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에 주눅들었던 문단, 이젠 희망을 쓸 것"

김향미 기자 2018. 4. 29. 21:1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ㆍ한국작가회의 첫 여성 이사장 소설가 이경자씨

이경자 작가회의 이사장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문학의 궁극은 자유, 평등, 평화, 해방 같은 가치”라며 회원들의 자긍심 고취, 이사장과 회원들 간 수평관계 확립을 강조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국내 최대 문인단체 한국작가회의는 44년 역사에 새로운 점 하나를 찍었다. 2월 정기총회에서 이경자 작가(70)를 이사장으로 선출한 것이다. 첫 여성 이사장이다. 최근 서울 성북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 이사장은 “드디어 평민, 비주류, 을이 작가회의 이사장이 됐다”고 말했다.

나는 평민·을·비주류 이사장 문학의 궁극은 자유와 평등 권력·권위는 끝낼 때가 된 것

작가회의는 1978년 설립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그 뒤를 잇는 민족문학작가회의(1987~2007)의 정신을 계승한다. 자유와 평화, 민주화를 위한 문인 단체로 일해왔다. 이 이사장은 작가회의가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고 했다. 그 변화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 ‘이경자’를 이사장으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독립적 주체로서의 여성 문제를 이야기한 작가다. <절반의 실패>(1988)는 가부장적 사회의 여성 억압을 담아낸 소설집으로 1990년대 페미니즘 운동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경자라는 개인이 잘나서 이사장이 된 것이 아니죠. 이경자로 상징되는 그 의미, 내용을 요구하는 시대가 왔다는 걸 의미하는 거예요. 회원들은 더 이상 권력, 권위 이런 것들을 원하지 않는 거예요. 이경자의 쓰임이 있기에 시대적 필요에 의해 불려나온 것이죠.”

이 이사장은 “30년 전 군부독재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이 있었다면 지금은 그 3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새롭게 생긴 모순, 긴장, 편견, 억압 등을 끝내야 할 때가 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엘리트, 소수의 영웅이 아니라 그저 유모차 끌고 나오는 어머니, 할머니, 어린이 같은 평민의 힘으로 새로운 형태의 억압을 끝내겠다는 것이고, 그것은 지난 촛불집회와 최근 미투와 같은 맥락에 있다”고 말했다.

작가회의는 어떤 변화를 준비하고 있을까. 이 이사장은 회원들의 자긍심, 이사장과 회원들 간 수평 관계를 강조했다. “작가회의를 두고 ‘유명한 누군가가 있는 단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사고예요. 비문학적이죠. 문학의 궁극은 자유, 평등, 평화, 해방 같은 가치인데 그것과 맞지 않죠. 사회 전체가 마찬가지예요. 역행은 자연을 거스르는 것과 같아요.”

이 이사장은 “자기 작품집에 작가회의를 이력으로 자랑스럽게 넣을 수 있는 따뜻한 단체가 되려 한다”면서 “당장은 회원들 작품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지면에 소개할지가 현 집행부의 고민”이라고 말했다. 근래 작가회의가 젊은 작가 목소리를 담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이 이사장은 “이제는 평민 이사장이 됐기 때문에, 변화할 것이다. 자유롭게 모든 것을 말해도 된다고 느껴도 될 것 같다”고 했다.

문단 성폭력 대처 미흡 지적엔 반성의 진정성을 고민했다

2016년 말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비롯해 올 초 미투 운동까지 이어지면서, 문단의 남성 중심적 문화와 성폭력 문제 등이 표면화했다. 이 국면에서 작가회의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이 이사장 취임 한 달 후인 지난 3월13일 작가회의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이 이사장은 사과문 발표에 앞서 “반성의 진정성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까 깊은 고민이 있었다”고 했다.

이 이사장은 작가회의의 대국민 사과 발표 전 내부게시판에 ‘미투 운동의 내면은 변혁이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미투 운동의 내면은 권력의 야비한 속성을 드러내는 일”이라면서 “술자리나 그와 비슷한 자리에서 권력을 가진 남성이 여성에게 성적 추행, 희롱, 폭행을 가할 때 적극적으로 항의할 수 있을 만큼이라도 여성의 인간적 존엄이 우선 자리 잡아야 한다”고 했다. 이 이사장은 “소설가로서, 이사장으로서 미투에 대한 정의를 해줘야 할 것 같았고 미투가 혹여 남성에 대한 공격이라고 느낄까봐 미투의 본질에 대해 말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이 이사장은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억압에 관해 치열하게 글을 써왔다. 최근 인터넷 공간 등에서 퍼지는 여성혐오에 대해서는 “변화라는 것은 충돌이라고 생각한다”며 ‘성장통’에 비유했다. 그는 “남성들이 여성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집필중인 소설 <슬픔의 정원>(가제)은 여성 문제에 대한 작가의 고민과 사유를 집약한 마침표 같은 소설이다.

등단제 문제·문단 불신 현상엔 어떤 꽃이든 필 수 있지만, ‘작가의식’은 여전히 중요

문단은 등단 제도에 대한 회의, 문단에 대한 불신, 문학 장르 파괴 같은 변화에 직면했다. 이 이사장은 “자연스러운 변화다. 이런저런 꽃이 필 수 있는 조건이 됐다”고 말했다. 다만 “작가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중요하다”고 했다. “작가는 가난과 소외, 외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사회를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 중 창밖 화분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수국은 수국으로, 풀은 풀로 볼 수 있어야 하죠. 명예, 권력, 인기, 돈에 집착하면 비울 수 없고 그러면 제대로 볼 수 없죠. 그런 글엔 생명이 없어요.”

등단 45년, 그는 평화와 생명의 글쓰기를 지향한다. 최근 스스로를 ‘할머니주의자’라고 명명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부모의 사랑에는 욕심도 있고 때론 독소도 있고 그래요. 하지만 할머니는 어떤 조건도 없이 사랑하고 좋아하잖아요. 세상도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작가회의는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선언’을 적극 지지하는 성명을 28일 발표했다. 이튿날 이 이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감동스러워서 눈물이 났다”고 했다. 이 이사장은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가 분단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분단’도 여성과 더불어 그의 소설 주제 중 하나다. 지지 성명을 두곤 이렇게 말했다. “우리 문학이 분단 때문에 주눅이 들었던, 자기도 모르게 정신과 영혼이 주눅 들었던, 그 얼었던 마음과 감각, 감성이 풀리는 계기가 될 겁니다. 작가들이 더 당당하고, 더 자신 있는 큰 문학을 할 것이라고 봐요. 새 출발, 기대, 희망을 쓸 겁니다.”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