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브리핑] "이 맛을 못 본 이요! 상상이 어떻소!"

손석희 2018. 4. 25.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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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 백석 < 국수 >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인 백석에게도 이렇게 길고 긴 설명이 필요했던 것 냉면입니다.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10살 무렵 어머니와 난생 처음 냉면집을 갔던 날을 기억합니다.

대체 어른들은 이걸 무슨 맛으로 먹는 걸까.

누런 놋그릇 안에 담긴 밍밍하고 슴슴한 맛.

처음 먹으면 뭔지 모를 희미한 국물이지만 북녘식 표현에 따르면 냉면은 국물을 들이키면 쩡~한 맛이 난다고들 하는군요.

그 맛을 알아내는 데에는 좀 더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나라는 두 쪽으로 갈라져서 말글도 조금씩 달라지고 시간마저 다르게 사용하는 두 개의 세상.

그러나 이 설명하기 어려운 맛에 대해서는 경계선이 없었습니다.

북녘의 국수.

즉 냉면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중화되었고 전쟁 이후에는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여 팔도의 산맥을 뛰어넘는 음식으로 널리 퍼졌던 것입니다.

같은 말과 같은 식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퍼렇게 날이 선 마음을 누그러뜨리기도 했습니다.

1948년 4월에 어떻게든 분단을 막아보고자…38선 넘어 김일성을 만났던 김구 선생 역시.

냉면 앞에서는 풀어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선생은…평소 입에 대지 않던 소주까지 곁들이셨다. 내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던 선생도 평양냉면 앞에서는 마음이 절로 풀어지는 듯 했다"
- 선우진 < 백범 선생과 함께 한 나날들 >

그렇습니다. 선생은 황해도 해주 출신이었습니다.

이틀 뒤, 정상회담 만찬상에 냉면이 오른다고 하지요.

냉면은 분명 차가운 음식이지만 알고 보면 뜨겁습니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은 가난한 시절, 좋은 식재료였고 추운 겨울밤 배고픈 이들의 속을 든든히 채워주는 따뜻함이 있었습니다.

백석의 말처럼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 혹은 또 다른 작가의 말처럼 '속이 클클할 때라든지 화가 치밀어오를 때' 막힌 속을 풀어주는 시원함 그리고 뜨거움.

이틀 뒤면 평양 옥류관의 냉면 요리사가 판문점 만찬장으로 온다는데…

그가 만들어 낸 냉면 역시 그런 시원함과 뜨거움으로 남북의 만남을 풀어낼 수 있을까…

냉면에 입문한지 50년이 넘은 저도 그 맛이 궁금합니다.

"평양냉면의 이 맛을 못본이요! 상상이 어떳소!"
- 김소저 < 별건곤 1929년 12월호 >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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