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공장 채운 '키스'.. 캔버스 벗어나 빛으로 부활

파리=정상혁 기자 입력 2018. 5. 22. 03: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파리에 첫 개관 '빛의 아틀리에'
19세기 600평 폐공장 새로 꾸며.. 벽·기둥에 프로젝터로 名畵 투사
9월 제주서 '빛의 벙커'로 선보여

어두운 구강 사이로 한 줄기 햇빛이 닿을 때, 그 광명을 키스라 부르기로 한다. 프랑스 파리에서 지난달 개관한 디지털 아트센터 '빛의 아틀리에(Atelier des Lumières)'는 가장 낮은 조도(照度)에서 일렁이는 가장 환한 환희의 표정을 보여주고 있다. 개관 기념 전시는 '키스'로 대표되는 황금빛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올해 100주기를 맞아 빛으로 현현한 거장을 만나기 위해 이곳을 찾은 지난 12일, 줄은 길었고 입장표를 사는 데만 50분이 걸렸다.

프랑스 기업 컬쳐스페이스가 파리의 폐공장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빛의 아틀리에'에서 관람객들이 미디어아트로 구현된 구스타프 클림트의‘키스’를 보고 있다. 빛과 음악에 젖어 관객들은 앉거나 누워 있고, 애들은 간혹 뛰어다니거나 춤까지 춘다. 이들의 잔영(殘影)도 전시 일부가 된다. /정상혁 기자

빛은 어두울 때 가장 극적이므로, 이 전시관은 1835년 파리 11구에 세워진 600평 규모의 주철공장을 새로 꾸민 것이다. 방치된 폐시설의 미술 재생 프로젝트 일환으로, 2012년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 채석장을 단장한 '빛의 채석장' 이후 두 번째다. 컴컴한 전시실에 들어서면서부터 암순응(暗順應)하는 동공이 최대로 입 벌려 빛을 빨아들이려 한다. 프로젝터로 벽면에 영상을 투사하는 '프로젝션 매핑' 기술을 이용해 편집된 명화를 펼쳐놓는데, 귓불이 가볍게 떨리는 정도의 음악이 흐르고 선율이 조심스레 벽, 원형 기둥, 계단 등 사방에 빛의 유화를 뿌리기 시작한다. 천장을 제외한 모든 공간이 색으로 채워지는 동시에 관람객의 몸통이 같은 색으로 날염된다. 전시장 한편 옛 저수시설에 받아놓은 물이 비현실적으로 빛을 반사한다.

오스트리아 화가 훈데르트바서(1928~2000)의 작품, 각종 기호로 구현된 입체 영상 '포에틱 AI' 등 두 단편이 15분 정도 휘몰아치면, 이제 30분간 온전히 클림트의 시간. 초기 아카데미적 그림부터 분리주의 시기의 '팔라스 아테나' '유디트', 황금 시기 대표작 '베토벤 프리체' '키스', 말년의 풍경화 등이 연대기 순으로 펼쳐진다. 다만 그림은 순서대로 병렬되지 않고 '팔라스 아테나'의 금박 갑옷이 해체돼 흩날리면서 '다나에'의 뽀얀 나체가 서서히 드러나는 식으로, 융기하거나 뒤로 물러나거나 기포처럼 피어오른다.

미술관으로 개조된 파리 주철공장의 1891년 모습. /컬처스페이스

클림트가 평생에 걸쳐 몰두한 여자와 금박(金箔), 그 눈부신 관능의 근육과 뼈 위에 요한 슈트라우스, 베토벤 등의 음악이 덮친다. 관람객은 풀밭이나 해변에서 대개 그렇게 하듯 앉거나 누워 있다. 그런 관람객 밑으로 바닥에서 그림이 움직이면, 모래나 물고기가 은밀히 하반신을 지나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성악곡 '너무나 뜨겁게 입맞춤하는 내 입술'이 흘러나올 때 그림 '오이게니아 프리마베시의 초상' 등 꽃밭이라 불러도 좋을 치마 입은 여자들이 벽면에 병치되는데, 벽에서 흘러넘친 이 치마폭에 관람객의 온몸이 완전히 뒤덮인다.

다만 그림은 편집됐고 색채도 미세하게 달라진 탓에 원작의 온전한 감상은 불가능하며 심지어 방해받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관람객 사무엘 하라르(25)씨는 "빛과 옛 건물의 어둠과 음악이 한데 어울리는 새로운 경향의 실험 같다. 모두가 아는 그림을 새롭게 제시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고 말했다. 빛은 먼 데까지 닿는 법이어서, 9월 제주도에서도 이 빛의 전시를 볼 수 있을 전망. 해저 광케이블 관리를 위해 1990년 세워진 900평 면적의 벙커(KT 제주 해저중계소)를 미술관으로 꾸민 '빛의 벙커'다.

전시는 빛이 지듯 벽면을 가득 채운 금박이 일순 떨어져 내릴 때 끝이 난다. 그 찰나의 빛줄기를 향해, 공연도 아닌데 박수갈채가 터진다. 입장하면 질릴 때까지 반복 감상이 가능하므로, 좋은 자리를 찾으려 두리번거리던 몇 쌍의 연인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전시관 한적한 구석에서 곧잘 발견되곤 했다. 키스를 위해 그들은 그토록 어둠 속을 헤집고 다녔던 것이다. 11월 11일까지. atelier-lumieres.com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