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이창동 감독이 청춘에게 던진 질문..거대한 맥거핀

[리뷰] 버닝

전형화 기자 / 입력 : 2018.05.17 06:00 / 조회 : 2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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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버닝'은 단순하다. 이 단순함은 맥거핀이다. 단순한 이야기에 겹겹의 층을 쌓았다. 직접적이고 다층적이다. 거장이 돌아왔다.

택배 알바를 하는 종수. 대학도 나오고 군대도 다녀 왔지만 현실은 고되다. 그는 글을 쓰려 한다. 아직 뭘 써야 할지 모른다. 우연히 거리에서 어릴 적 같은 동네에서 살던 해미를 만난다. 행사 나레이터 모델을 하는 해미는 모은 돈으로 아프리카 여행을 떠나려 한다. 키우는 고양이를 그동안 대신 맡아달라고 한다. 그렇게 인연을 잇는다.

종수는 파주 집으로 돌아온다. 부모 없는 시골집에 덩그러니 눕는다. 집전화가 온다. 말은 없다. 고양이밥을 주려 해미 방을 찾지만 도통 고양이는 볼 수 없다.

해미가 왔다. 종수는 반가움에 한달음에 공항으로 달려간다.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만났다는 벤이란 남자와 함께다. 벤은 "노는 게 일"이라고 한다. 종수는 털털 거리는 아버지 트럭을 갖고 갔지만, 벤의 차는 포르쉐다. 해미는 벤의 차로 돌아간다.


홀로 자는 집. 종수에게 집전화가 온다. 말은 없다. 밖에는 북한의 대남방송이 들리고, 안의 TV에선 트럼프가 나온다. 최악의 청년실업 뉴스가 무심히 흐른다. 해미에게 전화가 온다. 한달음에 달려가지만 벤이 있다. 종수는 벤의 집에 초대된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살 수 있지?" 종수가 해미에게 묻는다. 거칠게 돌아온 집. 종수에게 집전화가 온다. 말이 없다.

해미에게 전화가 온다. 벤과 같이 종수의 집으로 오고 있다고 한다. 쇠꼴 주던 종수는 급하게 맞을 채비를 한다. 해미는 종수가 어릴 적 자신을 우물에서 구해줬다고 말한다. 종수는 벤이 갖고 온 와인을 해미와 나눠 마신다. 노을을 같이 본다. 대마를 같이 핀다. 해미가 옷을 벗는다. 춤을 춘다. 운다.

벤은 종수에게 즐기라고 한다. 너무 심각하다고. 가슴에서 베이스를 느끼라고 한다. 자신은 두 달에 한 번씩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한다. 이제 때가 됐다고 한다.

종수는 잠을 잔다. 꿈에서 비닐하우스를 태운다. 전화가 온다. 말이 없다. 해미가 사라졌다.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가 원작이다. 설정을 가져오되 2018년 한국 청춘으로 옮겼다. 하루키와 이창동이 만났다. 차가운 도시와 퇴락한 시골이 만났다. 그러니깐 '버닝'은 차가운 도시에 기생하며 퇴락한 곳에 살고 있는 2018년 한국 청춘의 이야기다.

이창동 감독이 보는 2018년 한국 청춘은 아프다. 종수는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하고 싶은 일은 못 찾는다. 해미는 빚에 허덕이면서도 즐기고 싶은 건 한다.

계급 차이는 분명하다. 벤이 사는 반포 빌라와 종수가 사는 파주 시골집. 노는 게 일이라는 벤과 일을 못 찾는 종수. 벤의 친구들 앞에서 구경거리가 되는 해미. 용산참사 사진전에서 식사를 하는 벤의 가족. 편의점 빵으로 끼니를 떼우는 종수.

이 선명한 계급 사이의 어스름에서 해미가 춤을 춘다. 나비가 되고 싶어 하지만 꿈에서 깨면 눈물이 터져 나온다.

'버닝'은 질문을 던진다. 왜 해미가 사라졌을까, 왜 비닐하우스를 태울까, 비닐하우스는 뭐지, 우물은 진짜 있었을까, 왜 울리는 집전화는 말이 없지, 뭘 써야하지, 왜 써야 하지, 이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미스터리 구조는 맥거핀이다.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중요한 건 질문이다. 왜를 찾는 과정이다.

비닐하우스는 벤에겐 쓰다 버린 여자일 수 있고, 해미에겐 온실이었다가 이제는 황폐해진 자신일 수 있고, 종수에겐 불태워야 할 부모일 수 있다. 다 아닐 수도 있다. 우물은 진짜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믿는 것이다. 구원은 언제나 믿음에서 비롯된다. 해미의 말대로 없다는 걸 잊으면 된다.

말없이 울리는 집전화는, 전화를 건 상대는 누구여도 좋다. 연결이 되는 게 중요하다. 연결이 되자 그 상대가 누구였든, 종수를 둘러싼 세계가 바뀐다. 중요한 건 연결이다.

'버닝'은 자칫 여성, 특히 젊은 여성을 비하한다고 오독될 수 있다. 빚에 허덕이면서 하고 싶은 건 하고, 쉽게 돈을 벌려 하며, 돈 많은 남자를 찾는. 언제나 대체될 수 있는.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는 대사는 중의적이다. 성녀와 창녀의 구분짓기. 이창동 감독은 해미의 춤으로, 종수에게 세계의 실마리를 준다. 해미를 향한 믿음이 종수에 구원이다. 여성을 도구로만 썼다면 그렇다. "진실을 말해봐"라는 해미의 질문에 종수는 마지막에 답한다. 그렇게 해미는 '버닝'에서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으로 주체성을 얻는다. 그렇게 구분짓기와 도구에서 벗어난다.

촬영은 매우 좋다. 홍경표 촬영감독은 어스름을 쪼개고 나누고 붙였다. 카메라를 종수에 깊게 들어가는 순간에도 거리를 둔다. 넓은 화면에 덩그러니 외롭게 둔다. 불안을 못 박는다. 흔들리는 영혼을 못 박는다. 달리는 순간마저, 그 자리에 못 박는다. 단연 최고다. 음악은 이창동 영화와 낯설다. 모그는 재즈로, 타악으로, 귀를 찢는 낯섦으로, 들어가고 나갈 때 정확하게 '버닝'에 뉘앙스를 심는다.

종수를 맡은 유아인은, 흔들리고 불안한 영혼 자체다. 이 배우가 갖고 있는 불안한 청춘의 이미지가 현실과 영화가 뒤섞여 표류한다. 이 표류가 '버닝'의 종수다. '버닝'에서 종수는 군대를 다녀왔고, 밥을 먹기 위해 애호박을 썬다. 이 섞임이 불안함을 더한다. 불을 붙이면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 같다. 벌벌 떤다. 절반에선 죽어있고, 절반에선 살아난다. 종수는 유아인의 것이다. 그는 영화 속에서 어느 순간 없다는 걸 잊었다.

벤을 맡은 스티븐 연은 좋다. 전형적인 이미지로 전형성을 벗었다. '버닝'의 미스터리가 미스터리로 남을 수 있는 건, 스티븐 연의 연기 덕이 컸다. 그가 그린 벤이 모호한 덕이다. 해미를 맡은 전종서는 표상이다. 이창동 감독이 생각하는 해미로서 기능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버닝'은 결말은 명확하다. 한편으론 맥거핀이다. 이 결말은 실제일 수 있고, 종수가 쓰는 소설일 수 있다. 그가 찾은 답은, 대체일 수 있고, 지움일 수 있다. '버닝'은 거대한 맥거핀이다. 질문을 던지고, 답은 관객이 찾아야 한다.

5월 17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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