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나는 '미투'를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김채린 2018. 5. 11. 10: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기자님… '미투' 이후 그들의 삶이 중요합니다. '미투'로 끝나지 않으려면, 그 이후의 그들의 삶, 다시 돌아간 조직에서의 그들의 삶… 그 이후의 법적 조치들… 그 이후가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익명의 이메일. 그 뒤편의 얼굴 모를 그녀는 '미투' 이후의 삶을 지켜봐달라고 말했다. 직장 내 성폭력을 신고한 이후, 그녀의 일상은 그 사건의 짙은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런 자신의 처지를 두고 "배 사고로 바다에서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계속해서 그 사고 현장으로 매일같이 출근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썼다.

다급한 사이렌 같은 이메일을 읽다가,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직 추웠던 겨울에 만났던 사람. 7년 간의 긴 침묵을 깨고 "나도 당했다"고 용기 있게 외쳤던 그 사람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봄날, 그녀를 다시 만났다.


◆ 성폭력 사제 '미투' 그 후…

민경 씨의 표정은 복잡했다. 아프리카 선교지에서 일어난 한 천주교 신부의 성폭력을 세상에 알린 지 70여 일 만이었다.

보도가 나간 이후, 그녀는 "7년 만에 처음으로 잠을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편지들이 도착했고, 친정집에는 마음이 담긴 반찬과 과일이 배달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민경 씨에게는 수많은 화살이 날아들었다.

"처음에는, 둘이 연애를 했다더라. 약혼을 했다더라. 그러다 제일 심했던 건… 걔는 원래 정신병자였대. 한 신부한테 미쳐서 수단까지 쫓아갔는데 거기서 발작을 했다더라. 그래서 치료하는 과정에서 스킨십이 있었다더라. 이게 신자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사제단 내에서도 카카오톡으로 퍼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뒤에서 나오던 소문들을 저는 한 달이 지나고 나서야 듣게 된 거죠. 다들 들었는데, 저한테는 얘기를 안 했던 거예요. 상처 받을까봐."

한국 천주교라는 견고한 조직 속에서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 퍼져나가는 걸 지켜보면서도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일일이 대응할 수 없는, 불특정 다수와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화살 같은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얼굴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번은 가족끼리 저녁 식사를 하는데 어떤 신자분이 찾아와서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사제 입장에서는 오지에서 그렇게 힘들게 일을 하고 있는데, 젊은 여자 봉사자가 그렇게 왔을 때 네가 마치 무슨 성모 마리아처럼 느껴져서 그러지 않았을까. 어떤 신자분은 저한테 네가 교구에 전화해서 (한 신부가) 면직만은 되지 않게 해 달라고 얘기하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어요. 그게 제 몫인가요? 제가 면직시키라고 하면 교구가 면직시키고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나요. 그건 제 몫이 아니잖아요."


상처를 주는 건 평신도들만이 아니다. "2차 가해자의 90%는 사제들"이라고 민경 씨는 말했다.

"우연히 저를 알게 된 신부님이 한 교구 지구사제 모임에서 저를 약간 옹호하는 말을 하셨대요. 그랬더니 다른 동료 사제들이 '너는 사제가 한번도 본 적 없는 여자 신자 말을 믿냐. 사제가 신부 말을 믿어야지' 그러면서 엄청 공격을 받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신부님들이 미사 강론 시간이나 신자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죠. 어느 교구에서는 주교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얘기도 들었고."

민경 씨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건, 이런 자신의 상황이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까지도 침묵하게 만들고 있다는 자괴감이다.

"천주교 내에서 '미투'를 하려고 상담 선생님을 찾아왔던 사람들이 그런대요. 김민경은 요새 뭐하고 있대? 이걸 계속 묻는대요. 제가 이렇게 종교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혀서 이렇게 되고 있으니, 다른 피해자들은 더 안 나오는 거죠."


인터뷰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자꾸 피해 왔던 질문을 마지막에 꺼냈다.

'미투'한 것을 후회하시나요?

대답을 고민하던 민경 씨는 세 살배기 딸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저는 제 딸이 저랑 다른 세상에서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근데 요즘 제가 이러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나중에 내 딸이 커서 나를 과연 자랑스러워할까? 아니면, '에휴, 왜 저런 쓸 데 없는 이야기를 해서 저렇게 무덤을 팠을까'라고 생각할까."

이대로 묻혀선 안 된다는 마음과, 그저 조용히 잊혀지길 바라는 마음. 그 두 개의 마음이 민경 씨 안에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다.

딸을 깊이 사랑한 엄마는 결국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게 될까? 딸은 엄마의 행동이 '쓸 데 없었다'고 생각하게 될까? 이 문제의 답은 '미투'의 수신지인 우리 사회, 그 절박한 목소리에 응답하는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수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김채린기자 (dig@kbs.co.kr)

Copyright © KB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