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에도 없는 '조근'..실적 내세우며 '야근'

김지연 2018. 5. 9.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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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스토리-甲甲한 직장④-ⓐ] 다양한 근로시간 갑질 실태
<편집자주> “회사 안은 전쟁터요, 회사 밖은 지옥이다.”

국가 및 사회의 민주주의는 크게 진전됐다는데, 우리들은 언제부턴가 이같은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왜 ‘전쟁 같은 삶’을 살게 된 것일까요.

원인 또는 이유를 찾아가자면, 우리들의 삶이 가장 많이 머무는 직장도 그 연루 혐의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직장 앞에서 멈춰섰다는 지적도 많으니까요.

오너 갑질, 사장님 갑질, 부장님 갑질, 정규직 갑질, 공무원 갑질, 대기업 및 본사 갑질, 을의 갑질, 임금 갑…질, 괴롭힘 갑질, 잡무 갑질, 노동시간 갑질…. 참 말도 많습니다.

세계일보는 우리들이 매일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부조리한 실체를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보도는 직장인들의 ‘온라인 해우소’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시민단체 ‘직장갑질 119’와 공동기획으로 이뤄진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지지와 응원, 참여 부탁합니다. 혹시 자신이 겪고 있는, 또는 주위에서 겪고 있는 갑질이나 괴롭힘, 부조리가 있다면 그 증거와 함께 알려주십시오. 확인이 가능하고 공유할 가치가 있다면 기사를 통해 소개하고 싶습니다. 제보를 보내실 이메일은 kimgija@segye.com 또는 homospiritus1969@gmail.com, 전화번호 02-2000-1181.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알만한 금융회사에 다니는 30대 A씨는 지난해부터 많은 업무 때문에 정규 퇴근시간인 오후 6시를 넘겨 퇴근할 때가 허다했다. 심지어 경비출동업체 직원들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늦게까지 일한 경우가 많다. 밥 먹듯이 장시간 초과근로를 해온 거다.

그럼에도 A씨는 야근 및 시간외수당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회사 CEO와 상사들은 이를 당연시 여기고 칭찬하면서도 정작 시간외수당 얘기는 없었다. 그가 이 문제를 직장 상사에 말했지만 상사는 ‘조직이 다 그런 게 아니겠느냐’라고 말할 뿐이었다. A씨는 결국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 노크했다.

대한민국 노동자들이 직장 내에서 다양한 형태의 ‘노동시간 갑질’을 당하고 있다. 수당도 받지 못하면서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쏟아지는 업무로 밥 먹을 시간, 화장실 갈 시간조차 없이 바쁘게 일하고 있다고 호소한다.

근로계약서에는 없는 정규시간 외 근무를 강제하고 이에 대한 보상은 제대로 해주지 않는 회사들의 갑질 제보와 폭로가 쏟아지고 있다.

◆계약서에도 없는 조기 출근과 야근 밥먹듯

‘직장갑질119’와 ‘사무금융 노동자 직장 내 괴롭힘 조사연구팀’,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고용노동부, 국가인권위원회 등에 따르면 많은 노동자들이 근로계약서상 명시되지 않은 시간에 근무를 강제당하고 있었다.

이들 노동자들은 추가 근무에 관해서도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노예계약을 맺으며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영남의 B병원에서는 근로계약서상 근무시간이 오전 9시부터라고 명시돼 있지만 많은 직원들이 오전 8시30분까지 출근하고 있다. 병원 측은 출퇴근시간을 지문인식으로 엄격하게 관리하면서 오전 8시 30분을 지나 출근할 경우 지각 처리를 하고 있어서다.

직장갑질119는 “근로계약서와 다르게 시간외 근로를 동의 없이 강제하는 건 부당하다”며 “업무에 필요한 근로시간이라면 그에 상당한 시간외 근로수당을 지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 회사의 경우 연초마다 ‘주말 근무 동의서’를 작성, 직원들에게 ‘사용자가 지시하는 어떠한 업무에도 따르겠다’는 내용에 동의하게 하기도 한다는 제보도 있었다. 노동시간 노예계약인 셈이다.

◆밥 먹을 시간도 없고 화장실도 눈치 봐야

우리나라 근로기준법에는 1일 8시간 기준으로 4시간마다 30분의 휴게시간을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노동자들이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보건의료산업 노동자 1만1662명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 결과 휴게시간을 100% 보장받는 경우는 15.8%에 불과했다. 의료보건 노동자 43.3%는 휴게시간을 전혀 보장받지 못했다. 식사시간도 100% 보장받는 경우는 25.5%에 불과했고 전혀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는 응답은 22.9%로 조사됐다.

바쁘면서도 상시 인력부족에 시달리는 업종에선 더욱 심하다. 통신사 콜센터에 근무하는 C씨는 “하루에 많으면 두 번 가는 휴게시간에도 한번에 10분을 넘기면 제지가 들어온다”며 “이마저도 ‘하루 휴식시간 20분 이상 사용 금지’ 지시를 내린 부서도 있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한 홈쇼핑은 콜센터의 점심시간을 30분으로 단축해 논란이 일었다. 회사는 총 휴게시간이 1시간 이상 제공된다는 이유에서 근로기준법 위반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잠시 화장실 가는 시간조차도 휴게시간에 포함시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노동자가 작업하지 않는 대기·휴식 시간 등이라 할지라도 실질적으로 사용자의 지휘·감독 하에 놓였다면 근로시간에 포함된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다.

◆실적 압박, 퇴근도 제대로 못해...압박감에 자살도

과도한 실적이 강조되면서 제대로 쉬지도, 퇴근도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사무금융 노동자 직장 내 괴롭힘 조사연구팀’이 2015년 발표한 보고서 <전략적 성과관리? 전략적 괴롭힘!>에 따르면 업무량이 증가하고 실적 관리가 강화될수록 노동자들에 대한 압력도 커지고 이에 따라 퇴근 등이 늦어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물론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도 커진다.

손해보험사에 다니는 D씨는 “일년 목표가 설정되면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매달 매주 매일 그날그날의 실적을 관리자가 체크하고 직원한테 피드백 해준다”며 “하달 목표에 못 미치면 계속 압박을 더 주니까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피로도가 많다”고 전했다. 그는 그러면서 “목표 달성을 위해 퇴근이 늦어지고 휴식 시간도 주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고 푸념했다.

노골적인 야근 강요도 적지 않았다. 직장인 E씨는 최근 회사 업무가 늘어나면서 무조건적인 야근을 강요당했다고 직장갑질119에 제보했다. E씨는 “회사 측에서 포괄임금제 운운하면서 야근을 거부할 경우 퇴직금도 없이 해고할 수 있다고 통보하더라”고 혀를 찼다.

과도한 실적 압박에 장시간 연장근로에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었다. 고용노동부가 2017년 11월 발표한 보고서 ‘직장 내 괴롭힘 대책 마련을 위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통신사 콜센터 업무 수행 중이던 현장실습생은 과도한 업무에 장시간 연장근로와 지나친 업무 감독 등을 견디다 못해 2017년 1월 목숨을 끊은 사례가 소개됐다. 해당 업체 한 노동자는 “할당 콜(call) 수를 채우려면 만성적으로 연장근로를 할 수밖에 없지만, 회사는 이를 자발적 근무로 보고 연장근무 수당도 지급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저녁이 없는 삶…수면부족에 시달리는 직장인들

많은 직장인들이 과도한 실적 강조에 퇴근 후에도 업무를 하느라 ‘저녁이 있는 삶’은 꿈도 꾸지 못하고 만성적인 수면부족과 피로에 시달리고 있다.

구인·구직 플랫폼 ‘사람인’이 지난해 직장인 72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높은 연봉과 저녁 있는 삶 중 원하는 삶’을 고르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70.2%가 ‘저녁 있는 삶’을 선택했지만 실제로 저녁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직장인은 50.6%에 그쳤다.

특히 현재 저녁이 있는 삶을 살지 못한다고 응답한 직장인들은 ‘야근이 잦아서’ ‘일이 너무 많아서’ ‘퇴근 후에도 업무 요청이 와서’ 등을 그 이유로 꼽았다. 결국 일이 많고 야근이 잦아서 제대로 ‘저녁이 있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얘기다.

과도한 업무와 장시간 노동으로 수면시간도 부족했다. ‘사람인’이 지난달 16일 직장인 773명을 대상으로 ‘수면 실태’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5.7%는 수면시간이 부족하다고 답했다.

◆“형식적 감독도 한 몫…집단행동으로 노동자 권리 찾아야”

직장갑질 119에 스텝으로 참여 중인 이진아 노무사는 노동시간 갑질과 관련,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행정기관에서 근로감독이 엄격하지 않고 사용자들은 걸려도 솜방망이 처벌만 받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을 엄격히 지키지 않는 경향이 있다”며 “관리감독이 형식적이고 서면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문제가 반복된다”고 분석했다.

이 노무사는 그러면서 “근로계약서상 소정근로시간 초과 근로 시에는 반드시 노동자의 동의를 요구하게 돼 있고 휴게시간도 법적으로 강제돼 있다. 노동자들도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법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지만 권리를 주장하기가 힘들다”며 “그러한 행동에 대한 불이익한 처분이 내려올 수 있기 때문에 본인의 근로시간이나 휴게시간을 지키는 싸움을 하기가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는 근로시간 갑질을 당하는 ‘을’들에게 “집단적 행동이 제일 바람직한 것 같다”며 “집단적으로 부당한 상황에 대해 정당한 조치를 요구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이와 관련, 지난해 1월 발표한 보고서 ‘노동시간 실태와 단축 방안’에서 “‘근로기준법 적용대상 제외 업종 존재’ 등 각종 예외규정과 ‘휴일근로는 연장근로 한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고용노동부의 해석, ‘봐주기’ 관행 등이 ‘장시간 노동’을 고착시키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김지연 기자 delays@segye.com
<공동기획> 세계일보·직장갑질 119
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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