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에서 한 달 살기 천국과 지옥 사이

구완회 2018. 4. 26.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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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 아들과 유치원생 딸을 둔 우리 가족은 지난 겨울방학 내내 방콕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해외 한 달 살기'의 단맛과 쓴맛을 골고루 경험했다.

시작은 집이었다. 사실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집을 사고 싶었다. 결혼하면서 집 구할 돈으로 20개월 세계일주 신혼여행을 다녀온 나와 아내의 모토는 늘 ‘집보다 여행’이었지만 큰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동네 놀이터에서 우정을 쌓은 아이의 친구들, 서로 아이를 맡길 만큼 친해진 동네 엄마들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갈 엄두가 안 났다. 그럼 아예 집을 사서 이 동네에 정착할까?

문제는 돈이었다. 전세금 얼마, 가진 돈 얼마, 대출은 또 어디서 얼마… 아무리 주판알을 튕겨도 속 시원한 결론 대신 골치만 아파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입에서 불쑥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 돈이면 차라리 한 달쯤 나가 살자!”

계획을 바꾸니 복잡하던 머릿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집을 안 사면 그 돈으로 한 달, 아니 한 해쯤 해외여행을 다닐 수도 있겠는걸? 오호, 갑자기 가난뱅이에서 부자가 된 것만 같았다.

ⓒ구완회 타이 방콕 북부 아유타야의 상징인 ‘나무뿌리 속 부처머리상’ 앞에서 찍은 구완회씨(맨 오른쪽) 가족사진.

먼저 검색창에 ‘한 달 살기’를 쳤다. 연관 검색어로 제주도뿐 아니라 방콕, 치앙마이, 세부, 쿠알라룸푸르에서 런던, 파리, 뉴욕, 시드니까지 전 세계 도시들이 줄줄이 뜬다. 음, 이 중에 하나를 골라서 가면 된단 말이지? 그렇게 딱 반나절 고심해 고른 도시가 방콕이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겨울방학을 여름 나라에서 보내고 싶었다. 서울의 2.5배에 달하는 면적에 고풍스러운 왕궁과 사원, 첨단 쇼핑몰이 공존하는 도시라는 점도 한몫했다. 당연히 아이들과 함께 가볼 곳도 차고 넘쳤다. 방콕 장기 여행을 계획했지만 진짜 ‘방에서 콕’만 할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파먹고 또 파먹어도 화수분처럼 음식들이 샘솟는 냉장고 비우기에 마침내 성공하고(몇 가지는 그냥 버렸다), 벅찬 가슴으로 방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가 흰 구름을 뚫고 푸른 하늘에 이르자 초등학교 1학년 슬기는 러시아워(퍼즐을 닮은 보드게임)를, 유치원생 슬아는 인형놀이 세트를 꺼내 놀았다. 마치 집처럼 자연스럽게. ‘겨울방학 방콕 살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장밋빛이었다. 방 둘에 널찍한 거실, 무엇보다 전망이 끝내주는 수영장을 갖춘 콘도는 하룻밤에 2만원 남짓이었고, 첫날 저녁 포스퀘어 (글로벌 맛집 앱)가 추천한 동네 맛집에서 ‘인생 볶음밥’을 맛보았으니. 아침마다 ‘이러다 늦어!’라는 잔소리 대신 ‘오늘은 뭘 하고 놀까’를 궁리했다. 우리의 겨울방학 기간은 타이(태국)의 건기여서 여행하기 가장 좋은 때였다. 낮에는 더웠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새 소리를 들으며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을 먹고,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다 더우면 쇼핑몰에 들어가 땀을 식히고 숙소 안 수영장에서 하루를 마감했다. 우연히 맞은 타이 어린이날(1월 둘째 주 토요일)에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다양한 이벤트에 참가하고 푸짐한 선물도 챙겼다. 아, 역시 집보다 여행이야! 이대로 쭉 즐겁게 겨울방학을 보내고 검게 탄 얼굴로 돌아가 동네 친구들의 부러운 눈길을 의연히 받아주면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여행도 사람 사는 일이라, 인생의 단맛과 쓴맛이 고루 섞여 있었다. 처음엔 단맛에 취해 쓴맛을 못 느꼈을 따름이다.

ⓒ구완회 딸 슬아가 좋아했던 딸랏롯파이 야시장의 로띠 가게.

쓴맛의 시작은 일곱 살인 슬아의 향신료 거부반응이었다. 고수 같은 향신료는 물론이고, 그것들이 스쳐 지나간 음식 앞에서도 도리질을 쳤다. 한동안 카오팟(볶음밥)이나 똠만꿍(으깬 새우튀김), 무삥(돼지고기 꼬치) 등 향신료 없는 음식으로 잘 지냈으나, 곧 그것들에 싫증을 내면서 ‘헬 게이트’가 열렸다. 슬아가 이리도 입이 짧은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한번은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무려 다섯 가지 음식을 차례로 ‘진상’했으나 무참히 거부당했다. “슬아야, 아빠 성의를 봐서라도 한번만 먹어보자”라는 읍소는 “내가 왜 이런 음식을 먹어야 해!”라는 일갈에 묻혀버렸다. 아니, 이런 ‘진상’을 보았나!

시도 때도 없는 아이들의 싸움박질도 지옥의 열기를 더했다. 오빠인 슬기는 집에서도 ‘동생 괴롭히기’가 취미였는데, 낯선 땅에서 동생과 24시간을 함께 보내니 그 증상이 더욱 심해졌다. 음식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슬아도 가만있지 않았다. 사소한 놀림에서 시작한 다툼은 이내 앙칼진 비명과 울음, 손톱과 이빨 자국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아니, 얘들아! 이역만리 타국에서 남매끼리 서로 의지하며 사이좋게 지내면 안 되겠니?

시도 때도 없는 아이들의 싸움박질

상황이 여기에 이르니 여행은 고행이 되었다. 우리가 이러려고 돈 들여 여행을 왔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아내와 맥주 한 병을 놓고 특별 대책회의에 들어갔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없었다. 한 잔, 두 잔… 이야기는 옛날 세계일주 신혼여행을 다닐 때 얼마나 즐거웠는지, 지금도 아이들만 없으면 정말 신나게 여행을 다닐 수 있을 것 같다는 신세 한탄으로 흘렀다. 이것들이 엄마 아빠의 소중한 선물에 감읍하기는커녕 툭하면 진상 짓과 싸움으로 여행을 망쳐버리다니!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이번 여행은 우리가 좋아서, 우리가 하고 싶어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우리를 위해 기꺼이 함께해준 것이었다. 꿈에서도 그리운 친구들과 헤어져, 입에 맞지 않는 음식과 무더위에 고생을 하면서도 말이다. 이번 여행은 아이들이 우리에게 준 소중한 선물이었다.

방콕은 천국도 지옥도 아니었다. 때로는 천국처럼 즐거웠다가 가끔은 지옥처럼 괴롭기도 한, 우리가 사는 세상이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새로운 세상에 잘 적응해갔다. 조금씩 새로운 맛에 도전하던 슬아는 ‘넘사벽’처럼 보이던 똠얌꿍까지 성공하고는 스스로 뿌듯해했다(물론 고수는 뺐다). 슬기는 점점 더 많이, 더 잘 동생과 놀아주었다(물론 싸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이들 덕분에 새로운 방콕을 경험했다. 뽀로로 워터파크, 요요랜드, 카오키여우 오픈주, 칠드런디스커버리뮤지엄 등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절대 몰랐을 곳에서 신나고 재밌게 놀았다.

그렇게 쏜살같이 시간이 흘러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날. 아이들은 한 뼘씩 자라고 우린 그만큼 늙어 있었다. 서로를 더 많이 알고, 그만큼 더 사랑하게 되었다.

구완회 (여행작가)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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