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사람들도 모를 '평양 문화사' 전해줄 수 있어 보람"

2018. 4. 26.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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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짬] ‘김병기 회고록’ 펴낸 윤범모 교수

<한겨레>에 연재했던 회고록을 묶어 낸 <백년을 그리다>의 필자 윤범모(왼쪽) 교수와 구술 주인공 김병기(오른쪽) 화백이 지난 21일 서울 평창동 화실에서 서로 서명을 해주며 출간을 자축하고 있다. 사진 김경애 기자

“지난 10일 원로들 모임에서 102살 생일잔치를 열어줬어요. 바로 그 잔칫상에 갓 인쇄된 <백년을 그리다>가 올라와 있었어요.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 됐어요. 지난 일년 <한겨레>에 연재할 때도 그랬지만 새삼 감격스러워요. 무엇보다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나는 역사적 시점에, 어쩌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비롯한 북한 사람들도 잘 모를 ‘평양의 근대문화사’를 들려줄 수 있어서 보람을 느낍니다. 고맙습니다.”

“김병기 화백의 생생한 증언 덕분에 남북한은 물론이고 일본까지 20세기 근대미술사의 공백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미술사만이 아니라 이념과 장르의 경계를 넘어 광폭으로 살아온 궤적 그대로가 문화예술사였습니다. 무엇보다 지금 우리 곁에 살아 계신 존재 자체가 고맙습니다.”

지난 주말 서울 평창동 화실에서 ‘길을 찾아서―한 세기를 그리다’를 묶어 낸 회고록 <백년을 그리다>(한겨레출판)의 주인공 김병기 화백과 필자 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는 서로를 “인생의 은인”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겨레-길을 찾아서’ 화제 속 연재
‘101살 현역 화가의 증언’ 책으로
‘백년을 그리다’ 102살 생일 선물로

1985년 뉴욕에서 맺은 각별한 ‘인연’
“일반인도 재밌게 읽을 문화예술사”
숨은 작가 발굴 ‘미술사 복원’ 계속

김병기 화백이 지난 4월10일 서울 명동 퍼시픽호텔에서 열린 한 원로모임에서 102살 생일 축하를 받고 있다. 그는 이날 갓 출간된 회고록 <백년을 그리다>를 답례로 회원들에게 선물했다. 김경애 기자

이미 알려진 대로, 두 사람의 인연은 1985년 뉴욕에서 시작해 어언 33년 길고도 각별하다. 한국미협 이사장으로 활약하다 훌쩍 미국으로 건너가 은둔한 김 화백을 윤 교수가 20여년 만에 발굴해 국내 화단에 복귀시킨 이래 지금껏 동반자처럼 함께해왔다. “사실 누구보다 김 화백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지난해 구술 연재를 시작해보니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너무나 많았어요. 매주 5~6시간의 특강 같은 인터뷰와 녹취 정리와 집필까지 꼬박 사흘을 매달려야 하는 작업이 힘겨웠지요. 큐레이터로서 현장 출장을 다녀야 할 때도 많아서, 사실상 호텔방과 비행기와 길거리에서 원고를 쓴 셈입니다.”

윤 교수는 “세계적으로 드문 초고령 현역 화가인 만큼 김 화백의 육성을 최대한 살리고자 최선을 다했고, 그 덕분에 예술인만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교양 교과서가 탄생했다”고 자평했다.

윤 교수는 스스로를 ‘전국구 현장 미술인’이라고 소개한다. 일찍이 미술기자, 미술평론가, 큐레이터, 미대 교수, 시인으로 보폭을 넓혀온 그는 2년 전 경원대에서 정년퇴임 이후 모교인 동국대 석좌교수로 국내외를 오가며 맹활약 중이다. 일년에 평균 2~3개의 대형 전시기획을 주관하고, <한국미술론>을 비롯한 전문서적과 평론집, 시집까지 꾸준히 펴내고 있다. “자천타천으로 시·서·화 3절을 겸한 문인의 길”로 접어든 셈이다.

“그러고 보니 김 화백과 통하는 점이 많네요. 일찍이 그림만이 아니라 문학소년이었던 김 화백도 미술평론 선구자이셨고, 지금도 엄청난 독서광이시죠. 인문학적 호기심도 많아서 예술인만이 아니라 다양한 인물들과 교류를 쌓아오셨고요.”

실제로 윤 교수는 문화예술계에서 ‘마당발’로 유명하다. 동국대 미대를 나와 같은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한 그는 중앙일보사 미술잡지 기자로 일하며 <동아일보>(1982) 신춘문예를 통해 미술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국내 큐레이터 1호’로, 호암갤러리 개관 작업을 성공시켜 촉망받던 그는 85년 돌연 사표를 내고 미국 유학을 선택해 뉴욕대 대학원에서 예술행정학을 전공했다. “그런데 미국행을 한사코 만류했던 호암 쪽에서, 회장 특명으로 돌아올 때까지 2년 넘도록 월급을 계속 지급해놓았더군요. 하지만 조직보다는 현장이 좋아 끝내 고사했죠.”

그때 호암 쪽에서는 수교 이전 금단지역이었던 중국 기행 기회까지 제공했다. 88년 수묵화가 소산 박대성 화백과 함께한 중국 답사기는 <중앙일보>에 연재됐고, 예술의전당에서 분단 이후 최초의 북한 미술전 ‘그리운 산하’를 열어 백두산 전경 등을 소개했으며, 사진기행집 <중국 대륙의 숨결>(1990)을 펴내기도 했다. <제3세계의 미술문화>도 그해 펴냈는데, 분단 이후 ‘북한 미술’을 처음으로 소개한 책으로 꼽힌다. 99년엔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과 함께 가장 먼저 북한 미술 답사를 하고 <평양미술기행>(2000)을 펴냈다. “덕분에 이번에 김 화백의 평양 이야기를 더 실감나게 전할 수 있었죠.”

평양 최고 갑부 집안, 서양미술 선구자이자 고미술품 수장가인 부친 김찬영, ‘누드화’에 도전했던 천재 화가 김관호와 삭성회 미술운동, 조만식·주기철 등 기독교 부흥의 요람, 장인 김동원·문인 김동인 형제, ‘단층파’ 등 평양 문단, 이중섭·문학수·김사량·주영섭 등등 쟁쟁한 예술인들…,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사라져버린 ‘옛 평양’은 김 화백의 놀라운 기억력 덕분에 책 속에 고스란히 재현됐다.

미술평론가로서 윤 교수가 앞장서 개척해온 분야도 ‘분단 미술, 민족 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질곡의 역사 속에 묻히거나 희생당한 예술가들을 발굴해 복원하는 데 그 스스로 소명을 갖고 있기도 하다. 나혜석, 김복진, 이응노, 이쾌대….

“노인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진다는 격언처럼, 화가가 죽으면 미술관 하나가 없어진다고 생각해요. 지금껏 발굴해 조명해온 작고 작가 등이 40여명쯤 되는데, 앞으로 계속 정리해 내는 게 필생의 과제입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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