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책방] 장강명의 영리한 위치 선정 ‘당선, 합격, 계급’

입력 2018.05.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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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만든 시사 추적 프로그램을 글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이다. 장강명 작가의 신작【당선, 합격, 계급】의 추적 대상은 한국 문단의 문학상 등단 제도가 지닌 한계다. 살짝 지루한 주제고 솔직히 아주 참신한 얘기도 아니다. 장 작가는 불리한 상황을 두 가지로 돌파해 낸다. 첫 번째는 기자 출신 작가다운 꼼꼼한 취재력, 두 번째는 한국 사회의 가장 논쟁적인 부분 중 하나를 함께 건드린다. 대학 입시나 대기업 공채, 국가고시에 목을 매는 '간판 사회'의 이면을.

「'등단의 기준은 어디까지인가, 어느 대학의 어느 과정을 마치면 명문대생이라 볼 수 있나?'라는 질문을 공론장에서 진지하게 던지고 사회적 합의를 시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사람을 간판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라는 정답이 이미 있다. 그러나 그 정답을 따르는 이는 많지 않다.」 본문 294쪽


'르포르타주'라는 이번 책의 장르는 독자 입장에선 조금 생소하다. 보고기사 혹은 기록문학으로 옮겨 적는 르포트타주는 특정 사건이나 사회 현상을 작가가 취재기 형태로 정리한 글이라 보면 되겠다. 조지 오웰이 영국 노동자의 가난한 삶을 그린【위건 부두로 가는 길】정도가 대표작이다. 참고로 장 작가는 한 일간지 칼럼에 소설가로서 롤 모델이 조지 오웰이라고 답한 적도 있다.

「나는 정말로 할 말이 많았다. 우선 문학공모전의 기원과 선발 메커니즘, 영향력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고 싶었다. 그것은 나의 뿌리와 위치를 찾는 일이기도 했다.」8쪽

매일 스톱워치로 시간을 재며 글을 쓰면서 왕성한 창작량으로 소문난 장 작가이지만, 【당선, 합격, 계급】을 세상에 내기까진 2년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이제는 베스트 셀러가 된 【우리의 소원은 전쟁】출간과 중·단편 창작, 각종 언론 기고를 하면서 장 작가는 틈틈이 취재했다. 독자와의 만남에 온 사람들에게 설문지를 돌렸고, 문예지 편집위원들에게 눈도장을 찍으려는 문단 신인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술자리까지 '취재차' 갔다. 최근 몇 년간 '문학상 4관왕' 타이틀을 얻으며 등단 제도의 가장 큰 수혜자인 그가 도대체 무슨 한이 맺혀서 이렇게까지 열심히 취재했는지 궁금할 정도다.

장강명 작가의 ‘열광금지, 에바로드’가 당선된 2014년 2회 수림문학상의 심사 장면. (출처 : 연합뉴스)장강명 작가의 ‘열광금지, 에바로드’가 당선된 2014년 2회 수림문학상의 심사 장면. (출처 : 연합뉴스)

「전체 응답자의 65.0 퍼센트가 문학공모전을 거치지 않으면 한국에서 작가로 활동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공교롭게도 이 수치는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보느냐'고 물었을 때 나오는 답의 비율과 거의 같다. 한국일보와 한국리서치가 2014년 11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5개 도시의 성인 남녀 1,000명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벌였을 때 64.4 퍼센트가 그 질문에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210쪽

각종 통계와 팩트가 글에 붙으면서 작가의 메시지는 명료하게 다듬어진다. 언론계 은어로 '야마'(기사 주제)를 '몰아가는' 11년 경력 기자 출신 작가의 솜씨가 돋보인다. 잔기술에 속지 않겠다 다짐하고 책장을 넘기지만 무수히 날아오는 '팩트 펀치'에 결국 설득당하게 된다. 한겨레·수림 문학상의 심사위원으로서 본 언론사 편집국의 풍경, 사시 폐지를 주장하는 로스쿨 학생들의 집회 현장 등도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하지만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부담이다. 평범한 독자라면 문학상의 허상보다는 대학 입시나 기업 공채 제도의 문제점에 관심이 더 갈 테다. 문단의 부조리한 구조에 천착해 보편적인 주제를 많이 다루지 못한 건 아쉬운 부분이다.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이야기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간결한 문체라 속도감 있게 읽히지만 출판·문학계 관계자나 작가 지망생이 아니면 공감이 쉽지 않은 이야기들도 적지 않다.

「성의 출입구를 동문에서 서문으로 바꾼다 한들, 또는 문을 통과하는 절차를 복잡하게 추가한다 한들 성벽을 둘러싼 차별은 달라지지 않는다. 간판을 다 없앤다 해도 사람들은 새로운 표식을 찾아낼 것이다. 성이 높이 서 있고 성 밖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들이 그 안에 있는 한, 새로운 간판 후보는 무궁무진하다.」428쪽

장 작가는 "정답은 없다"고 결론을 낸다. 문학상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완벽히 대체 가능한 방안을 찾기는 어렵다는 것. 어쩌면 시시한 결론일 수도 있겠다. 주류 문단의 반론을 피하면서 문학계 비주류들의 지지까지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영리한 위치 선정을 해낸 것 같기도 하다. 장 작가는 문학 시장의 정보 비대칭성을 깰 민주적 '독서 공동체'를 제안하지만, 이상주의적 해결책이라는 지적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론 이런 결론이 마음에 든다. 어떤 문제든 명확한 정답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우리는 어느 순간 알게 된다. 정답을 강요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지칠 뿐이다. 꼼꼼하고 치밀한 논리로 "완벽한 정답을 찾는 건 무의미하다"라는 말을 이 시대 가장 '핫한 작가'로부터 들을 수 있어서 고맙다.

【당선, 합격, 계급】지은이 장강명, 출판사 민음사,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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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의도 책방] 장강명의 영리한 위치 선정 ‘당선, 합격, 계급’
    • 입력 2018-05-21 07:00:05
    여의도책방
잘 만든 시사 추적 프로그램을 글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이다. 장강명 작가의 신작【당선, 합격, 계급】의 추적 대상은 한국 문단의 문학상 등단 제도가 지닌 한계다. 살짝 지루한 주제고 솔직히 아주 참신한 얘기도 아니다. 장 작가는 불리한 상황을 두 가지로 돌파해 낸다. 첫 번째는 기자 출신 작가다운 꼼꼼한 취재력, 두 번째는 한국 사회의 가장 논쟁적인 부분 중 하나를 함께 건드린다. 대학 입시나 대기업 공채, 국가고시에 목을 매는 '간판 사회'의 이면을.

「'등단의 기준은 어디까지인가, 어느 대학의 어느 과정을 마치면 명문대생이라 볼 수 있나?'라는 질문을 공론장에서 진지하게 던지고 사회적 합의를 시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사람을 간판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라는 정답이 이미 있다. 그러나 그 정답을 따르는 이는 많지 않다.」 본문 294쪽


'르포르타주'라는 이번 책의 장르는 독자 입장에선 조금 생소하다. 보고기사 혹은 기록문학으로 옮겨 적는 르포트타주는 특정 사건이나 사회 현상을 작가가 취재기 형태로 정리한 글이라 보면 되겠다. 조지 오웰이 영국 노동자의 가난한 삶을 그린【위건 부두로 가는 길】정도가 대표작이다. 참고로 장 작가는 한 일간지 칼럼에 소설가로서 롤 모델이 조지 오웰이라고 답한 적도 있다.

「나는 정말로 할 말이 많았다. 우선 문학공모전의 기원과 선발 메커니즘, 영향력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고 싶었다. 그것은 나의 뿌리와 위치를 찾는 일이기도 했다.」8쪽

매일 스톱워치로 시간을 재며 글을 쓰면서 왕성한 창작량으로 소문난 장 작가이지만, 【당선, 합격, 계급】을 세상에 내기까진 2년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이제는 베스트 셀러가 된 【우리의 소원은 전쟁】출간과 중·단편 창작, 각종 언론 기고를 하면서 장 작가는 틈틈이 취재했다. 독자와의 만남에 온 사람들에게 설문지를 돌렸고, 문예지 편집위원들에게 눈도장을 찍으려는 문단 신인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술자리까지 '취재차' 갔다. 최근 몇 년간 '문학상 4관왕' 타이틀을 얻으며 등단 제도의 가장 큰 수혜자인 그가 도대체 무슨 한이 맺혀서 이렇게까지 열심히 취재했는지 궁금할 정도다.

장강명 작가의 ‘열광금지, 에바로드’가 당선된 2014년 2회 수림문학상의 심사 장면. (출처 : 연합뉴스)
「전체 응답자의 65.0 퍼센트가 문학공모전을 거치지 않으면 한국에서 작가로 활동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공교롭게도 이 수치는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보느냐'고 물었을 때 나오는 답의 비율과 거의 같다. 한국일보와 한국리서치가 2014년 11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5개 도시의 성인 남녀 1,000명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벌였을 때 64.4 퍼센트가 그 질문에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210쪽

각종 통계와 팩트가 글에 붙으면서 작가의 메시지는 명료하게 다듬어진다. 언론계 은어로 '야마'(기사 주제)를 '몰아가는' 11년 경력 기자 출신 작가의 솜씨가 돋보인다. 잔기술에 속지 않겠다 다짐하고 책장을 넘기지만 무수히 날아오는 '팩트 펀치'에 결국 설득당하게 된다. 한겨레·수림 문학상의 심사위원으로서 본 언론사 편집국의 풍경, 사시 폐지를 주장하는 로스쿨 학생들의 집회 현장 등도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하지만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부담이다. 평범한 독자라면 문학상의 허상보다는 대학 입시나 기업 공채 제도의 문제점에 관심이 더 갈 테다. 문단의 부조리한 구조에 천착해 보편적인 주제를 많이 다루지 못한 건 아쉬운 부분이다.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이야기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간결한 문체라 속도감 있게 읽히지만 출판·문학계 관계자나 작가 지망생이 아니면 공감이 쉽지 않은 이야기들도 적지 않다.

「성의 출입구를 동문에서 서문으로 바꾼다 한들, 또는 문을 통과하는 절차를 복잡하게 추가한다 한들 성벽을 둘러싼 차별은 달라지지 않는다. 간판을 다 없앤다 해도 사람들은 새로운 표식을 찾아낼 것이다. 성이 높이 서 있고 성 밖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들이 그 안에 있는 한, 새로운 간판 후보는 무궁무진하다.」428쪽

장 작가는 "정답은 없다"고 결론을 낸다. 문학상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완벽히 대체 가능한 방안을 찾기는 어렵다는 것. 어쩌면 시시한 결론일 수도 있겠다. 주류 문단의 반론을 피하면서 문학계 비주류들의 지지까지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영리한 위치 선정을 해낸 것 같기도 하다. 장 작가는 문학 시장의 정보 비대칭성을 깰 민주적 '독서 공동체'를 제안하지만, 이상주의적 해결책이라는 지적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론 이런 결론이 마음에 든다. 어떤 문제든 명확한 정답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우리는 어느 순간 알게 된다. 정답을 강요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지칠 뿐이다. 꼼꼼하고 치밀한 논리로 "완벽한 정답을 찾는 건 무의미하다"라는 말을 이 시대 가장 '핫한 작가'로부터 들을 수 있어서 고맙다.

【당선, 합격, 계급】지은이 장강명, 출판사 민음사,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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