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기부의 역설..아프리카 출판 '질식'
[경향신문] ㆍ미·영 단체 12곳서만 1년에 600만권…출판계 자생력 잃어
ㆍ“책 기부금액 만큼 현지 책 구매” 생태계 살리기 집중해야
매년 책 수백만권이 아프리카로 쏟아져 들어간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선진국의 도서 기부단체들이 책을 모아 보낸다.
“책에 굶주린 이들을 돕자” “책을 보내면 삶이 바뀐다” “아프리카는 더 많이 읽고 싶다”. 기부단체들은 이런 슬로건을 앞세우지만, 도서 기부가 정말 아프리카를 위한 것이냐는 물음이 나온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최근 “도서 기부가 아프리카의 출판 생태계를 해친다”면서 도서 기부가 경제적, 윤리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프리카 출판산업을 연구해 온 스위스 학자 한스 젤은 2016년 펴낸 보고서에서 “아프리카 각국은 점점 더 기부도서에만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프리카로 책을 보내는 사업은 30여년 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85년 영국의 국제아프리카연구소(IAI)는 런던에서 ‘책의 기근’이라는 이름으로 회합을 열었다. 대학 도서관조차 새 책을 들이지 못할 만큼 책 부족 문제가 심각하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후 대규모 도서 기부 운동에 불이 붙었다.
미국 도서 기부단체 ‘북스포아프리카’는 1988년 창립 이후 30년 동안 아프리카 49개국에 책 3100만권을 기부했다. 1982년 만들어진 영국 단체 ‘북스 어브로드’도 지금까지 아프리카 각국에 250만권을 보냈다. 이들을 포함한 세계 12개 도서 기부단체가 한 해 아프리카로 책 600만권을 보낸다. 중소 기부단체들까지 합치면 양이 더 늘어난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2012년 잠비아 정부는 도서관 도서 구입 예산을 한 푼도 책정하지 않았다. 같은 해 탄자니아 정부는 새 책 2500권도 살 수 없는 예산을 배정했다. 아프리카 각국은 해외 기부 도서로 도서관 서가를 채우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이고 경제적이라고 판단했다. 도서관조차 책을 사지 않는데 출판산업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도서 기부운동이 시작되기 전에는 그래도 희망이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프랑스 로렌대학의 라파엘 티에리 박사는 르몽드에 “1970년대 후반 카메룬은 유네스코 지원을 받아 아프리카 출판 센터를 세웠다. 지역 출판산업의 성장 허브로 삼으려 했다”면서 “1980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당시 아프리카 출판업체 200여곳이 참가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프리카 나라들은 기부 도서에 의지해 예산을 아낀다. 선진국 출판업체들은 기부라는 이름으로 재고 도서를 손쉽게 처분한다. 세금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고, 가난한 나라들을 돕는다는 근사한 이미지도 얻을 수 있다.
재고 처리로 기부를 이용하다 보니 중고책뿐 아니라 새 책까지 쏟아져 들어간다. 젤이 거론한 12개 주요 기부단체 중 중고책만 취급하는 단체는 5곳에 불과하다. 새 책이 현지 출판산업에 끼치는 악영향은 중고책보다 훨씬 더 크다.
중고책 질 문제도 제기된다. 미국 단체 두 곳과 연계된 ‘가나 북 트러스트’는 기부받은 책 중 30%를 폐기한다. 제대로 읽기 힘들 만큼 책이 손상됐기 때문이다.
도서 기부 문제는 헌 옷 기부 문제와 닮았다. 값싸고 질 좋은 서구산 헌 옷이 무더기로 밀려드는 탓에 아프리카 토착 섬유산업이 말라죽는다. 그래서 르완다, 케냐 등 동아프리카공동체(EAC) 국가들은 2016년 중고 의류와 신발 수입을 전면 금지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도서 기부 역시 헌 옷 기부와 유사한 비판을 받고 있다. 비영리단체 ‘국경없는 도서관’ 제러미 라차르 국장은 르몽드에 “책을 기부했다고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아프리카 출판생태계를 살리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책을 기부한 금액만큼 현지에서 펴낸 책을 구매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젤도 현지 출판산업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보고서에 “미국에서 아프리카까지 배로 책 4만권을 실어 보내는 데 2만달러가 든다. 그 돈이면 현지 출판사가 펴낸 책 1만권을 살 수 있다”고 적었다.
<심진용 기자 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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