됐다. 그에 비례해 종이는 물론 비닐·스티로폼 등 각종 플라스틱 쓰레기도 급증했다. 손톱만 한 물건을 주문해도 박스와 완충재·포장재가 딸려 온다. 물건을 포장할 때 쓰는 스티로폼, '뽁뽁이' 비닐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쏟아진다.

빽빽하고 정교한 '이케아 포장' - 플랫팩(flatpack)기법으로 포장한 가구 기업 '이케아' 의자. '공기를 배송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맞춰 가장 작은 부피로 포장하고, 빈 공간엔 스티로폼 대신 골판지를 끼워 넣었다. /고운호 기자

한국의 1인당 택배 이용 건수는 작년 기준으로 44.8건이다. 미국(34.6건)이나 일본(29.8건), 중국(29.1건)보다 더 많다. 2000년 2.4건에서 17년 만에 19배 늘었다. 게다가 '과대 포장'까지 돼 택배 쓰레기는 해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지만, 택배 과대 포장을 규제하는 법령은 없다. 판매자들은 '물건 파손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한다. 포장이 조금만 부실해도 소비자들의 항의 글이 쏟아진다는 것이다. 반면 글로벌 기업들은 수년 전부터 '공기 없는 포장'을 목표로 다양한 포장법과 포장재를 개발하고 있다. 제품 생산 단계부터 포장 부피를 고려하고, 파손을 막으면서도 재활용이 쉬운 완충재를 사용한다.

전북 군산에 사는 고모씨는 지난 4일 한 국내 가구 업체 온라인 몰에서 주문한 조립식 식탁과 의자를 배송받은 뒤 종이 상자, 비닐 등 쓰레기를 정리하느라 진땀을 뺐다. 식탁 한 개와 의자 여섯 개가 각각 다른 종이 박스에 포장됐고, 다시 식탁·의자의 본체와 다리 등 부품들이 하나하나 분리돼 비닐 포장됐다. 일일이 포장재를 뜯어내니 주문한 제품보다 부피가 더 컸다. 고씨는 "비닐양이 많아 그냥 버리기 어려웠다. 여태 집에 두고 재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 중"이라고 했다. 업체 관계자는 "파손 위험 때문에 스티로폼을 사용하지만, 종이 포장 등 친환경 포장에 대해서도 고민 중"이라고 했다.

문제는 이 택배 쓰레기의 상당 부분이 재활용되지 않고 태워진다는 점이다. 지난달 20일 찾은 서울의 한 재활용 선별장에 쌓인 비닐 쓰레기 중 3분의 1가량이 택배에 쓰는 '뽁뽁이' 비닐이었다. 폐비닐은 대부분 녹여 고형 연료로 사용하거나 소각하는데, 재활용 업체들은 '돈이 안 된다'며 받기를 꺼린다. 뽁뽁이 비닐은 일일이 터뜨려 버리지 않으면 부피가 커 수거도 어렵다. 2011년 하루 3950t 발생하던 플라스틱 쓰레기가 2016년엔 5445t까지 늘었다. 최주섭 한국자원순환정책연구원장은 "택배 물량을 줄이기 어렵다면 적절한 양의 포장재를 사용하면서도 상품이 파손 없이 배송될 수 있도록 상자 크기별로 다양한 '표준 규격'을 개발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 최대 가구 기업 '이케아'는 모범 사례로 꼽힌다. 지난 2015년 제조 단계부터 포장·배송을 고려해 택배 부피를 줄이는 '플랫팩(flat-pack)' 포장법을 도입했다. '공기를 배송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서다. 가구 부품을 모두 분리해 골판지 상자에 정교하게 배치한다. 가장 작은 부피로 포장할 수 있는 구조를 찾아내고, 남은 공간에는 골판지를 끼워넣는다. 이케아코리아 관계자는 "포장재를 바꾸기 전 이케아에서 사용한 스티로폼은 트럭 7400대 분량으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절반이 넘는 부피였다"면서 "포장 방식을 줄이면서 포장재 쓰레기는 물론 그만큼의 운송 비용을 줄였다"고 했다.

〈특별취재팀〉

박은호 차장, 채성진 기자, 김정훈 기자, 김효인 기자, 이동휘 기자, 손호영 기자, 권선미 기자, 허상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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