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은 그리기 쉬우나 개는 그리기 어렵다

2018. 5. 3.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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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전호근의 한마디로 읽는 중국 철학|⑨한비 같은 시대 다른 철학자들은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찾아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니며 벼슬을 했지만, 한비는 조국 한나라를 위험에서 구해내는 것만을 고민했다. 그는 겉으론 번드레하지만 현실과 안 맞는 이상론을 배척하고, 강력한 법률로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은 조국 이 아니라 적국인 진나라의 왕이었다.

한비의 초상.

성은 한(韓), 이름은 비(非)다. 나라를 지켜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한(韓)나라의 공족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같은 시대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찾아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벼슬했지만, 그는 어떻게 하면 나날이 약해져가는 조국 한나라를 멸망의 위험에서 구할 수 있을지만 고민했다. 그에게 한가로운 사색은 없었다.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았는지, 어떤 나라가 유지되고 어떤 나라가 망했는지, 누가 성공하고 누가 실패했는지,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가 그의 관심거리였다.

귀신은 그리기 쉬워도 개는 그리기 어렵다. 이상을 말하기는 쉬우나 현실을 헤쳐 나가기는 어렵다는 비유로 든 말이다. 이상론을 비판했던 그의 스승 순자는 여전히 이상을 좇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유가나 묵가의 철학자들이 내세우는 덕치나 평화주의는 겉으로는 아름답고 번드레하지만 실제 현실에 적용할 때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조국 한나라가 그런 이상론에 빠져 점점 약해지는 것을 보면서 여러 차례 글을 올려 한나라 왕을 설득하였으나, 왕은 말더듬이였던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는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이 사악하고 부정한 신하들에 의해 수용되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며 지나간 역사에서 성공과 실패의 교훈을 살펴 글을 지었지만, 이 또한 알아보는 이가 적었다. 그는 그렇게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갔다.

현실과 안 맞는 이상론의 모순

초나라의 어떤 사람이 시장에서 창과 방패를 팔고 있었다. 먼저 방패를 들고 천하에서 가장 단단해서 어떤 창으로도 뚫을 수 없다고 하다가, 다시 창을 들고 와서는 천하에서 가장 날카로워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어떤 사람이 당신의 그 창으로 당신의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겠냐고 물었더니 초나라 사람은 대답을 못하고 서둘러 물건을 챙겨 자리를 떴다. 창을 뜻하는 한자 모(矛)와 방패를 뜻하는 한자 순(盾)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단어 모순(矛盾)은 바로 그가 전하는 이 이야기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는 초나라 사람의 말이 앞뒤가 서로 어긋나 맞지 않는 것처럼 유가나 묵가의 이상론 또한 실제의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유학자들은 걸핏하면 요임금이나 순임금을 성인으로 내세우지만 그가 보기에 창과 방패의 이야기처럼 요임금이나 순임금이 동시에 성인일 수 없었다. 만일 요임금이 성인이라면 그 제도를 고친 순임금이 성인일 수 없게 되고 순임금이 성인이라면 요임금의 과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말했다. 군주는 신하의 충성을 바랄 것이 아니라 신하로 하여금 충성하지 않을 수 없게 해야 한다고. 이어 이렇게 이야기한다. 요즘 사람들은 모두 ‘명군은 인의(仁義)로 나라를 편안히 다스린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형편없는 군주야말로 인의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나라를 잘 다스리는 군주는 인의를 멀리하고 법률로 복종시킨다. 그 때문에 백성들이 잘 다스려지고 나라가 편안해지는 것이다. 국가는 군주 한 사람의 주관적 소망이나 의지가 아닌 강력한 법률로 다스릴 때 강해지며 도덕적 원칙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불편한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는 국가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유가와 묵가를 추종하는 문사와 무사들을 아울러 배척했다. 유학을 배운 자들은 문장을 가지고 법률을 어지럽히고, 묵가를 추종하는 협객 무리들은 무력을 수단으로 법률을 어긴다. 그런데도 군주들은 그들에게 예우를 갖추니 이것이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까닭이다. 법에 걸리는 자는 죄를 주어야 하는데, 여러 선생들은 문학으로 대우받고 여러 협객들은 검술로 우대받는다. 법이 그르다고 하는 것을 군주가 존중하고, 법률을 집행하는 관리가 처벌해야 할 이들을 윗사람이 용납하기 때문에 법률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전란의 시대에 무비를 등한히 하는 군주의 문약함도 비판했다. 지금의 한나라 왕은 평소에는 유학자들의 말을 듣다가 다급해지면 전쟁하는 군사들에 의지한다. 평소에 기르는 것은 급할 때 쓰이지 못하고 급할 때 쓰이는 것을 평소에 기르지 않으니 나라가 약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진시황과 이사.

적국에서 조국을 위하다 죽다

권력자를 설득하는 일은 언제나 어려웠다. 그 일의 어려움을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권력자를 설득하기 어려움은 내가 가진 지식이 부족해 상대를 설득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나의 말재주가 부족해 상대를 설득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설득의 어려움은 권력자의 마음을 헤아려 내 말을 그에게 맞추기 어려운 데 있다. 명예를 좋아하는 이에게 이익으로 설득하면 천박한 자로 여겨져 버림받게 되고 이익을 좋아하는 자에게 명예로 설득하면 사정에 어두운 자라 여겨 쓰이지 않게 된다. 겉으로는 명예를 내세우면서 속으로는 이익을 바라는 상대일 경우, 명예로 설득하면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멀리할 것이고, 이익으로 설득하면 몰래 그 계책을 쓰면서도 겉으로는 그를 버릴 것이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의 글을 읽고 감동한 사람은 불행히도 적국 진(秦)나라의 왕이었다. 진나라 왕은 그의 글을 읽고 감탄한 나머지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그를 진나라로 보내게 했다. 한나라는 어쩔 수 없이 요구에 따랐고 그는 그렇게 진나라에 붙들리는 신세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나라 왕이 한나라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안 그는 글을 올려 한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진나라에 이로운 일이 아니라고 설득했다. 자신의 생존과 나라의 존망이 달린 최후의 설득이었다.

제가 들으니 지금 진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한나라를 치려 한다고 합니다. 한나라는 진나라를 30년 동안 섬기며 밖으로는 방패막이 구실을 하고 안으로는 거적자리 구실을 해왔습니다. 진나라가 다른 나라를 공격하면 한나라는 그 뒤를 따라 진나라를 도왔으며 때마다 공물과 부역을 바쳤으니 진나라의 군현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적국인 조(趙)나라는 천하의 군사를 모아 진나라를 치지 않으면 제후들은 모두 멸망할 것이라고 부추기며 서쪽으로 진나라를 공격하려 합니다. 지금 조나라의 우환을 내버려두고 신하나 다름없는 한나라를 친다면 한나라는 다른 나라에 구원을 청하여 위(魏)나라와 조나라에 의지할 것이고, 조나라는 제(齊)나라와 힘을 합쳐 세력을 키워 진나라와 강함을 다툴 것입니다. 지금 한나라를 치는 것은 조나라에는 복이지만 진나라에는 재앙이니 폐하께서 비록 쇠와 돌처럼 오래 살더라도 천하를 차지할 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초(楚)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나라가 진나라를 속인 일을 설명하고 위나라에 사람을 보내 그들은 안심시킨 뒤에 조나라를 친다면 마침내 천하를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나라 왕은 신하 이사에게 이 글을 보여주며 판단을 구했다. 이사는 이렇게 글을 올렸다. 한나라에서 온 객이 올린 글 중에 한나라를 쳐서는 안 된다고 한 말이 있는데 신은 몹시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진나라에게 한나라가 있는 것은 마치 몸속 깊이 병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가만히 있을 때도 괴로워 축축한 곳에 사는 것 같고 병이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있다가 급히 달리기라도 하면 발작을 일으킵니다. 저 한나라가 비록 진나라에 신하로 복종하고 있지만 진나라의 골칫거리가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갑작스런 변고라도 일어난다면 한나라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의리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강한 힘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만약 진나라가 조나라를 치느라 온 힘을 쏟는다면 한나라는 반드시 뱃속의 병이 되어 발작할 것입니다. 한나라와 초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하기로 계책을 꾸미고 제후들이 호응한다면 진나라는 반드시 도성 바로 앞에서 적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한비가 진나라에 온 까닭은 기필코 한나라를 존속시켜 그 공으로 한나라에 크게 쓰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말재주를 부리고 문장을 짓고 잘못을 꾸미고 속임수를 짜내 진나라로부터 이익을 낚아 한나라를 이롭게 하려고 폐하의 틈을 엿보는 것입니다. 신은 폐하께서 한비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의 도둑 같은 계책을 들어주었다가 일의 실상을 제대로 살피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사실에 부합하는 것은 한비의 말이었을까, 이사의 말이었을까. 진나라 왕은 이사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한비는 결국 감옥에 갇힌 다음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그의 조국 한나라도 진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권력자와의 대화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뿐 아니라 평생에 걸쳐 조국 한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심했던 그의 노력은 이렇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는 현실을 가장 잘 알았지만 끝내 현실의 어려움 앞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를 죽음에 빠트린 이사는 그와 함께 순자에게서 배운 동문이었다.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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