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넷 폐쇄 17년, 홍대 검거 7일' 혜화역 메운 분노

2018. 5. 20.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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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탄집회에 예상밖 1만2천명
"공평하게 수사하라" 구호 외쳐
"피해자가 남성일때만 쾌속" 주장

전문가 "몰카 처벌 제대로 안한 탓
'성별 편파수사' 얘기 나오는 것
여성들이 모인 배경에 주목해야"

[한겨레] 붉은 머리띠, 붉은 옷, 붉은 손팻말…. 여성들의 분노가 붉은색으로 터져 나온 토요일이었다.

지난 19일 오후 3시30분, 서울 혜화역 2번 출구엔 온통 붉은색 차림의 여성 1만2000여명이 모였다.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집회’ 참가자들은 이날 “남 피해자 쾌속 수사, 여 피해자 수사 거부”, “공평하게 수사하라”, “동일범죄 동일처벌”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날 집회는 ‘미투 운동’이 불붙은 뒤 이어진 수많은 집회·시위 가운데 가장 많은 인원이 참석했다는 점 외에도 그 상징성과 집회 형식 등 여러 면에서 주목받고 있다. 여성인권 문제를 오래 고민해왔던 이들은 ‘홍익대 누드 몰카’라는 개별 형사사건을 통해 표출된 여성들의 집단 정서와 배경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짚었다.

이번 집회는 인터넷 포털 다음의 한 카페(‘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가 주최했다. 이 카페는 ‘홍대 누드 몰카’의 피의자인 여성 모델 안아무개(25)씨가 구속되기 이틀 전인 지난 10일 만들어졌다. 카페 개설 약 열흘 만인 20일 현재 회원수가 2만7000명에 이른다. 이들은 이 사건의 피해자가 남성이어서 속전속결로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 1일 인터넷 커뮤니티 ‘워마드’에 남성 누드모델의 나체 사진이 유포돼 논란이 된 뒤 12일 만에 동료 여성 모델이 구속된 점을 들며, 이례적으로 빠른 보도와 수사의 원인으로 ‘피해자의 남성성’을 꼽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서 ‘소라넷 폐쇄 17년, 홍대 검거 7일’, ‘너네 해외사이트 수사할 줄 아네’ 등의 포스터를 만들어 홍보했고, 익명 대화를 나누는 오픈 카톡방으로 집회 후원금을 모금했다. 피자·치킨·김밥 등 집회 참가자에 대한 먹거리 후원 인증샷도 이어졌다. 익명으로 모인 이들이 불과 일주일여 만에 1만명이 넘는 대규모 집회를 만들어낸 것이다. 불법촬영 피해자 등을 지원하는 시민단체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한사성)는 “이번 집회는 어떤 여성단체·시민단체와도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어떤 조직적 배경도 없었지만 이들은 분노의 크기만큼이나 재빠르고 기민하게 움직였다. 부산·동대구·대전·광주 등 지역에선 버스까지 대절해 집회 현장인 혜화역으로 집결했다. 주최 쪽은 애초 참가 인원을 2000명으로 예상하고 경찰에 집회 신고를 했으나, 참가 인원은 집회 시작 전부터 2000명을 넘어섰다. 집회 장소도 인도로 제한됐다가, 이날 오후 4시께 이화사거리에서 혜화동 로터리 방면 4차선이 모두 통제됐다. 참가자는 예상 인원의 여섯배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몰카’를 둘러싸고 공유된 공포 정서와 반감이 이들을 혜화역 앞으로 불러모았다고 짚었다. 이진희 서울대 여성연구소 객원연구원은 “다른 성폭력은 피해자가 피해를 본 즉시 인지한다. 하지만 몰카는 찍히는 당시엔 전혀 알 수 없어 더 큰 공포로 작용한다”며 “몰카 영상이 유출됐을 때 여성들이 받는 타격 역시 다른 성범죄에 비해 크다”고 말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미투 운동 이후 변화에 대한 요구가 이어져왔고, 몰카 문제는 하나의 기점이 됐다”며 “여성이 인간적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사는 현실에 대한 분노가 ‘몰카’라는 사회 현상을 만나 폭발적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성별에 따른 편파수사’라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런 집단 정서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주목해야 한다는 견해가 나왔다.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는 “이번 집회는 생물학적 여성들만 집회 참여를 허용하는 등 폐쇄성이 있었지만, 이는 그간 남성 중심의 권력구조에서 배제돼온 여성들의 분노가 표출된 것으로 봐야 한다”며 “이들 주장의 옮고 그름을 떠나 여성들이 모인 배경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번 집회는 기존 운동단체가 아닌 불특정 다수의 ‘분노’가 발화했다는 점, ‘촛불’ 이후 자신을 억눌렀던 현실에 대해 직접 목소리를 내는 직접민주주의의 형태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 누구도 해결해주지 않는 문제에 대해 여성들이 직접 ‘익명의 조직화’에 나선 셈이다.

2000년대 이후 이미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던 ‘몰카’ 문제를 방치해온 사회에 대한 지적도 이어졌다. 이진희 객원연구원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몰카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다”며 “한국 사회 몰카 범죄가 제대로 처벌됐다면 여성들이 ‘성별 편파수사’를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한사성은 성명을 내고 “(홍익대 몰카 사건에서) 사건 발생 수일 만에 유포자를 검거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처를 하는 세심함 또한 인상 깊었다”며 “어째서 이제야 이례적인 일처리와 피해자 보호가 이루어졌는지는 반드시 질문을 던져야 할 지점”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간 여성들의 피해 지적에 답하지 않았던 수사기관·사법부·언론 등 권력기관에 대한 불만이 이번 수사를 계기로 터져 나온 것이라는 지적이다.

집회 참가자들도 이런 진단을 뒷받침했다. 전날 혜화역 시위에 참여한 한 고등학생은 “여자고등학교에 남성들이 무단으로 들어와 서성이는 장면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그런 때면 혹시 몰카라도 설치했을까봐 학교 화장실에도 제대로 못 가는 것이 현실”이라며 “많은 사람이 비슷하게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19일 저녁 신촌역 인근에서 열린 ‘달빛걷기’에 참가한 한 여성도 “그간 몰카 피해를 본 여성들이 직접 증거를 수집해 경찰에 가져가도 ‘가해자를 찾기 어렵다’는 말을 들어왔다. 하지만 이번 홍대 사건을 보면서 ‘아 노력하면 잡을 수 있는 거였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경찰청 통계를 보면, 몰카 등 불법촬영 범죄는 2010년 1134건에서 2015년 7623건으로 7배나 늘었다. 불법촬영 범죄를 당한 피해자 2만6654명 가운데 여성은 84%, 남성은 2.3%, 나머지 13.7%는 각도 등의 문제로 성별이 판명되지 않는 경우였다. 여성 피해자가 대부분인 셈이다.

장수경 박현정 정환봉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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