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젊은이] 작물에 깃든 이야기를 팔고 산다.. 친환경장터 '마르쉐' 사람들

이택현 기자 2018. 5. 2.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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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 사무실에서 지난 27일 만난 ‘마르쉐친구들’의 박보현씨(왼쪽)와 김한서씨가 마르쉐 설립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마르쉐친구들 제공
서울 성동구 언더스탠드 애비뉴에서 지난 3월 24일 열린 마르쉐 장터에 시민들이 몰려와 물건을 흥정하는 모습. 마르쉐친구들 제공

농작물보다 대화가 주된 상품… “우리의 도전, 새 길 열 수 있을 것”
찻잎·봄나물·잣·불고기 등 다 팔려도 소비자와 얘기 나눠
요리사는 먹거리 만들어 판매… 일회용 접시·젓가락 사용 안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손을 맞잡은 사진이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다. ‘평화와 종전’이라는 문구를 쓴 이동식 칠판도 테이블에 기대어져 있다. 시민단체 홍보부스처럼 보이는 곳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고기 볶는 냄새가 진동했다. 이 가게에서 생고기와 반찬용 불고기를 파는 여지현씨는 “어제 TV로 남북 정상회담을 지켜봤는데 너무 기뻐서 이 기쁨을 손님들과 나누고 싶었다”고 말했다.

여씨는 고기를 사러 온 손님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불고기를 사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그가 오늘 지은 아침밥이 설익었다는 사실부터 경북 봉화에서 4명의 동업자와 축산 농가를 하고 있고 딸과 함께 장사하러 나왔다는 사실까지 알 수 있었다. 얘기를 듣는 동안 고기가 거짓말처럼 동이 났다. 불고기거리는 30인분만 준비해 금세 다 팔렸다고 했다. 불고기를 먹지는 못했지만 이야기를 넉넉히 들어 아쉽지 않았다.

서울 성동구 서울숲으로 향하는 언더스탠드 에비뉴에는 넷째주 토요일마다 여씨처럼 말 많은 농부들이 모여든다. ‘마르쉐 장터’에 출점한 농부와 요리사, 수공예자들이다. 이들은 물건을 사고팔 때 “얼마예요” “많이 파세요” 말고도 많은 대화를 한다. 획일화된 대기업 유통망을 거친 상품과 달리 작물마다 이야깃거리가 넘치기 때문이다.

기자도 28일 마르쉐 장터에 장을 보러 갔다. 들풀과 찻잎 따위를 파는 상점 들풀한아름에서 알레르기성 비염에 좋다는 백목련차를 샀다. 들풀한아름을 운영하는 김진은(22) 진원(20)씨 자매가 경기도 하남에서 직접 키운 것이라 했다.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일찌감치 직업 농부의 길을 택했다. 처음에는 오빠도 함께 일했지만 몇 년 전부터 따로 일한다. 자매는 “농사일 엄청 힘들다”면서도 일을 계속하겠다고 했다. 그런 두 사람에게 손님들은 “귀농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던졌다.

마르쉐는 농작물보다 대화가 주된 상품이다. 좌판에 작물 대신 사진만 올려놓고 손님을 맞이하는 젊은 부부도 있었다. 이들이 경기도 양평에서 재배해 갖고 온 작물들은 일찌감치 다 팔렸다. 부부는 집에 돌아가지 않고 사진을 올려놓은 채 손님들과 대화했다. 손님이 옥수수 사진에 관심을 보이자 “팝콘 만드는 데 쓰는 쥐이빨옥수수인데 손님들이 그 사진을 유독 좋아한다”고 참견했다. 평범한 직장인이던 두 사람은 유럽의 농장들을 여행한 후 농부의 삶을 결심했다.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가 농부로 살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책도 펴냈다. 요즘 부부의 고민은 농부의 삶과 직장인의 삶을 함께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라 했다.

요리사들은 농부들이 가져다 준 재료로 먹거리를 만들었다. 이날은 대둔산 봄나물과 가평 신선잣 등을 넣어 만든 스페인 창작 요리가 인기를 끌었다. 요리사는 자기 요리에 자부심이 넘쳤다. 손님에게 “재료로 쓴 나물은 친척이 뒷산에서 따왔어요. 올해 첫 봄나물일 거예요”라고 자랑했다.

마르쉐에서 파는 모든 요리는 접시 위에 담아 판매된다. 분식집에서 쓰는 것 같은 초록색과 하얀색의 접시들은 마르쉐의 상징과 같다. 마르쉐 운영팀은 보증금 1000원을 받고 손님들에게 이 접시와 젓가락을 빌려준다. 장터에서 파는 음식을 일회용품에 담지 말자는 취지다. 이날 장터에서 만난 마르쉐 운영팀 관계자는 “우리가 대화를 즐기자고 하는 일인데 일회용품 쓰레기를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마르쉐를 즐겨 찾는 손님들도 이런 불편함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아예 밀폐용기와 스테인리스컵을 챙겨 와서 먹거리를 사 담는 손님들도 보였다.

이상적인 시장을 만드는 일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마르쉐 친구들은 장터를 운영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한다. 이날도 마르쉐 운영팀은 출점 희망자들을 데리고 투어를 진행했다. “바질 페스토 요리는 지금도 너무 많아요” 운영팀원은 10여명의 출점자에게 꼼꼼히 설명하며 조언을 했다.

마르쉐 운영팀원은 “다들 어려운 일에 도전하고 있는데 우리도 도전하고 있다. 수익구조가 아직 없다”며 “그럼에도 이 시장에서 하고 싶은 일이 분명하게 있는 분들은 새로운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

▒ 운영자들이 말하는 마르쉐
“손님에게 작물 자란 과정·환경 알려주는 게 중요”

“소비하는 사람에게 주체적인 선택권을 주자는 거다. 마트에서는 사과 하나를 사도 어떻게 자랐는지 물어볼 사람이 없다. 내가 뭘 먹는지 알기 위해 물어보는 과정에서 어떤 음식을 먹는지 알아갈 수 있다.”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 사무실에서 지난달 27일 만난 ‘마르쉐친구들’ 구성원 박보현(26·여)씨는 대화하는 장터 마르쉐 운영 취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마르쉐는 생산자, 소비자, 시민들이 모여 만드는 시장이다. 직접 키운 작물들을 소규모로 사고 판다. 마르쉐친구들이 운영과 기획을 담당한다.

마르쉐에서 가장 독특한 점은 대화다. 마르쉐친구들은 장터에 참여하는 생산자들이 손님과 끝없이 대화를 나누도록 유도한다. 심지어 물건이 다 팔려도 자리를 지키게 한다. 폐장할 때까지 좌판을 펴놓고 손님과 대화하라는 것이다.

대화하는 장터를 구상한 것은 믿고 먹을 수 있는 먹거리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 마르쉐는 환경운동을 하던 시민단체 활동가,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겪으며 먹거리에 관심을 갖게 된 재일교포, 문화기획자 등이 모여 2012년에 만들었다. 마르쉐친구들 일원인 김한서(35 여)씨는 “일반적으로는 누가 어떻게 키웠는지도 모르는 작물을 유기농 인증 스티커만 보고 소비한다”며 “반면 마르쉐 농부들은 농약을 치더라도 어떤 방식으로 치고 있는지 손님께 직접 설명한다”고 말했다.

대화를 시작하자 모두가 변했다. “농약은 어떻게 치나요.” “비닐멀칭 농법(잡초 제거와 온도 유지를 위해 작물 주변 흙을 비닐로 덮는 농법)도 쓰나요.” 손님들이 면전에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해오면 마르쉐 농부들은 농사법을 바꿨다. 손님 앞에 떳떳해지면 말도 많아진다. 친환경 농법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렇게 키운 농작물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설명하다 보면 이야깃거리는 수도 없이 많아진다.

어려움도 따랐다. 장소를 구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장터를 열기에는 불특정 다수가 모여 일상을 나누는 공원이 제격이었지만 공원에서는 상행위가 허용되지 않았다. 현재는 서울 성동구 서울숲 일대와 종로구 대학로 일대에서만 운영된다.

그래도 6년 동안 꾸준히 매달린 끝에 지금은 마니아층도 생겼다. 한번 장을 열면 평균 7000여명이 찾아오는데 이 중 1500여명은 거의 매주 마르쉐를 찾는 단골이다. 마르쉐는 손님과 생산자뿐 아니라 운영하는 이들의 삶도 바꿨다. 박씨는 “농부가 농사를 짓고 요리사가 요리를 하는 경험을 실제로 보여주는 게 손님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나부터가 그렇게 변화된 사람 중의 한 명”이라고 말했다.

김성훈 이택현 기자 hunh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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