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인권 선진국’ 독일도 착취…절망일까 위안일까

김유진 기자

버려진 노동

귄터 발라프 지음·이승희 옮김 |나눔의집 | 396쪽 | 1만5000원

[책과 삶]‘인권 선진국’ 독일도 착취…절망일까 위안일까

그는 대형 택배회사 창고에서 물건을 나르는 배송기사다. 택배회사가 배송을 위탁한 하청기업에서 다시 한 지역을 위탁받아 트럭을 운전한다. 늘 법정 노동시간을 훨씬 초과해서 일하지만, 자영업자 신분이어서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다. 하청기업으로부터 받는 임금 계산서에는 트럭 리스, 연료비가 공제된다. 목표 배송률에 미치지 못하면 벌금이 부과되기도 한다. 쉬지 않고 일해도 손에 쥐는 돈은 근근이 생계를 유지할 수준이다. 그가 아프면 노모가 대신 트럭을 몰아야 한다.

서울이나 부산 어딘가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사연이 아니다. 독일에 사는 45세의 로타르 엘테스의 이야기다. 엘테스는 독일 우체국 디에이치엘(DHL)의 ‘서비스 파트너’인 페니히로부터 재하청을 받아 3년여 성실하게 일했다. 어느 날 그는 규정에 따라 물건을 부재 중인 주인에게 전달하지 않았다가, 고객 항의를 받은 DHL에 의해 창고 출입을 금지당한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것이다.

엘테스와 같은 재하청 노동자들은 DHL 경영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됐다. <버려진 노동>은 세계 최대 물류회사인 DHL이 연간 8%에 가까운 수익률을 낼 수 있는 비결은 겹겹의 하청, 재하청 구조로 이윤을 극대화하기 때문이라고 꼬집는다. 상생과 공정. 대외적으로 독일 경제와 사회를 수식하는 이미지다. 하지만 독일 노동자 약 30만명이 몸담은 택배업계에서는 불공정한 하도급, 임금 덤핑이 관행처럼 굳어졌다.

독일 전체 노동자의 4분의 1에 달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이 처한 삶은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2002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부가 추진한 ‘하르츠 노동개혁’으로 고용률은 올라갔지만 노동자 실질임금은 떨어졌다.

귄터 발라프가 대표 저술한 이 책은 택배업을 비롯해 자동차, 정보기술(IT), 축산, 사회서비스 등 각종 분야의 열악한 노동 현실을 생생하게 고발한다. 발라프가 설립한 노동인권단체 ‘워크워치’ 활동가들과 귄터 발라프 재단의 젊은 장학생들이 불안정 노동 현장을 잠입취재했다.

독일 ‘잠입취재 전문 기자’ 귄터 발라프가 쓴 <버려진 노동>은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의 비약적 성장이 독일 저임금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에 기대고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 콜로라도 오로라의 아마존 주문처리센터에서 지난 3일 한 노동자가 카트를 끌고 이동하는 장면(오른쪽)과 4월24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아마존 반대 시위에 등장한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의 얼굴이 그려진 마스크 사진을 그래픽으로 만들었다. 오로라·베를린 | AFP연합뉴스

독일 ‘잠입취재 전문 기자’ 귄터 발라프가 쓴 <버려진 노동>은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의 비약적 성장이 독일 저임금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에 기대고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 콜로라도 오로라의 아마존 주문처리센터에서 지난 3일 한 노동자가 카트를 끌고 이동하는 장면(오른쪽)과 4월24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아마존 반대 시위에 등장한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의 얼굴이 그려진 마스크 사진을 그래픽으로 만들었다. 오로라·베를린 | AFP연합뉴스

1985년작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보잘것없이>(알마, 2012년)에서 터키 이민자 ‘알리’로 위장해 외국인 용역노동자의 삶을 체험했던 발라프는 이번에도 몸소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최근 몇 년간, 일을 하기 때문에 삶이 더 형편없어지는 ‘워킹푸어’의 현장, 저임금 일터에서 일했다. 나는 콜센터 상담원, 리들 슈퍼마켓의 빵집 조수, 택배기사로 일하면서 이곳 동료들이 얼마나 멸시를 당하고 무자비하게 착취당하는지를 경험했다. 동시에 외부자들은 거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멸시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내던지지 않고 계속 견뎌내는 사람들의 편에서 일하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은 기간제 고용을 기본 원칙으로 한다. 아마존 직원의 절반가량이 기간제 형태로 일한다. 크리스마스 성수기에는 기간제 계절노동자를 추가로 고용한다. 기간제법의 허점을 이용하는 ‘쪼개기’ 계약이 횡행하며, 계약 연장은 사측이 임의로 결정한다. 아마존 물류배송센터에서 주문한 물건을 처리하는 ‘피커’로 일하는 마틴은 “그들이 주사위를 던진다고 생각해요”라고 전한다. 마틴을 비롯한 아마존의 노동자들은 “안전, 품질관리, 고객서비스라는 명목으로” 수시로 감시받는다. 관리자는 물론 동료들끼리도 감시의 끈을 놓지 않는다.

비슷한 일은 온라인 쇼핑몰 잘란도에서도 벌어진다. 프리랜서 기자인 카로 로빅은 독일 에르푸르트 산업단지에 위치한 잘란도의 창고에 위장취업해 반품부와 픽타워에서 일한다. 그는 “모든 것이 숫자로 표현된다”며 “우리는 각자의 휴대용 스캐너를 통해 마치 로봇처럼 원격조종된다”고 말한다. 물건 위치를 파악하는 스캐너가 직원들의 업무능력을 측정하는 수단으로 쓰이는 것은 불법이지만, 잘란도에서는 직원들이 언제, 몇 개의 물건을, 얼마나 걸려서 처리했는지에 관한 정보가 시시각각 수치화된다. 고용계약상 규정된 휴게시간, 일을 마치고 쉬는 시간마저도 철저하게 통제된다. 병가를 내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발라프는 아마존이나 잘란도 같은 인터넷 상거래 업체들이 노동자들의 ‘존엄성’을 해친다고 비판한다. 겉으로는 노조나 종업원평의회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협상권도 인정하지 않는다. 정부도 많은 수의 비숙련 노동자, 장기 실업자들을 흡수하는 이들 기업을 유치하려고 할 뿐, 노동 여건을 감독하는 일에는 소홀하다. 책은 이들 기업의 가치를 담은 구호, 이를테면 “우리는 한 팀이다” 등을 반복해서 외치게 하는 모습이 ‘사이비 종교집단’을 떠올리게 한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독일을 대표하는 고급 자동차 브랜드 메르세데스 벤츠를 생산하는 다임러에는 ‘현대판 노예’가 있다. 전일제 근무를 해도 수입이 너무 적어서 정부의 보조금 수령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세금으로 임금 덤핑 정책을 펼치는 귀족기업을 지원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청 도급계약 직원들이 하는 일은 정규직과 거의 구분되지 않지만, 대우는 천차만별이다. 정규직 노조는 눈을 감는다.

그 밖에도 요양보호사, 1인 자영업 수리공, IT 노동자, 프리랜서 작가나 음악가, 이주노동자들은 일을 해도 빈곤을 벗어날 수 없는 상태다. 성공한 문학번역가의 경우도 세후 수입이 가까스로 빈곤선 안에 있을 정도다. “일을 하기 전에는 빵 없는 시간을 보내야 하고, 번역일을 시작하게 되면 부족한 빵의 시대가 온다”는 말은 결코 과한 레토릭이 아니다.

저자들의 취재물이 독일 방송이나 일간지 등을 통해 먼저 보도되면서 일부 회사들이 개선 조치를 내놓았다. 하지만 진전은 더디다. 문제는 정치다. 발라프는 정치가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신자유주의적 신조에 따라 가짜 자립을 부추겼으며, 이미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람을 파렴치하게 이용해 먹었다”고 말한다. 정치가 경제의 요구에 무비판적으로 화답하면서 불안정 일자리는 급증했고, 공적 연금제도를 비롯한 사회 안전망은 취약해졌다.

인권 선진국 독일에서도 노동자들이 시름한다는 것은 절망일까, 위안일까. 분명한 점은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목소리를 내며 변화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책에는 도급제를 철폐한 마이어 조선소, 대기업을 상대로 승소한 운송자영 하청기업 연합, 외주화에서 모기업으로의 귀환을 이끌어낸 배송회사 디지51의 경험 같은 희망 사례도 담았다.


Today`s HOT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황폐해진 칸 유니스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경찰과 충돌하는 볼리비아 교사 시위대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개전 200일, 침묵시위 지진에 기울어진 대만 호텔 가자지구 억류 인질 석방하라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