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사진에 새긴 '통일의 꿈'
민통선 안 풍경은 1960~70년대… '시간이 멈춘 섬'


대룡시장의 한 골목인 조롱박길 전경. /사진=박정웅 기자
대룡시장의 한 골목인 조롱박길 전경. /사진=박정웅 기자
지난달 기지개 켠 판문점발 ‘봄’은 5월로 이어진다. 남북정상회담이 가져온 해빙 무드는 금단의 땅이 가장 빨리 알아챘다. 확성기가 사라진 비무장지대(DMZ)엔 평화관광 꽃이 폈다. 수도권과 가까운 DMZ에 인파가 꼬리를 문다는 소식이다. 
황해도 연안군과 직선거리 2.6㎞. 봄소식은 강남서 돌아온 제비가 많다는 ‘평화와 통일의 섬’에도 왔다. 인천 강화군 교동도는 섬 전체가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에 있다. 평화와 통일의 섬이란 말은 한국전쟁 이후 단 한번의 교전이 없었던 데서 유래한다.


지난 7일 해병의 검문을 거쳐 출입증을 받은 뒤 교동대교를 건넜다. 교동제비집 2층에 오르자 서북쪽으로 교동평야가 펼쳐졌다. 너른 들판을 병풍처럼 에워싼 해안철책 너머 북쪽 연안평야가 어렴풋하다.

◆교동평야와 망향대

율두산 망향대에서 망원경으로 북측을 살피는 탐방객들. /사진=박정웅 기자
율두산 망향대에서 망원경으로 북측을 살피는 탐방객들. /사진=박정웅 기자
교동도는 전쟁의 화마를 잠시 피하려던 황해도 실향민의 거처다. 한국전쟁 중 3만여명이 바다와 같은 한강하류를 건너왔다. 이 중 대부분이 연안(옛 연백군) 출신이다. 전쟁이 멎으면 곧 돌아갈 심산에 왕래가 잦고 가까운 교동에 둥지를 틀었다. 귀향의 꿈은 어느덧 환갑을 훌쩍 건너 뛴 세월에 바스러질 듯 삭아버렸다.
“건너편이 빤히 보이는데도 발만 굴렀던 세월이 야속할 뿐이지. 자고 나면 늘 바라보는 데가 그곳인데 말이야.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아버진 늘 연백을 입에 올리셨네. 이젠 나라도 연백 땅을 밟아봤으면 여한이 없겠어.”


교동평야 들길에서 만난 한 촌로는 선친처럼 북쪽 바라기가 습관이라 했다. 선친의 손에 이끌려 내려온 소년은 팔순의 할아버지가 됐다. 선친처럼 교동평야를 연백평야 삼아 일궈온 세월이 오래다. 다만 자신의 자식들이 섬을 떠났을 뿐, 촌로의 삶은 선친의 그것과 흡사하다.   

교동도 초행길, 그의 손끝이 가리킨 곳은 밤머리산(율두산) 망향대다. 망향대에 서면 북녘이 지척이다. 망원경 속 연백평야는 이쪽 교동평야처럼 논갈이가 한창이다. 연백의 실향민들은 고향이 눈앞에 잡힐 듯 가까운 지석리 마을 뒷동산에 1960년 망향비를 세웠다. 매년 이곳에서 고향에 돌아갈 마음을 담아 제사를 올린다.

◆시간이 멈춘 대룡시장

1960~70년대 정취가 물씬한 대룡시장. /사진=박정웅 기자
1960~70년대 정취가 물씬한 대룡시장. /사진=박정웅 기자
‘평화의 섬’ 교동도의 또 다른 이름은 ‘시간이 멈춘 섬’이다. 피란민 집단 거주지인 데다 접경지역의 섬이라는 특수성이 겹쳐 1960~70년대 분위기가 고스란히 남아서다. 이렇다 할 개발 여지가 없었던 외딴 섬, 흑백사진마냥 남은 추억거리는 새로운 관광콘텐츠가 됐다.
특히 2014년 강화도를 잇는 교동대교 개통으로 전기를 맞았다. 낡은 도선 시간에 맞춰 자동차를 싣고 내리는 번거로움이 옛일이 되면서 외지인의 발길이 잦아졌다. 또 중장년층에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기억의 조각을 전국으로 전파한 방송 프로그램도 유명세에 한몫했다. 

추억의 놀이인 '말뚝박기' 조형물과 벽화를 번갈아 구경하는 어린 탐방객. /사진=박정웅 기자
추억의 놀이인 '말뚝박기' 조형물과 벽화를 번갈아 구경하는 어린 탐방객. /사진=박정웅 기자
비좁은 골목, 낮고 녹슨 양철 지붕, 오래된 약방과 이발소, 빛바랜 표어와 포스터. 대룡시장은 교동여행 ‘1번지’로 꼽힌다. 시장 곳곳엔 빛바랜 분위기가 물씬하다. 실향민들이 곧 돌아갈 연백시장 모습에서 한발짝도 더 나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동도에 터잡은 이들은 무덤덤한데 시장 골목마다 외지인들의 카메라 셔터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시간이 멈춘 듯한 대룡시장의 멋과 맛은 소탈하면서 정겹다. 그래서인지 어깨를 스치는 여행객도 가족이나 연인, 친구 등 다양하다.

교동면 관광안내소 역할을 하는 마을기업 교동제비집 전경. /사진=박정웅 기자
교동면 관광안내소 역할을 하는 마을기업 교동제비집 전경. /사진=박정웅 기자
대룡시장 아래는 교동제비집이다. 이곳은 대룡시장 활성화와 교동관광 발전을 위한 IT기반 관광안내소(마을기업)다. 교동의 역사와 지역명소를 VR영상체험으로 미리 만날 수 있다. 또 자신의 얼굴을 넣은 교동신문을 편집할 수 있어 좋다. 느릿하게 교동여행을 완성하는 걷기여행이나 자전거여행(자전거대여) 정보까지 얻을 수 있다.
이외에 화개산을 중심으로 연산군유배지, 화개사, 교동향교, 교동읍성, 남산포, 월산포 등도 둘러볼 만하다. 교동여행은 신분증이 꼭 필요하다. 교동대교가 외부와 연결된 유일한 통로임을 잊지 말자.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주말을 피하는 것이 좋다. 망향대나 서북쪽 해안철책길은 농로를 이용하기 때문에 농기계 통행에 유의하자. 

네잎클로버에 핀 ‘두바퀴 평화’

교동면 지석리 해안철책길을 끼고 달리는 박담군과 서윤양. /사진=박정웅 기자
교동면 지석리 해안철책길을 끼고 달리는 박담군과 서윤양. /사진=박정웅 기자
‘평화의 섬’ 교동도엔 평화자전거길이 있다. 섬을 한바퀴 도는 회주길(30㎞, 노면 청색 실선)과 마중길(17㎞, 흰색 실선)이 그것이다. 두 자전거길은 섬 대부분을 차지하는 교동평야의 농로를 주로 연결한다.
두 코스는 모두 평탄하다. 마중길은 평야지대만을 잇기 때문에 특히 어린 자녀와 함께해도 좋다. 해안철책길과 해안호수길, 비포장체험길(일부)로 이뤄진 회주길은 중간중간 마중길을 만난다.

섬의 북쪽 해안철책길, 네잎클로버를 찾는 남매를 만났다. 서울에서 자전거여행을 왔다는 박담군(상신중 2학년)과 서윤양(서울서신초 4학년)이다.

“논에서 개구리 사진을 찍었어요. 큰 개구리는 처음 봤는데 황소개구리인 줄 알았죠. 근데 아빠가 참개구리라고 알려줬어요. 요즘 보기 드문 토종개구리라면서요.”

사진 속 개구리와 짝을 맞춰주겠다며 토끼풀섶을 헤집는 박양의 눈과 손짓은 바쁘다. 그의 뒤로 철책에 기댄 자전거는 한참을 휴식 중이다.

“철책 틈으로 손가락을 슬쩍 넣어봤는데 짜릿했어요. 북한을 만져봤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조금 전에 망원경으로 북한 사람도 봤어요. 한 사람은 바닷가에서 조개를 잡고 있고 자리 같은 걸 깐 다른 사람은 도시락을 먹는 것 같았죠. 노는 모습은 우리랑 똑같았어요.”

네잎클로버의 희망은 박군의 얼굴에서도 조심스럽게 묻어났다. 분단의 한반도 남자에게 빠질 수 없는 군대 얘기다.

“통일이 되면 군대와 복무기간은 줄겠죠. 군축 비용은 남한과 북한, 그리고 개인한테도 어마하게 클 거라는 소식을 들었어요. 물론 통일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는 않겠죠. 몇년 안 남은 저는 군대 가야겠지만 제 아이 땐….”

박군의 자전거여행은 벌써 북녘에 닿아있다. 금강산과 평양행 자전거여행이 그것이다. 

“금강산 가는 길이 열린다면 자전거로 꼭 가보고 싶어요. 거리가 멀지 않아서 힘도 들지 않고요. 또 서울에서 평양까지, 아니면 개성까지라도 달려볼 겁니다. 국토종주가 고등학교 졸업 전 목표인데요, 그전에 북쪽으로 기회가 열렸으면 좋겠어요.”


☞ 본 기사는 <머니S> 제540호(2018년 5월16~22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