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이어도 괜찮아" 둘째를 낳지 않으려는 이유

칼럼니스트 백운희 2018. 5. 5.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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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키우는 아이] 외동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고민

평일 오후였다. 흔히 '학원가'로 불리는 동네여서 그 시간이 되면 곳곳이 북적인다. 내가 자리 잡은 커피 전문점에도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물론 영유아와 보호자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한 엄마가 남매에게 "조용히 해야 해, 시끄럽게 하면 나가는 거야"라고 주의를 주며 가게로 들어섰다. 잠시 뒤 엄마가 주문을 하러 간 사이 여동생이 칭얼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치원복을 입은, 대여섯 살로 뵈는 오빠가 동생을 달랜다.

"엄마는 금방 와, 저기 보자. 엄마 온다, 엄마 오네."

엄마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오빠는 능숙하게 지치지 않고(이것이 놀라웠다) 동생을 계속해서 얼렀다. 울상이던 동생은 잠시 얼굴을 폈고, 지켜보는 이도 입가에 웃음이 묻어났다.

그리고 남매의 모습 위로 순간 딸의 얼굴이 겹쳐졌다.

언니 또는 누나가 된 아이의 모습은 어떨까? 궁금증이 일다가 금방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외동은 외롭다?

딸은 외동이다. 그리고 (큰 일이 없는 한) 외동일 것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이 1.05명이고, 세 집 건너 한 집은 외동을 키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저출생이 사회 화두라지만 정작 주변에서 외동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선지 "산이(아이의 태명)는 외동이라 외롭겠다", "부모가 형제자매 몫까지 놀아주려면 힘들겠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늦기 전에 동생 낳아줘"라는 말을 빈번하게 듣는다.

온라인 카페나 임신과 육아 커뮤니티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외동이어도 괜찮을까요"라는 질문은 "아들이길 바랐는데 딸이에요" 혹은 "딸이길 바랐는데 또 아들이에요"라는 자녀의 성별 문제만큼이나 명쾌한 해답은 없지만 당사자에게는 중요한 고민이다.

흔히 '외동은 고집이 세고, 사회성이 떨어지며, 자기 것만 안다'는 해묵은 편견도 여기에 한 몫 할 것이다.

외동을 규정하고 따로 새기게 되는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육아서적에는 외동아이에 대해 형제관계에서 익히고 배우지 못하니 이를 어느 정도 이해하기 위해선 부모가 형제자매의 역할까지 해 주라고 조언한다.  결핍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담겨있다.

물론 외동이어서 부모 손이 더 필요할 수는 있다. 산이는 '가르치고 배워요' 놀이를 좋아한다. 가르치는 이는 산이고, 가르침의 대상은 대게 부모나 인형이다. 1교시부터 8교시까지 이어져도 좀체 끝나지 않는 놀이에 부모가 지칠 때면 인형 친구들이 등장한다.

인형을 의자에 앉히고, 책을 펼쳐 쥐어 주고 혼자서 1인 다(多)역으로 놀이하는 모습을 보면 짠한 마음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아이가 말문이 트이기 전 내가 공감대를 형성하는 어른사람과 대화하고 싶어 몸살이 난 것처럼 아이도 말이 통하고 감정이 전달되는 친구와 이야기하며 놀이를 하고 싶을 텐데 말이다. 어렸을 때 내가 언니와 소꿉놀이와 인형놀이만으로 그 시간이 충만하게 기억되듯 아이에게도 소중한 놀이친구가 늘 곁에 있었으면 바라게 되는 것이다.

또한 주변의 언니, 오빠를 유난히 따르는 모습이나 친구와 놀다가도 그 형제가 등장해 갑자기 혼자 놀이할 때를 보면 아이에게 외로움의 감정이 솟아난 것은 아닌지 살피게 된다. 또래라도 형제관계나 양육환경의 차이에 따라 행동거지가 달라지듯 동생 있는 아이가 또래에 비해 좀 더 의젓해 보일 때 산이의 또 다른 성장가능성을 차단한 것만 같은 죄책감이 밀려드는 것도 같은 이유다. 하지만 부모가 채워줄 수 없는 공간은 외동이 아닌 어느 아이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이는 제 걸음대로 씩씩하게 걸어갈 것이다. ⓒ백운희

◇ 둘째를 거부한다

우리 부부가 처음부터 아이 한 명만 낳겠다는 결심을 하지는 않았다. 여러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자란 나는 자녀가 여럿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왔고, 아이를 좋아하기는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출산과 육아의 험로를 통과하며 산이를 기르면서 우리는 생각을 굳혔다.

둘째를 낳지 않겠다.

흔히 아이 수만큼 행복감도 커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부모가 출산을 결정하는 것부터 아이는 그 자체로 존중받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지 부모의 행복한 삶의 조건이 돼서는 안 된다. 그러니 내게 한 명의 아이를 기른다고 행복감이 덜할 것이라는 얘기는 애당초 성립되지 않는다. 외동으로 아이를 키우는 것에 우려나 편견도 사라졌다.

기관 보육을 시작하고 산이가 사회적 관계를 배워갈 무렵 외동인 지인들에게 물어봤다. "외동이어서 외롭거나 친구를 사귈 때 어렵지 않았나요?"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처음부터 외동이었으니까요. (형제가 없는) 결핍이 뭔지는 알기 어려워요. 원래 그런가 보다 하는 거죠. 친구를 더 적극적으로 사귀게 돼요. 물론 형제가 있는 친구들보다 상대적으로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나 활동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점은 차이가 있죠."

아이가 자라면서 외로울까,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혼자 남겨지면 어쩌나 했던 걱정은 순전히 부모의 관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연구들이 말하는 외동의 장점도 다행히 아이에게 발견했다. 언어 습득이 빠르고, 사회성이 좋고 독립적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아니 친구를 편견 없이 바라보는 것이 장점이다. 또래 친구는 언니, 오빠들까지 자세히 알고 관심 있게 대하는 아이 덕에 이사를 오고 동네에 적응하는 일이 수월했다.

하루는 혼자 길을 가는 데 맞은편에서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엄마와 걸어오다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산이(아이 태명이다) 엄마죠?"

"응, 안녕."

"아, 저는 산이 아는 언니에요. 인사하고 싶었어요. 산이는 정말 귀여운 동생이에요."

"그래? 고마워, 알아보고 먼저 인사해줘서, 그리고 산이를 그렇게 대해줘서."

그 엄마와도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낳으라고만 하고 키우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회분위기도 둘째를 낳지 않겠다는 결심을 부채질한다. 아이를 키우려면 맞벌이가 불가능한 우리 가정 형편상 경제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오지랖(을 빙자한 무례함)에서도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다. 살면서 부딪혀온 개인적이고도 보편적인 질문유형이 있다.

미혼 일 때는 "남자친구 없어요? 눈이 너무 높은 거 아니에요. 사람 다 거기서 거기에요", 애인이 있으면 "결혼 안 해요? 웨딩드레스는 나이를 못 속여요.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입어야지", 결혼을 했더니 "애는 언제 가질 계획이에요? 젊을 때 낳는 게 좋아요. 그래야 엄마가 고생을 안 한다니까요", 출산 뒤에는 "엄마가 일하면 애는 누가 키워요? 그래도 애는 엄마가 키워야 하는 데 그치요?", 일을 관두고 나니 "애 크는 건 금방이고, 엄마 손이 필요한 것도 한 때인데 돈은 젊을 때 벌어야 해요", 아이 돌 잔치를 앞두고는 "둘째는 안 낳아요? 첫째보다 둘째가 훨씬 예뻐요. 애가 둘은 돼야지, 이렇게 한 명 씩만 낳으니 저 출산이 문제에요".

화자는 별 뜻 없이 내뱉는다지만 청자의 불편함과 상처는 개별적이다. 대신 낳아 키워줄 것도 아니면서 무조건 아이가 있어야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다는 시각은 폭력적이다.

여전히 저출산의 책임은 부모(엄밀히 여성)에게 돌리면서, 버젓이 '노키즈존'을 용인하는 사회에서 아이를 낳으라고 말하는 무례함을 이제 그만 거부하고 싶다.

끝으로 둘째가 아들 일까봐, 나는 둘째를 낳지 않겠다. 친정 부모님은 딸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종손인 남편을 들며 "점잖은 분들이라 시가에서 말을 꺼내지 않지만 그래도 그 집안을 위해선 아들이 필요한 법이다 "고 둘째 이야기를 꺼냈다. 딸이 주체적으로 살길 바란다며 그래서 원했던 일을 육아 때문에 포기한다 했을 때 누구보다 속상해하고 도움 되지 못하는 자신들 미안해했지만(물론 부모님이 미안해할 이유가 아님에도) 정작 딸을 옭아매는 사고방식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는 모습 앞에서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아들이 있어야 나이 들어 부모가 든든하다. 제삿밥이라도 얻어먹으려면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부계중심 가부장적 의식과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아들 키워봐야 소용없다. 오히려 딸이 있어야 외롭지 않다"는 말로 응수하고 싶지도 않다. 이 같은 시각 모두가 결국 자식을 부모를 위한 수단으로만 인식하는 것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아들이 생기면 산이를 한 명의 사람이 아니라 '딸'로 바라보게 된다. 부모가 그렇지 않더라도 사회가 아이를 그렇게 규정지을 것이다. 아들이라는 존재로 인해 아이는 아들의 맞은편에서 딸로 살아가게 된다. 성별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 자체로서 살게 해주자 다짐하며 나는 둘째를 낳지 않겠다.

등굣길을 함께 하는 이웃 친구는 매일 아침 울음바다다. 엄마와 떨어지는 것이 싫어서, 또는 등교 준비를 하다 엄마에게 꾸지람이 듣는 게 서러워서 등등 이유만큼 눈물도 많다. 그리고 친구를 달래는 건 그 엄마나 언니가 아니라 내 아이다. 손을 잡고 등을 토닥이며 걸어가는 두 아이의 모습을 창문으로 바라볼 때면 그래, 외동이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굳어진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 만들어낸 생각이다. 그래서 만약 극적이지만 우리 사회가 아이들이 행복하게 나고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당장 만들어 낸다면, 가시적인 변화를 직접 체감할 수 있다면 혹시 모르겠다. 세상에 '절대'는 없으니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위한 발걸음을 다음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칼럼니스트 백운희는 여전히 육아와 관련한 이야기에는 흔들리는 눈빛과 팔랑거리는 귀를 가지고 초등생 딸을 키우고 있는 전업모입니다. 아이와 함께 부모로 성장하며 겪은 시행착오들을 통해 조금 덜 실망하고 좌절하는 육아 팁을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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