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카드'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정용인 기자 2018. 5. 12.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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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5월 10일 새벽, 북한에 억류되었던 한국계 미국인 김학송, 김동철, 김상덕씨가 도착한 앤드루 공군기지에 환송 나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발언하고 있다. / 연합 UPI

“<뉴욕타임스>는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탈영(AWOL)했다고 비판했다. 실은 그는 북한에 가 있었는데! 이런 나쁜 가짜뉴스 같으니라고.”

5월 10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북한을 방문한 폼페이오는 억류된 3명의 한국계 미국인을 데리고 이날 새벽 3시(현지시간·이하 동일) 미국 위싱턴DC 인근의 앤드루 공군기지로 돌아왔다.

폼페이오의 방북 사실은 5월 8일 오후 2시 이란 핵합의 탈퇴 기자회견 와중에 전격 발표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개인 트위터에 올린 글은 중요한 결정이 이뤄지는 때 자리를 비운 국무장관을 비판한 <뉴욕타임스> 기사를 조롱하는 글이다.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자신들이 개발한 핵 역시 비핵화 대상에 포함하는 ‘완전한 비핵화’를 담은 판문점 선언에 합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직후 트위터에 올린 글을 통해서 “한국전쟁은 끝날 것”이라며 “미국과 모든 위대한 사람들은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김정은이 미국에 온다면 만나겠다. 회의 탁자에서 햄버거를 먹으면서 더 나은 핵협상을 할 것이다.”

지난 2016년 6월 공화당 대선후보 유세 때 트럼프가 한 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에 대해 호감을 드러낸 것은 이때만이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례>라는 제목의 책에 실린 논문들 중 ‘트럼프는 왜 잔인한 독재자들을 칭찬하는가’라는 소제목으로 실린 글에 따르면 트럼프는 대선 유세 때 이런 말도 했다.

“그(김정은)의 공은 인정해줘야 한다. (…) 자기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가 들어가 그 거친 장군들을 장악하고 우두머리가 됐다. 대단한 일이다. 고모부를 제거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제거했다. 대단하다.”

논문을 쓴 마이클 탠지 박사에 따르면 그는 “푸틴은 자기 나라를 강력하게 통제하는 강력한 지도자”, “사담 후세인은 나쁜 놈이기는 했지만 테러리스트들을 죽인 것은 끝내주게 잘한 일” 등의 발언도 했다. 탠지 박사는 트럼프는 ‘승리자’로서 자신이 우상으로 추종하는 독재자들처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고,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하고 싶기 때문에” 그들을 칭찬한다고 주장했다.

■ 김정은에 ‘호감’ 드러냈던 트럼프

올해 초 ‘트럼프 백악관의 내부’라는 부제가 달린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라는 책이 미국에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책은 한국에서도 지난 3월 번역 출간되었다. 저널리스트 마이클 울프가 쓴 이 책은 미국 대선 경선부터 백악관 입성, 그 후 주요 정책 결정과정에서 트럼프의 일거수일투족을 지근거리에서 관찰한 ‘놀라운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책의 ‘증언’에 따르면 트럼프 본인이나 트럼프 캠프 최측근들은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될 줄 진짜로 몰랐다.

책에 따르면 개표가 끝나기도 전에 트럼프는 ‘이번 대선은 힐러리 측이 벌인 희대의 부정선거에 도둑 맞은 선거’라는 성명 발표를 준비하고 있었다. 선대본부장을 맡았던 캘리엔 콘웨이는 선거캠프 경력을 바탕으로 ‘TV캐이블 채널의 공화당 대변 패널’ 일자리를 알아보는 중이었다.

앞서 인용한 트윗 글에서 보이듯, 트럼프 대통령은 가짜뉴스를 흔히 이해하는 것처럼 SNS를 떠도는 출처불명의 인터넷뉴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CNN이나 <뉴욕타임스> 등 기성언론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책에 따르면 대선 결과에 그들도 경악하고 있었다.

‘멘붕’에서 가장 먼저 빠져나온 것은 트럼프 자신이었다. 그는 “내 당선은 사필귀정”이라며 빠르게 전환했다. 하지만 대선 출마 전 실질적인 정치경험은 전무했다. 캠프도 마찬가지였다. ‘워싱턴 정치’와 관련해 그에게 조언해줄 정치인은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과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주 지사 정도가 전부였다. 그는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 최초의 부동산업자 출신 대통령이었다.

5월 9일 백악관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한 트럼프 대통령이 발언하고 있다. / 연합 AP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트럼프가 어떤 생각인지 알려면 그의 개인적인 정치스타일과 그가 처한 국내 환경을 알아야 한다.”

조성대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의 말이다. 조 교수에 따르면 트럼프는 전형적인 아웃사이더다. 미국 정치의 주류에서 비켜나 있었던 인물이다. 지난 2016년 대선구도를 두고 이야기하자면 차라리 힐러리 클린턴이 주류에 더 가까웠다. 힐러리의 대북정책은 오바마의 이른바 ‘전략적 인내’를 계승해 ‘MD-한·미·일 동맹’ 유지라는 종전정책의 고수에 가까웠다.

조 교수는 “일반적인 경우 정치적 성공은 정당 중심의 캠페인이나 규율로부터 확보되는 것인데, 트럼프는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층을 벗어나 특유의 돈키호테적인 개인기를 바탕으로 돌파해내는 데 성공했다”며 “국내적 환경으로 보면 당에 구속되지 않은 독자적인 행보를 할 수 있지만, 동시에 당(공화당)을 무시할 수 없는 환경에 쳐해 있다”고 말했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내건 핵심 구호는 MAGA,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였다. 미국이 위대했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사실 MAGA는 일정한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었다. 한국 인터넷에도 자막이 붙어 바이럴되는 유명한 영상이 있다. 케이블 채널 HBO에서 지난 2012년 방영된 드라마 <뉴스룸>의 인트로 장면이다.

밀레니얼 세대쯤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민주당 측과 공화당, 그리고 뉴스진행자인 윌 맥보이에게 “왜 미국이 위대한 국가인지 답해달라”고 묻는다. 민주당 측 인사가 꼽은 것은 ‘다양성과 기회’, 공화당은 ‘자유’를 꼽았다. 윌 맥보이는 답을 원하는 여학생에게 “미국은 위대하지 않다!”고 일갈한 뒤 “한때는 위대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일갈한다.

트럼프는 이 드라마를 보고 저 구호를 만든 것일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정작 드라마 시나리오를 쓴 아론 소킨은 트럼프가 당선된 다음 날 자기 딸과 아내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통해 “2차 대전에 참전했던 할아버지가 지킨 나라를 증오에 찬 바보 같은 사람(트럼프)들이 가져가지 않도록 싸움을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는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실제 선거인 수보다 주 대표들의 간접선거 방식인 독특한 미국 선거제도 덕분이기도 하지만 흔히 ‘컨트리클럽 공화당, 월스트리트 민주당’의 구도를 넘어서는 독특한 개인 캐릭터라는 점도 중요한 요인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트럼프 집권 초기 이데올로그였던 스티브 배넌은 2016년 대선에서 벌어진 트럼프 현상을 ‘성난 보통사람들의 반란’이라고 불렀다. 성난 보통사람들의 ‘아바타’로 뛰어든 트럼프가 공화당의 기성정치를 넘어 워싱턴의 기성정치, 제도언론의 벽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과거 미국 민주당은 미국 남부의 백인 지주들을 기반으로 하는, 한국식으로 말하면 한민당과 같은 성격의 정당이었고, 과거 흑인들은 공화당을 지지하는 게 일반적인 추세였다.”

이원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의 말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이 지지기반에서 정반대로 역전이 일어난 것은 1964년 대선 당시 공화당 후보였던 배리 골드워터가 민권법(civil rights act)을 거부하면서 부터다.

“그때부터 진보적 백인과 흑인들은 민주당을 지지하기 시작했고, 한국의 젊은 세대가 보수적 노년을 밀어내듯 이들이 미래 어젠다를 선점하면서 민주당이 패배할 수 없는, 다시 말해 공화당이 당선되기 힘든 이데올로기적 지형을 만들어냈다.”

그러다보니 티파티와 같은 대안우파들에게 이념적 기반이 취약한 공화당이 먹히는 현상이 나타났고, 다시 도널드 트럼프 같은 인사에 의해 휘둘리는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계속되는 이 교수의 말.

“흥미로운 것은 한국은 민주당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인구학적 섹터가 성장해서 문재인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졌는데, 미국은 공화당이 약해지면서 힐러리가 당선되는 것이 아니라 트럼프가 당선된 것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 대권 준비 안됐던 트럼프, 외교실력은? 백악관 내부를 들여다본 저널리스트 마이클 울프에 따르면 집권 1년차 전후까지 백악관 웨스트윙에서 트럼프를 보좌하던 사람들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뉜다.

첫째는 가족이다. 딸 이방카와 사위 쿠슈너다. 이들의 뒤에는 폭스 뉴스를 손에 넣은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이 있다. 둘째는 트럼프의 이데올로그를 자처하던 스티브 배넌과 그의 측근들이다. 배넌의 뒤에는 트럼프가 주로 밤에 전화통화를 주고받는 레베카 머셔 등 보수성향의 억만장자 그룹이 있다. 셋째가 프리버스-폴라이언으로 대표되는 공화당 전국위원회 그룹이다.

울프의 책은 스티브 배넌의 부상과 몰락에 초점을 두고 있다. 당 쪽 측근 그룹이 전혀 힘을 못쓰면서 ‘재방카’(이방카 부부를 합해 붙인 별명) 쪽과 배넌 사이에서 치열한 파벌다툼이 벌어졌다. 러시아 스캔들과 관련한 핵심정보들이 양 파벌의 갑론을박 과정에서 언론에 흘러나왔고, 이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서로를 신뢰하지 못한 양 파벌 인사들은 최악의 선택을 했다.

배넌이 트럼프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배넌은 그 자신의 견해가 전적으로 대통령의 견해에서 나온 것임을 확신시켜줌으로써 트럼프를 꼬드기는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울프에게 취재원이 드러나지 않는 ‘딥백그라운드 인터뷰’ 방식으로 트럼프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트럼프는 단순한 기계다. 아부를 하면 스위치가 켜지고, 비방하면 꺼지는 그런 기계 말이다.”

■ 미·북 정상회담, CIA가 주도? 트럼프가 관심이 있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과실(열매)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트럼피즘(trumpism)을 주창하던 배넌이 중간에 쫓겨날 위기가 몇 차례 있었는데, 그것은 배넌이 아이디어의 소유권을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울프는 적고 있다. 트럼프는 직설적으로 역정을 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건 배넌의 아이디어가 아니었어. 내 아이디어였지. 그건 트럼프의 방식이야. 배넌 방식이 아니라고.”

우리로서는 기시감이 드는 트럼프의 사고 패턴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이후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통화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강한 제재와 압박정책으로 트럼프가 북한을 압박해 회담에 나왔기 때문”이라고 공을 트럼프에게 돌렸다. 문 대통령은 또 이희호 여사가 보낸 축전에 ‘노벨상을 타시라’고 덕담한 것과 관련, “노벨상은 트럼프 대통령이 받고, 우리는 평화만 가져오면 된다”고 답을 한다. 문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트럼프 대통령의 퍼스널리티나 성향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통해 전략적으로 나오는 발언일까.

“물론이다. 국가안보실이나 국정원 같은 조직이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면 임무를 방기한 것이다.”

조성대 교수의 말이다. 이어 그는 말한다.

“김정은에 대한 미국의 정보수집도 마찬가지다. CIA(중앙정보국)나 국무성이 외교정책 정보망의 대표적인 두 통로인데, 체계적으로 수집한 정보를 수집해 보고를 할 것이다. 물론 최종적인 결정은 트럼프 특유의 비즈니스 스타일로 판단하겠지만.”

책이 기술하는 주요 파벌 사이의 역학구도와 북·미 정상회담을 코앞에 둔 현재 시점에서 주요 인물과 그들 사이의 대립구도는 시차가 있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막후에서 협상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현재는 CIA로 보인다.

5월 10일 트럼프는 트위터에 “지나 하스펠이 오늘 눈부시게 깜짝 놀랄 만한 일을 해냈다”고 적었다. 그 일이 무슨 일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전후 맥락으로 미뤄보면 북·미 정상회담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나 하스펠 CIA 국장내정자는 전임 국장이었던 폼페이오가 틸러슨 대신 국무장관으로 들어가면서 CIA의 최고책임자 역할을 하고 있다. 실제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공개한 김정은 위원장의 5월 9일 폼페이오 접견 사진을 보면 CIA가 지난해 5월 창설한 코리아임무센터(KMC) 앤드루 김 센터장이 폼페이오 옆에 배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장관이 평양 공항에서 영접을 나온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 평양=연합AP

■ 햇볕정책 아닌 제재압박이 북 개방?

북·미회담의 결과가 대체로 성공적일 것이라는 데에는 학계나 전문가들의 의견이 대체로 일치한다. 안병진 경희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설사 변덕을 부린다고 하더라도 트럼프는 이미 빅딜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며 “특히 기존 대통령들과 다른 위대한 성과를 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큰 성과에 대한 집착이 남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안 교수에 따르면 트럼프로서는 올해 11월에 있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의 승리도 향후 그가 노리는 재선이나 러시아게이트 특검 등에서 중요하기 때문에 ‘국내정치용’으로라도 북·미회담에서 성과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지난 대선에서 승리한 것은 미국 중서부와 북동부의 소위 러스트 벨트(rust-belt) 백인 유권자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간선거는 전국적 범위에서 벌어지는 선거다. 상원은 100석 중 35석, 하원은 435명 전체를 뽑는 선거다. 선거 결과의 향방에 따라 재선은커녕 임기를 못 채운 탄핵으로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사는 우리 입장에서는 생존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 절박한 문제이지만 실제 트럼프나 미국 정계에서 한반도 이슈는 어느 정도의 위상을 차지할까. 앞서 울프의 책 제목 ‘화염과 분노’는 북핵위기가 고조되던 지난해 트럼프가 쏟아낸 말폭탄에서 따온 제목이지만 전체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에서 북핵문제가 언급되는 것은 두 군데, 분량으로 4∼5페이지에 불과하다.

“트럼프 정권이 출범할 당시 외교문제에 대해 문외한이었다는 것은 사실이고 지금도 그의 주변에 전문가가 많지 않은 것은 맞다. 하지만 지금 국면에서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본다.”

주재우 경희대 중문과 교수의 말이다. 주 교수에 따르면 과거 수십 년간 이어져오며 엇박자를 내던 한반도 주변국의 냉전질서를 바꿀 절호의 기회가 우연히 만들어졌고, 북도 그렇지만 트럼프 역시 전임 대통령들이 해결 못하던 문제를 해결하면 ‘자신은 기성정당 전직 대통령과 근본적으로 다른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걸 입증할 기회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벨 평화상도 마찬가지다. “올해는 이미 라인업이 결정되어 있어 어렵겠지만, 실제 평화체제를 만들어낸다면 내년에는 기대해봄직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남는 의문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계승한다고 여러 차례 밝혀 왔다. 햇볕정책은 이솝우화에서 따왔다. 나그네가 외투를 벗게 하는 것은 비바람이나 폭풍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을 쬐어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재나 압박이 북의 개혁개방의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 햇볕정책의 일관된 기조였다. 결과론적이지만 트럼프의 최대의 압박과 제재가 북을 회담테이블로 불러낸 건 아닐까.

장신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연구원은 “표면적으로는 제재와 압박이 작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매개 역할을 했다는 것 정도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며 “북의 입장 변화가 제재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제재보다는 전략노선의 변화로 보는 것이 더 맞다”고 말한다. 핵개발의 전제가 애초부터 체제보장이었고, 체제가 보장된다면 경제개발 등과 교환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다시 트럼프다.

곧 있을 북·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북의 체제보장 요구를 들어줄까. 현재까지 입장은 그런 것으로 보인다. 막후협상이 진행되면서 약간 다른 기조가 나왔다. 북에 억류된 한국계 미국인 3명의 송환을 포함, 생화학무기나 북 인권문제를 연계시키려는 움직임이다. 조성대 교수는 “이란 핵협상 폐기로 중동지역에서 유럽이나 러시아의 비난이 고조될텐데, 그럴수록 북핵문제에서 중요한 성과를 거둘 필요성이 트럼프에게는 있다”고 덧붙였다. 승부사, 거래의 달인을 자처하는 트럼프로선 북·미 정당회담을 더 흥행시켜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아직 북·미 정상회담의 큰 그림은 나오지 않았다. 트럼프는 어떤 ‘빅 카드’를 들고 있는 것일까.

트럼프의 생각이 여전히 궁금한 이유다.

‘핵없는 신흥개발도상국 북한’ 가능할까
중국 시진핑 주석과 북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중국 랴오닝성 다롄에서 회담을 하고 있다. / 연합Xinhua
상전벽해. 지난해와 올해, 북핵위기를 둘러싼 북·미 대립을 지켜보는 사람이라면 변화된 상황을 두고 누구나 느끼는 심정일 것이다. 강대강 벼랑끝 대치를 넘어 지옥 입구까지 구경하고 온 느낌이 이런 것일까. 후세의 사가들은 지금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이 역사적 순간을 어떻게 기록하게 될까. 이 ‘급변사태’의 시작은 과연 어디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기록할까. 끊임없이 이어진 역사의 인과고리에서 어느 순간을 끊어 시작점이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트럼프 대통령의 생각처럼, 그리고 진심 여부를 떠나 그에게 지금의 ‘사태변화’의 공을 돌리려고 하는 사람은 이 치킨게임에서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최대수준의 제재와 압박’을 고수했던 미국의 태도를 출발점으로 삼을 수도 있다. 확실한 건 북의 ‘태세전환’이 일어난 건 김정은의 올해 신년사부터였다는 점이다. 조만간 열릴 북·미회담에서 북이 얻으려는 것은 무엇일까. 김정은의 신년사에 그 답이 있을 수 있다. 북에서 최고지도자의 신년사가 차지하는 지위는 남다르다. 절대강령이다. 김일성 시대를 거쳐 아버지 김정일 대에서는 신년사가 3개 매체 연합사설로 대체되었다. 할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등장한 김정은 대에 이 신년사는 다시 부활했다. 북은 레거시(유산)를 중시하는 나라다. 신년사의 구성과 체계는 매년 엇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달라진다. 조국통일사업의 대상인 남과 해외동포와 관련된 주장은 그해 북이 달성해야 하는 경제목표를 분야별로 나열한 뒤 후반부에 언급된다. 그는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에 추종하면서 정세를 험악한 지경에 몰아넣고 북남 사이의 불신과 대결을 더욱 격화시킨” 남조선 당국, 그리고 “핵전쟁 연습에 광분하는” 미국을 비난하는 전통적인 레토릭을 읽어나간다. 여기까지는 예년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다 그는 “남조선에서 열리는 겨울철 올림픽 경기에 대해 말하자면”이라며 대표단 파견 용의가 있으며, 이와 관련해 당국자회담을 제안한다. 신년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선반도의 비핵화’의 대상에 자신들이 핵·경제 병진노선을 통해서 완성했다고 주장하는 핵무력을 포함시키지 않는다. 비핵화의 대상은 ‘미국의 핵무력’이며 조선반도에서 진행하는 ‘핵전쟁 연습’이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책임있는 핵강국으로서 침략적인 적대세력이 우리 국가의 자주권과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나라나 위협도 핵으로 위협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이 개발한 핵은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자위수단이라는 것이다.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한이 지향하는 나라는 다른 나라처럼 정상국가, ‘핵 없는 신흥개발도상국’일까. 강진웅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북한학과 교수는 “비핵화나 그에 따른 경제교류, 부분적인 경제개방은 하겠지만 근본적인 개방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현재 단계에서 북한이 생각할 수 있는 개혁개방 모델의 최대치는 조선노동당 우위체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특구를 통해 진행하는 형태인데, “중국식 개혁개방 모델이 최대치가 되겠지만 거기까지 가진 않을 것”이라는 것이 강 교수의 전망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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