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잊지 않겠다는 다짐, 약속의 자리"
[오마이뉴스 김성훈 기자]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빛도 그 안에 스몄네. (중략) 쌀 한 톨의 무게는 생명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평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농부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세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우주의 무게"
'평화 한 톨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 싸워야 하는 것일까'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저몄다. 4월은 그래서 더 잔인하기만 했다. 생명의 가치가 무너졌던 4년 전, 우리는 '나라가 무엇이냐' 되물었다. 이제 그런 이야기가 상투적이고 지겹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해남 군민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 말이 더 진하게 다가온다고 했다.
지난 17일 목포 신항에서는 동수 아빠인 정성욱 (4.16가족협의회 선체인양분과장)씨가 삭발과 무기한 단식을 시작했다. 이유는 특조위 조사 활동을 방해한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2기 특조위)' 황전원 위원과 선체조사위 이동곤 위원의 사퇴를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덧붙여 항적실험을 은폐한 이동곤, 김영모, 김철승, 공길영 위원 역시 선체조사 보고서 작성에 '더 이상 관여하지 마라'는 요구사항도 있었다.
"안산은 못 갔지만, 4월 15일 목포 신항 행사에 참여 했습니다. 그 자리에 왔던 예은이 아빠인 유경근 (4.16가족협의회)씨가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합동연결식에서 분향소를 정리하고 보면 이후로 사람들이 잊어버릴까 걱정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이 자리는 끝까지 함께하고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고 약속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매주 목요일 날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안 보인다고 해서 끝난 것은 아닙니다."
고등학교 국어과 교사이기도 한 최 씨의 말에서 단단함이 느껴졌다. 멋모르고 광장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있었다. 리본 형상을 본 뜬 촛불을 넘나드는 아이들을 보며 어른들은 조마조마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어른들 나름의 엄중한 분위기를 지켰다. 그런데 어쩐지 아이들의 뛰노는 모습과 어른들의 엄숙한 분위기는 본래 하나의 몸체 인 듯 자연스러웠다. 성인들의 슬픔이 깃든 의식 속에서 지키고 싶었던 모습이 바로 천둥벌거숭이 같은 아이들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 아니었겠는가. 아이들이니까 뛰어 노는 것은 당연했고, 어른이니까 그 아이들이 뛰어놀 환경에 견고한 울타리를 쳐주는 것 또한 당연했다.
중고생 아이들도 학교를 파하고 삼삼오오 광장에 둘러 앉았다. 아이들은 동갑이 된 언니들과 마주했다. 그 언니들과 악수와 포옹은 하지 못하더라도 가만히 앉아 행사 장면을 가만히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그 또래끼리 카톡에 보내기도 하고, 페이스북에 사진을 업로드하기도 했다. 세월호 언니와 오빠를 만난다고 표현한 이 아이들의 굳은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우리에겐 더 이상
차가운 천장도 바닥도 없어요
250자락 바람을 타고
250개의 낮과 밤을 지나
한반도로 돌아올 거예요
그때는 우리
단 한 개의 거대한 비구름이 될 거예요
그날은
크나큰 리본을 닮은 우리 한반도가
온통 노란색이었으면 좋겠어요
엄마 아빠 가슴에 단
노란 리본이 물들인 세상이었으면 좋겠어요"
"함께 가자 우리 이길을 투쟁 속에 형제 모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동지의 손 맞잡고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주자
해 떨어져 어두운 길을 서로 일으켜주고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 됨을 위하여"
이병채 해남 민예총 지부장을 선두로 땅끝에서 안산으로, 안산에서 판문점 너머로 평화와 안전을 기원하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노래가 불러졌다. 앉아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마음을 내어 놓으며 입으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진지한 눈빛으로 내뱉는 한 마디의 가사마다 절절한 의지가 엿보였다. 눈물을 훔치기도 하며, 더 크게 목청을 돋우기도 했다.
영상에는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관통하는 메시지는 하나였다.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영상은 그 알고 싶은 것이 세월호 유가족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알아야 할 알권리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특별한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혼자 있으면 울컥울컥 했었다. 나와서 0416 리멤버 회원으로 활동하며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뜻을 같이 했다. 굉장히 많은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엄마들이 삭발하고, 유민 아빠 단식 장면 등이 생각난다. 투쟁을 하며 함께 먹은 짜장밥 등 소소한 것들 모두가 감동이었다. 분향소를 가면 아이들을 잘 못 본다. 다 살아 있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딸이 둘 있는 엄마로서, 그중 '김빛나라'는 이름을 봤다. 아이 엄마가 아이의 이름을 지었을 때 느꼈을 감정을 생각나니 더욱 슬펐다. 도와주는 개념이 아닌 함께한다는 느낌으로 우리는 갔다. 행복했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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