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바로가기

기사 상세

문화

"의도적인 역설 추구" …2000년대 대표 록밴드 체리필터

홍장원 기자
입력 : 
2018-04-27 06:01:01

글자크기 설정

사진설명
체리필터 /사진=나무위키
[스쿨 오브 락-55]
탄탄한 연주력, 조유진의 허스키로 무장한
2000년대 대표 록밴드 체리필터 시계를 돌리면 1990년대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록의 외피를 입은 밴드가 여성 보컬을 내세워 재치 있는 가사를 선보이며 무대를 오르는 콘셉트다. 1995년 나온 삐삐밴드는 이 분야 효시 격으로 들 만하다. 당시 보컬 이윤정의 가창력은 탁월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밴드의 콘셉트와 추구하는 음악성 측면에서는 매우 신선하다는 점수를 주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1995년 내놓은 앨범 이름이 '문화혁명'이었다. 그들은 인터뷰에서 의도적으로 노래를 잘 하지 못하는 이윤정을 내세웠다고 고백했다. 요컨대 아마추어리즘을 내세워 이런 음악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 이정표를 세우기 위한 하나의 실험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는 그들이 내세운 '펑크 정신'과 상당 부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타이틀곡 '안녕하세요'로 공중파 가요 프로그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이듬해인 1996년 보컬 주다인을 내세운 '주주클럽'이 나온 것도 이런 흐름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또 다음 해에는 '기다려 늑대'로 가요계를 정복한 '줄리엣(Juliet)'이라는 밴드가 등장했다. 다들 조금씩 추구하는 바가 달랐고, 밴드로서의 정체성이 어느 정도였느냐도 제각각이었지만 공통점은 여성 보컬을 앞세운 3인조 혹은 4인조였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여성 보컬 록밴드 전성시대였다는 얘기다.

이런 큰 흐름에서 볼때 각자 인디밴드에서 탁월한 역량을 쌓아가던 자우림이 1997년 헤이헤이헤이(Hey hey hey)로 데뷔한 것은 필연이었다. 그리고 이 1997년 결성된 이 밴드가 2000년 가요계에 등장한 것도 역시 운명이었다. 두 번째 앨범에 실린 '낭만고양이'로 가요계를 강타한 '체리필터(Cherry Filter)' 얘기다.

체리필터는 정우진(기타), 연윤근(베이스) 손상혁(드럼) 조유진(보컬)로 이뤄진 밴드다. 조유진을 제외하고 남자 멤버 3명이 1995년 결성했다가 훗날 PC통신을 통해 조유진이 합류하게 됐다. 아마도 여성 보컬을 내세운 밴드들이 우후죽순 쏟아졌던 당시 분위기가 조유진 영입 배경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3년여간 인디 무대에서 내공을 쌓은 그들은 2000년 데뷔작 '헤드 업(Head Up)'을 내놓는다(이들은 데뷔전 200회가 넘는 언더그라운드 공연을 펼치며 고군분투했다. 조유진은 상명대에서 영어교육을 전공하던 대학생이었다. 사범대는 졸업을 하려면 교생 실습을 해야 한다. 일선 고등학교 혹은 중학교에서 교생 선생으로 근무하며 경력을 쌓는 방식이다. 이 당시 조유진은 낮에는 학교에서 학생들과 만나고 밤에는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는 기묘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들의 첫 번째 앨범은 단연 수작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대중성 측면에서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체리필터를 공중파 방송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상당수 음악팬은 '낭만고양이'가 실린 두 번째 앨범을 그들의 첫 앨범이라 착각할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오버무대에서는 주목받지 못한 앨범이 '헤드 업'이다.

이 당시 이들의 음악은 굉장히 파워풀했다. 체리필터는 '터짐의 미학'을 아는 밴드였다.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스포츠카 시동을 연상시키는 음악을 했다. '으르렁 으르렁' 시동을 걸다가 풀액셀을 밟고 한번에 달려나가는 시원함이 있었다.

첫번째 앨범은 체리필터가 대중을 위해 해야하는 음악과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음악중 후자에 좀더 집중한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앨범에는 '파이브(Five)’ 등의 곡이 주목받았는데, 강약을 조절하며 곡을 쓴 능란함과 조유진의 파워풀한 보컬이 더해져 가히 수작이라 불릴 만한 작품이다.



<파이브(Five)> 비오는 하늘에 작은 빛이 고갤 내밀때

사람들 사이에 웃음병이 돌때 헤~

모여라 꿈동산인 내 얼굴이 작아보일땐

그냥 좋은것 헤야~

때로는 연인보다 은인이 더욱 절실할때

잘하려 노력해도 한숨만 날때 헤~

곰곰이 생각해도 헤야~ 너무 어려운걸 헤야~

이윤 없는 거야 헤야~ 그냥 좋은 거야 헤야~

너무 어려운 거야 헤야~ 내시간을 써줘 헤에~

가끔은 어지러워 헤야야~ 헤야야~



후략



기타리스트 정우진이 작사작곡한 이곡은 체리필터의 정체성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이정표라 할만하다. 일단 노래가사 측면에서 일상속에서 벌어지는 감정과 소회를 가사로 옮기는 체리필터 특유의 감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사랑노래를 잘 부르지 않는 것은 이들의 특징이다. 그런 버릇은 첫번째 앨범부터 도드라진다. 드라마틱한 곡의 구성과 조유진의 보컬 역량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조유진의 가창력은 한국 여가수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수준이다. 특유의 휘슬 발성으로 뽑아내는 초고음 가성은 4옥타브 후반대를 오르내린다. 잘 벼려진 스크래치로 무장한 조유진의 보컬은 한국 여가수 중에 유래를 찾을 수 없을만큼 독특하다. 서문탁의 보컬이 시종일관 무게감을 자랑하는 중후한 세단이라면, 조유진의 보컬은 결이 비슷하지만 훨씬 가벼운 느낌의 스포츠카로 비유할 수 있다. 조유진은 곡에 따라 맑은 미성도 낼 수 있고, 디스토션이 잔뜩 걸린 걸걸한 목소리도 낼 수 있다. 3옥타브 초중반대 음역에서 거칠게 몰아붙이다가 특유의 초고음 맑은 가성으로 음계를 한옥타브 이상 올려버리는게 조유진의 장기다. 한 곡에서 매우 다채로운 보컬의 결을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 '파이브'란 곡에서도 2절 후렴까지 다 부르고 난뒤, 체리필터 특유의 잘 정돈된 연결마디 이후 키를 올려 부르는 제 2의 후렴이 한번더 반복된다. 듣는 사람입장에서는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매력 포인트로 작용한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체리필터의 실질적인 메이저 데뷔곡은 두번째 앨범의 '낭만고양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이 월드컵 열기로 들끓었던 2002년 나온 이 곡으로 체리필터는 단숨에 록밴드 중 가장 대중성을 갖춘 메이저 밴드로 거듭난다. 전작에 비해 훨씬 대중성이 가미된 이 곡에서도 체리필터 특유의 문법은 그대로 남아있다. 화자가 고양이로 빙의돼 부르는 스타일로 가사의 파격을 더했다. 여전히 사랑 노래는 아니다. 전작에서 주목받았던 '파이브'와 느낌과 철학은 공유하지만 멜로디는 훨씬 친숙하다. 한번 들으면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귀에 쏙쏙 박히게 만들었다.



<낭만고양이> sweet little kitty sweet little kitty

내 두눈 밤이면 별이 되지 -

나의 집은 뒷골목 달과 별이 뜨지요

두번 다신 생선가게 털지 않아

서럽게 울던 날들 나는 외톨이라네-



이젠 바다로 떠날거예요(더 자유롭게)

거미로 그물 쳐서 물고기 잡으러



나는 낭만 고양이

슬픈 도시를 비춰 춤추는 작은 별빛



나는 낭만 고양이

홀로 떠나가버린 깊고 슬픈 나의 바다여



후략



체리필터는 이곡으로 공중파 방송 1위 후보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그해 겨울에는 전국 콘서트를 다닐 정도로 성공한 밴드가 된다. 귀여운 얼굴의 조유진에서 나오는 엄청난 성량의 파워보컬에 많은 사람들이 '역설의 미학'을 느꼈다. 성공은 세번째 앨범까지도 이어진다. 바로 다음해 나온 세번째 앨범의 타이틀곡은 '오리 날다'였다. 공교롭게도 고양이에 이어 오리였다. (전작의 성공에 기대려는 시도였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일각에서는 '동물 농장' 밴드라는 마뜩치 않은 별명을 짓기도 했다.

여기까지가 체리필터의 1부라고 볼 수 있다. 한동안 공중파 무대에서 사라졌던 이들이 다시 돌아온건 3년의 시간이 흘러서였다. 2006년 여름, 또 한번 월드컵이 열리는 해에 4번째 앨범 '피스 앤 록앤롤(Peace N' Rock N' roll)'로 컴백한다. 타이틀 곡은 '해피 데이(Happy Day)' 였는데, 시간이 흘러도 이들만의 독특한 감성은 변한게 없었다. 사실 체리필터의 오래된 팬 입장에서 두번째 앨범과 세번째 앨범의 성공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팬들은 이들의 첫번째 앨범, 심지어 이전 인디 무대에서 체리필터의 탄탄한 연주력과 조유진의 절규하는 보컬에 반해 이미 팬들 자처한 사람들이었다. 이 정도 음악성이라면 '팬심'을 바쳐도 좋을 거란 내면의 맹세를 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체리필터가 공중파 무대에 나와 고양이와 오리 얘기를 하는건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이 있었다. 네번째 앨범은 이들의 첫번째 앨범을 좋아했던 사람조차도 만족시킬 수 있을 만한 작품이었다. 일단 '동물농장 밴드'라는 오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물 이름은 배제했다. 그러면서 두번째 세번째 앨범을 잇는 체리필터의 유쾌한 역설은 꾸준히 이어졌다.



<해피 데이> 난 내가 말야

스무살쯤엔

요절할 천재일줄만 알고

어릴 땐 말야



모든게 다

간단하다 믿었지

이제 나는

딸기향 해열제 같은

환상적인 해결책이

필요해



징그러운 일상에

불을 지르고

어디론가 도망갈까

찬란하게 빛나던

내 모습은

어디로 날아갔을까

어느 별로



후략



체리필터의 낭만고양이는 말만 낭만고양이지 실제 삶은 너무나 팍팍해 낭만을 느낄 새가 없다. 체리필터의 오리는 제목에서는 날고 있지만 실제로는 날수 없는 숙명을 타고 난 존재다. 해피데이 역시 제목은 해피한데 가사는 그렇지 않다. 딸기향 해열제같은 환상적인 해결책이 필요할 만큼 힘들고, 징그러운 일상에 불을 지르고 도망갈 것을 고민할 정도로 일상은 우울하다. 이런 의도적인 역설은 체리필터의 정체성을 관통하는 것이었다. 조유진 역시 갸날픈 몸에 어떻게 저런 거친 성량의 보이스가 나올지 궁금할 정도로 그 자체로 역설을 타고 난 인물이다.

이들은 2009년 피아노시모가 실린 다섯번째 앨범(이전에 리메이크 앨범을 하나 내긴 했다. 완성도가 높은 앨범으로 평가받았다. 기존 곡을 체리필터 스타일로 재해석해 새로 창조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이후로 더 이상 공식 앨범을 내놓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2015년 나는 가수다에 출현해 건재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보컬 조유진은 복면가왕에 나와 여전한 매력 보이스를 선사하기도 했다.(그러나 매치업이 사기였다. 하필이면 77년생 동갑내기 박기영과 붙는 바람에 근소한 차이로 조기탈락했다.)

추천곡으로는 이들의 히트곡 전부를 다 들고 싶다. '오리 날다'와 '낭만 고양이'는 일단 들어야 한다. 첫앨범에 실린 '파이브'는 이보다 훨씬 거친 매력을 선보인다. 비교적 덜 알려진 곡 중에서는 두번째 앨범에 실린 '내 안의 폐허에 닿아'가 돋보인다. 감정선이 예민해져 있을때 들으면 한층 곡의 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는 곡이다. 이들이 나가수에 나와 불렀던 '그것만이 내 세상'은 명곡이다.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사람들은 때때로 절망의 밑바닥을 스스로 찾아, 그걸 손바닥으로 치고 나서야 역설적으로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촉매제가 필요할 때 이 노래에 실린 조유진의 울먹이는 샤우팅을 보면 소름이 돋는다.

[홍장원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