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가 키운 '능력있는 3세' 환상의 종말

박용하 기자 2018. 4. 26.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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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 조현민씨 강연 주요 발언 “자기 직급에 맞게 열심히 일해야 한다. 리더십은 실력과 소통 능력에서 나온다” - 2012년 2월 성균관대 “이제는 숨겨도 누군가가 찾아내는 무서운 세상…진심이 가장 영향력 있어” “10년 내 영향력 있는 100인에 뽑히고 싶다” - 2012년 7월 전경련포럼 “매너 있는 브랜드란약속을 지키고 믿음과 신뢰 주는 기업” - 2012년 9월 숙명여대

“(리더십을 갖추려면) 자기 직급에 맞게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리더십은 실력과 소통 능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는 2012년 성균관대 강연에서 ‘리더십’에 대해 묻는 학생에게 이같이 대답했다. 당시만 해도 조 전 전무는 자신의 리더십을 자랑스럽게 전파했으나, 이 같은 모습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지난달 광고대행사와 회의 중 자신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물컵을 던지는 ‘갑질’을 벌였다는 의혹에 휘말렸으며, 결국 임원직을 사퇴했다.

조 전 전무는 갑질 논란을 빚기 전에는 재계의 ‘스타강사’로 유명했다. 26일 재계 등의 말을 종합하면 2008년 대한항공의 ‘미국 어디까지 가봤니’ 광고캠페인이 흥행했는데, 이 같은 실적은 조씨의 능력으로 알려졌다. 그 뒤 조 전 전무는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이후 수많은 강연에 나섰다. 기업체는 물론 여고부터 대학교, 언론사, 심지어 병무청에서까지 강연을 했다. 여러 어록도 남겼다. 2012년 7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제주에서 연 포럼에서는 “이제는 숨겨도 누군가가 찾아내는 무서운 세상이라, 진심이 가장 영향력 있는 마케팅”이라고 했으며, “10년 안에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100인에 뽑히고 싶다”고 자신의 포부를 말하기도 했다. 같은 해 9월 숙명여대 강연에서는 “매너 있는 브랜드란 약속을 지키고 믿음과 신뢰를 주는 기업”을 강조했다.

전경련은 조 전 전무를 재벌 3~4세 기업인의 성공 모델처럼 전파했다. 조씨를 재벌 3~4세들을 위한 강사로 자주 초청했는가 하면, 2014년과 2017년 전경련 산하 IMI국제경영원이 주관하는 ‘차세대 CEO 아카데미’ 강연자로 초대했고,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는 ‘신성장 동력단 교육’의 강연자로 모셨다. 또 전경련은 지난해 조씨를 전경련 대표로 미국에 보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전경련이 조씨를 통해 “재벌 3~4세도 충분히 능력이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재벌 3~4세의 리더십 부재는 그간 재벌기업 오너들의 아킬레스건이었다. 국내 대다수 대기업집단의 핵심 이슈는 경영권 승계인데, 이들의 빈번한 일탈로 여론의 도마에 자주 올랐고, 시민단체들은 재벌 총수일가의 무리한 경영권 승계를 비판했다.

이 때문에 재벌들은 족벌경영에 대한 합리적 명분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전경련의 경우 그간 총수일가들이 경영 전면에 나서는 ‘가족기업’도 경영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는 연구와 주장을 수차례 내놓은 바 있다. 또 실제 능력 있는 재벌 3~4세도 있음을 증명할 필요도 있었는데, 대한항공의 광고 캠페인을 성공시킨 것으로 알려진 조씨는 그나마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 전 전무마저 큰 사고를 치며 능력이나 리더십이 검증된 재벌 3~4세의 모습은 더욱 찾기 어려워졌다. 조씨는 당초 다음달부터 시작되는 ‘전경련 차세대 CEO 아카데미’에서 ‘창업보다 어려운 한진그룹 재계 3세의 수성과 혁신’이란 내용의 강연을 하려 했지만, 갑질 논란으로 일정은 취소됐다.

특히 조씨의 갑질은 그가 리더십을 발휘해 광고를 만드는 순간에 나왔기 때문에, 그간 해왔던 조씨 강연 전부가 무색해진 상황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큰 사고만 안 쳤다면 강연 내용 자체는 비판받지 않았을 텐데, 러더십과 관계된 갑질이라 진정성도 의심스러워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재벌들의 가족경영이나 경영권 승계·방어 등의 명분도 미약해졌다.

위평량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은 “이제 국내에서 능력을 검증받은 재벌 3~4세들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며 “이들의 자질이 의심스러운 만큼, 총수일가가 경영권을 꼭 승계해야 한다거나 방어해야 한다는 명분도 없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위 연구위원은 “조현민씨 사건으로 재벌 3~4세들의 실태가 드러난 만큼, 시민들과 국회의원들이 이를 명확히 알고 족벌경영을 견제할 수 있는 상법개정안 통과까지 이어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용하 기자 yong14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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