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50년]⑧로커는 트로트 부르면 안되나요 변신의 귀재

민경원 입력 2018. 5. 8. 02:00 수정 2018. 5. 8.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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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노래 베스트 11]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
트로트 비트 바꿔 대대적 히트
스스로 음악 폭 넓히는 계기돼
트로트 곡의 리듬을 바꿔 새로운 느낌을 더한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인기를 얻게 된 조용필.그는 "장르에 상관없이 좋은 노래는 좋은 노래"라고 말했다. [사진 유튜브 캡처]
“별로 바뀐 게 없는 것 같아요.”
조용필 데뷔 50주년을 맞아 10년 전인 40주년과 비교해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그가 지니는 함의의 변화가 있느냐고 묻자 이영미 문화평론가는 이렇게 답했다. 『한국대중가요사』의 저자인 그는 “위치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욕이 아니고 엄청난 칭찬”이라며 “그 시대를 발칵 뒤집어놓으며 등장한 수퍼스타 중 온갖 양식을 다 종합하여 갖추고 있는 사람은 조용필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기타리스트가 트로트를 부른다는 것은 아마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일 것이다. 그런데 트로트로 데뷔한 사람이 다시 판소리를 접목한 탁음을 선보이고, 동요를 아우른 곡조를 뽑는다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스타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전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닐뿐더러 어렵사리 바꾼다 해서 제대로 소화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한데 이제는 도전 자체가 조용필의 스타일이 되어 “다음은 EDM”이라고 말해도 아무도 물음표를 달지 않는다.

12일 서울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시작되는 50주년 콘서트 투어 ‘땡스 투 유(Thanks To You)’를 앞두고 지난 2008년 중앙일보에 연재된 ‘조용필 40년 울고 웃던 40년’ 시리즈를 디지털로 재구성했다. 당시 가수ㆍ평론가ㆍ소설가ㆍ시인ㆍ방송인 10명이 참여해 ‘조용필 노래 베스트’를 선정했다. 2008년 2월 19일 이영미 평론가가 ‘돌아와요 부산항에’에 대해 쓴 기고문이다.


‘절규하는 트로트’ 신선 무명 로커가 벼락 스타로
조용필은 90년대 초 방송 활동을 중단했지만 공연을 통해 줄곧 팬들과 소통해 왔다. [중앙포토]
조용필에게 트로트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조용필의 최고 인기곡으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나 ‘허공’을 꼽지만, 그의 노래 중 트로트의 비중은 의외로 높지 않다.
조용필에게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첫 만남은 그다지 탐탁지(?) 않았던 듯싶다. 우리가 알고 있는 1976년 음반 훨씬 이전에 발매된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72년 버전에서는 그런 느낌이 묻어난다. 조용필 독집인 이 음반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유일한 트로트 곡이다. ‘오버 앤드 오버’(Over and Over)를 비롯해 절반 정도가 외국곡 번안이고, 박인환 시를 노래로 만든 ‘세월이 가면’도 불렀다.

블루스와 팝의 색조가 전체를 지배하는 이 음반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달랑 어쿠스틱기타 하나로만 연주된, 다소 무신경하게 방치된 듯한 트랙이었다. 기지촌 밤무대 티가 역력한 통속적 꺾음목과 콧소리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조용필에게 트로트는 부르고 싶지 않았는데 어쩌다 부르게 된 그런 종류의 노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탐탁잖은 노래가 우연히 떴고, 조용필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75년 유신시대가 말기로 치달으면서 청년문화의 스타들은 대마초 사건을 통해 감옥으로 가거나 신선한 감각을 거세당했고, 쇠락하던 트로트는 이 틈에 부활했다. 그리고 이 부활은 남진ㆍ나훈아로의 회귀가 아니었고, 로커의 목소리에 실린 새로운 트로트였다.

2007년 경기 성남에서 열린 공연 모습. 그는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중앙포토]
그 붐의 시작에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우연히 놓였고, 이때 편곡은 전자기타와 드럼이 전면 배치된 록 스타일이었다. 이 노래로 ‘오동잎’(최헌), ‘앵두’(최헌), ‘사랑만은 않겠어요’(윤수일) 등 트로트 선율을 록 편곡에 얹은, 이른바 ‘트로트 고고’의 시대가 열리게 됐다.

첫 단추를 이렇게 꿰었으니, 조용필은 싫든 좋든 트로트를 평생 안고 갈 수밖에 없었을 듯싶다. 대중은 80년 이후 ‘창밖의 여자’에 놀라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그가 트로트를 불러주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미워 미워 미워’ ‘일편단심 민들레야’를 거쳐 ‘허공’으로 이어지는 신곡을 내고, 다른 트로트 가수들처럼 ‘흘러간 옛 노래’식 옴니버스 음반들을 내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앞세워 84년 한ㆍ일 문화교류에 앞장섰던 것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끼운 첫 단추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실린 앨범 재킷.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트로트 고고의 선두에 선 곡이라면, 트로트의 역사에서 ‘미워 미워 미워’(81년)는 또 다른 의미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미워 미워 미워’는 록 스타일의 경쾌함을 제거하고 정통 트로트의 무게감을 되찾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후퇴나 회귀는 아니었다.

‘미워 미워 미워’는 트로트의 비극성을 확보하되, 록과 블루스로 갈고 닦은 샤우팅 창법을 트로트적인 꺾음목과 결합함으로써, 록의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비극성을 창출했다. 조용필은 이를 통해 80년대 전반, 윤항기적 질감의 여성 버전인 김수희와 함께, 록의 절규와 트로트의 비극성을 결합시킨 대표적인 가수가 됐다.

한편 ‘허공’은 또 다른 맥락에서 의미가 있다. 트로트에서 비극성을 깨끗이 제거해낸, 그야말로 쿨하고 경쾌한 주현미의 장조 트로트가 트로트계의 주류로 부상한 시절, ‘허공’은 ‘미워 미워 미워’의 절절한 비극성을 버리고 담담한 장조 트로트를 선택함으로써 다시 한번 조용필의 호소력을 확인시킨 노래였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니는 부산항. 최근 대형선망업계가 "한일어업협정 결렬 장기화와 어자원 감소 등으로 조업할수록 손해가 커진다"며 두 달 간 조업을 쉬기로 해 어선이 가득 차 있는 모습이다. [부산=연합뉴스]
트로트는 조용필의 노래 중 정말 소수에 불과하지만, 이렇게 그의 트로트곡들은 당대 트로트의 최신 트렌드를 놓치지 않았다. 이는 그가 트로트를 홀대하지 않고 자신의 음악으로 껴안은 결과다. 그 덕에 그는 40~50대 팬들까지 확보했고, 그네들의 아들 딸이 ‘단발머리’와 ‘비련’에 미쳐 “오빠!”를 외칠 때도 그는 부모들에게 질타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에게 서태지에게는 붙일 수 없는, ‘국민가수’란 명칭이 따라붙는 것은, 트로트로 성인 세대를 적극적으로 껴안음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그야말로 행운이 아니고 무엇이라 말할 수 있으랴.

■ 조용필, 그때 내 마음은…

「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첫 노래다. 레코드 회사에서 이런 노래가 있는데 한번 녹음해 보자고 해서 불렀다. 곡이 쉽고 재미있었다. 트로트 냄새가 너무 진한 4분의 2박자여서, 4분의 4박자 8비트곡으로 리듬을 싹 바꿨다. 그랬더니, 새로운 맛이 났다. 사람들도 이 노래를 트로트가 아닌, 새로운 장르의 노래로 받아들였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새벽다방 등 소위 언더 그라운드를 통해 부산까지 내려가면서 폭발력을 갖게 됐다.

내 노래 중 방송을 타지 않고 히트한 유일한 경우다. 그룹활동을 하던 조용필이 트로트를 하니까 의아해하는 반응도 있었지만, 별로 의식하지 않았다. 장르에 상관없이 좋은 노래는 좋은 노래다. 오히려 이 노래 덕에 내 음악의 폭이 넓어졌다. 가사 말미 ‘그리운 내 님이여’를 ‘그리운 내 형제여’로 바꾼 것은 시대 상황과 관련이 있다. 재일동포, 특히 조총련계 동포의 모국 방문이 이어지던 때였는데, 그 분위기를 북돋고 싶어서 가사를 그렇게 바꿨다. 흔한 사랑 노래가 형제애를 담은 노래가 됐다. 실제로 곡이 히트하면서 더 많은 재일동포가 모국을 찾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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