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ifty+ >"편안하게 몰입.. 民畵 그리며 세상 근심 지우죠"

이경택 기자 2018. 4. 27. 11: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울 종로구 경운동의 엄재권민화연구소에서 봉황공작도(오른쪽)와 부엉이국화도(가운데) 등 민화 그리기 작업에 여념이 없는 50~60대 초로의 여성들. 작품 크기에 따라 완성에 이르기까지 짧게는 1개월, 길게는 1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신창섭 기자 bluesky@
민화연구소 수강생들이 화조도(왼쪽부터), 책가도, 화성능행도 중 봉수당진찬도, 백수백복도 등 각기 제작 중인 민화를 들어 보이고 있다.
화조도 속 공작의 깃털을 세필로 그리고 있는 모습.

중장년 여성 ‘민화 배우기’ 열풍

원화 본을 떠 색칠하는 작업

시간 걸려도 어렵지는 않아

아마추어 작가 포함 10만명

조선末 서민 위로하던 그림

지금은 주부들에 ‘큰 위로’

지도강사·모사공 등 분야서

경단녀들에 새로운 기회도

6월엔 전문 아트페어 열려

“민화는 편해요. 전통의 계승에 주안점을 둔 작품은 본을 뜬 한지 위에 색깔을 입혀 완성해 나가면 됩니다. 그렇게 몰입해서 작업하다 보면 근심 걱정 모두 다 날아가 버려요.” 서울 종로구 경운동의 엄재권민화연구소에서 만난 박혜원(여·64) 씨는 민화의 매력에 대해 그처럼 설명했다. 박 씨는 대학에서 동양화(이화여대 미대)를 전공했다. 또 오빠는 소녀 그림으로 유명한 박항률(68) 화백이다. 미술가족인 셈이다. 따라서 박 씨의 경우 민화보다는 신사임당처럼 수묵화를 그리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박 씨가 민화에 푹 빠진 것은 15년 전이다.

“학교 다닐 때는 민화를 보면 너무 색이 화려해 거부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나이 들면서 어려서 엄마가 해 준 음식을 다시 찾아 즐겨 먹듯 화사한 색감의 민화를 보니 너무 좋았어요.”

최근 10여 년 전부터 서울 종로구 인사동을 중심으로 ‘민화 배우기 열풍’이 일고 있다. 인사동에 한 집 건너 있다던 서예학원은 대부분 철수하고 그 자리에 민화 학원이 들어서 있다. 한국민화협회에 따르면 전문작가는 물론 아마추어 작가까지 포함해 민화 인구가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같은 민화 열풍의 주역은 어느 정도 아이들을 다 키우고 자신만의 여가를 갖게 된 50~60대 여성들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민화일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우선 민화는 생각보다 접하기 쉽다. 요즘 창작민화도 있지만 민화는 보통 모사(模寫)를 기본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 채색화다. 그리고 싶은 민화 작품을 밑에 두고 반투명 한지인 순지(전통 한지의 일종)에 먹으로 본을 뜬다. 그리고 본을 뜬 순지 위에 민화 안료인 분채(아교에 개서 쓰는 가루물감)와 봉채(먹처럼 갈아쓰는 물감)로 색을 입히고 배접(褙接) 작업을 하면 작품이 완성된다. 그림이 그려진 순지 위에 종이를 덧대는 배접은 표구상 등 전문가에게 맡겨도 된다.

그 같은 과정을 통해 꽃과 나비가 그려진 화접도(花蝶圖), 모란꽃이 그려진 모란도(牡丹圖), 까치호랑이가 그려진 작호도(鵲虎圖), 서가의 책꽂이가 그려진 책가도(冊架圖) 등이 완성된다.

20년 전부터 민화를 배워 왔다는 이현숙(여·62) 씨는 “민화 그리기는 원화의 본을 떠 여기에 색칠을 하는 작업이 중요한데, 작품 완성에 시간은 걸려도 결코 어려운 작업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요즘 책뿐만 아니라 도자기, 꽃이 다 들어 있는 책가도에 푹 빠져 있다”며 “책가도가 완성되면 사대부가 남자들의 일생을 그린 평생도(平生圖) 중에서 ‘장가가는 날’을 그려보고 싶다”고 말했다.

또 한가지 민화의 매력은 작업의 성격에서 나온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이들도 민화에 몰입하며 힐링의 순간을 만끽할 수 있다. 창작의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모사 작업’에 매달려 화려한 색의 물감으로 한지 위에 채색을 하고 있으면 어느덧 자신의 손으로 완성된 민화 작품과 마주하게 된다. 노력한 결과물이 눈앞에 확실히 나타났을 때의 성취감 역시 크다.

50~60대 여성들이 민화 작업에 빠지는 것은 그 같은 ‘작업의 기쁨’ 때문이다.

전직 미술교사였다는 김자경(여·58) 씨는 민화를 배우게 된 계기에 관해 이렇게 설명했다.

“민화를 그리기 위해 붓을 잡고 있으면 일단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아요. 애들, 그리고 남편과 다툰 후라도 그림을 그리면 저녁때 다 풀어져요. 정신 건강에 진짜 좋죠. 나이 들어 적적해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분, 특히 갱년기 증상으로 고통받는 분들에게 민화를 적극 추천해요.”

민화의 이 같은 역할은 어쩌면 민화 본래의 기능과도 맞닿아 있다.

먹을 주로 사용한 선비들의 문인화와 달리 여러 색상의 물감을 사용해 그린 민화는 궁중 회화에서 출발해 조선시대 말(18~19세기) 대중적으로 발전했다.

서민들은 부귀와 다산을 기원하고 혼인 등에 필수적으로 민화를 사용했다. 그래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까치, 재앙과 질병을 막아주는 호랑이, 다산을 기원하는 잉어와 연꽃, 부귀의 상징인 모란 등이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격변기의 조선시대 말 서민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해 주듯이 민화는 현대에 들어와 초로에 접어든 주부들에게 큰 격려와 위안이 되고 있는 것이다.

민화는 경력단절의 아픔을 겪고 있는 중년 여성들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일러스트레이터, 모사공, 도예가, 지도강사, 각종 공모전 수상 등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은 활동을 할 수 있다. 또 작가로 성공하면 아트페어 등에 작품을 출품, 금전적인 수입도 챙길 수 있다. 실제로 ‘민화 배우기 열풍’이 일어난 이후 인사동 화랑가에는 수십 년의 화력을 쌓은 전문작가도 많이 배출되고 있다.

대학에서 도예(경희대 미대)를 전공했으나 2007년도에 민화로 방향을 바꿨다는 이지은(여·52) 씨는 요즘 민화아트페어에 출품할 작품 준비로 여념이 없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민화’를 사고파는 장터인 대한민국민화아트페어(K-MINAF)는 6월 13일부터 17일까지 서울무역전시장 1관(SETEC)에서 열린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로 2회째다.

K-MINAF에는 100여 개 전시부스에 한국 민화작가들을 대표하는 한국민화협회 회원 작품 등 1000점 이상의 민화 작품이 출품된다.

이지은 씨 역시 민화아트페어를 위한 작품을 선별 중이다. 이 씨는 “도자기에 민화풍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관심이 있어 민화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민화작가로 아트페어에 작품까지 출품하게 됐다”며 “책가도와 산수도 외에 선인장 그림 등 20여 점을 아트페어에 내놓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문화닷컴 바로가기|문화일보가 직접 편집한 뉴스 채널|모바일 웹]

[Copyrightⓒmunhwa.com '대한민국 오후를 여는 유일석간 문화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구독신청:02)3701-5555/모바일 웹:m.munhwa.com)]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